이곳은 노르웨이의 호텔. 오늘은 12월 14일로 그의 생일입니다. 그의 생일을 기념하며 오로라를 볼 수 있다니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일인가요. 오늘의 오로라 지수는 6으로 육안으로도 선명하게 펄럭이는 오로라를 목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오색으로 반짝이는 빛의 장막은 그 숭고하기까지 한 아름다움으로 신의 옷자락이라 불리기도 한다네요.
──신의 옷자락. 정말 신이 있다면, 신의 옷자락에 닿을 수 있다면,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할까요.
“신은 존재해. 하지만 우릴 위해 존재하진 않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더는 빌지도 않습니다.
이곳은 노르웨이의 호텔. 오늘은 몇 번째인지 모를 12월 14일, 모든 것이 퇴색되어버린 반복되는 오늘 중 어느 중간입니다.
창 너머로 간간이 비명이 들립니다. 하지만 어제…, 아니 지난 ‘오늘’에 비하면 현저히 줄었습니다. 비명을 지르고 분노해봤자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모두들 차츰, 차츰 실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완벽한 체념, 완벽한 침묵이 찾아올 날도 머지않겠죠.
그러나 아직입니다. 아직, 아직 인류에겐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당신과 내게도.
“에슬리…….”
깨어난 그는 언제나 충혈된 눈을 하고 있습니다. 광기 탓인지 울음 탓인지. 몇 번이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줘도 그를 진정시키기란 쉽지 않습니다. 절개의 흔적이 남은 몸, 절개선 밖으로 있어야 할 것들을 모두 잃은 몸, 텅 빈 몸에 대신해 깃든 불사, 원하지 않은 것, 바라지 않은 것, 그렇게 강제로 이 세상의 중심으로서 산제물이 되어버린 그를 진정시키기란. ……진정시킬 면목조차 없습니다.
떨리는 손이 목을 감싸 쥐고 비틀려 조여 오면 나는 그저 가만히 당신에게 몸을 맡깁니다. 숨이 막히고 옥죄이는 목이 아프고 구역질이 치밀 것 같으며 눈앞이 캄캄해지는 그 순간을 그저 가만히, 당신에게.
……당신이 끝내는 손의 힘을 풀고 말 것을 알기에.
그러면 내가 느끼는 것은 안도인지 아쉬움인지. 오늘도 나는 당신에게 잔인한 짓을 합니다. 내가 당신의 벌 받아 마땅한 사람이라는, 내게도 당신에게도 상처를 주는.
아침 7시, 당신의 발작이 한 번 지나면 극야의 짧은 해가 뜰 때까지 겨우 잠시간 평온해집니다. 다시금 잠이 든 당신을 무릎에 누인 채 나는 그러나 잠들지 못합니다.
눈을 감는 순간 덮쳐올 악몽에서 도망치기 위해.
「에슬리, 에슬리…… 아아, 아아악!」
──두 귀를 찔러버리면 소리에서 멀어질까. 눈을 뽑으면 풍경이 지워질까.
바로 어제 벌어진 일처럼 생생한, 조금도 빛 바래는 일 없는 참극이 있습니다.
내가 그를 밀었습니다.
희게 질린 그의 손을, 뻗어오는 손을 잡아주지 못한 채 보냈습니다. 그가 지르는 비명이 온몸의 화살처럼 꽂히고 괴롭게 몸을 비틀던 모습이 제 목을 비트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가 칼에 찔리는 순간 나도 똑같이 찔린 것만 같이 아팠습니다. 배가 갈라져 돌과 눈밭으로 시뻘건 피를 토해내는 그에 분명 나도 피를 토하는 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모두 그가 겪은 일입니다. 그만이 겪은 일입니다.
바로 내가 그를 밀었습니다.
「내게 돌아와 줘.」
욕심낼 것을 틀렸습니다. 어리석은 나. 어리석은 에슬리.
“누가 당신을 망가트렸지. 당신을 망가트린 것들에게 전부 그 두 배의 복수를 해주고 싶은데. 그러면 나는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어.”
식은땀이 맺힌 앞머리를 닦아주고 드러난 이마에 입 맞추며 소중히 그를 감싸 안습니다. 그러면서도 늘 두렵습니다. 그에게 난 여전히 사랑하는 연인일지. 그도 아니면 끔찍한 저주를 건 원망스런 존재일지. 깨어난 그에게 물어보고 싶으면서도 매번 두려워 묻지 못합니다. 그를 위하는 척하며 이 순간까지도 나는 그의 사랑을 바라는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나를 증오해? 나를 원망해? 루, 응? 루.”
입술을 깨물고 흐느낌을 삼킵니다. 그러나 끝내 억누르지 못하고 감긴 그의 얼굴로 뜨거운 것을 떨어트립니다.
“미안해. 미안해…. 내가 당신을 망가트렸어. 내가 당신을 구하지 못했어. 내가, 내가…… ……그런데도 당신을 사랑해. 미안해. 미안해, 루…….”
그저 당신과 행복하고 싶었을 뿐인데. 두 사람이서 함께라면 행복하지 않을 리 없다고 믿었는데. 내 오만이었을까요.
내겐 아직도 당신이 세상의 중심이고 전부인데, 당신의 중심은 어디로 가버렸어? 당신의 안에서 나는 어떻게 남아 있을까요.
“사랑해 루. 오늘도, 다음 오늘도, 또 다음 오늘도….”
반복적으로 중얼거리는 내 목소리가 어쩐지 내게도 낯설게 들립니다. 그럼에도 고집스럽게 읊조립니다.
우리의 영화는 아직 엔딩을 맞이하지 않은 게 틀림없습니다. 지금은 그저 해피엔딩으로 향하는 고난의 중간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