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급한 봄으로 뒤덮인 곳이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내딛은 발아래의 잔디에 에슬리는 당장 신발을 벗어던지고 싶어졌다. 위로는 부서지는 노란 햇살, 아래로는 잘 마른 풀과 꽃, 밤새 내린 잔설이 아침의 찬 공기로 반투명하게 얼어붙었던 이트바테르에서 고작 반나절 떨어진 곳에 왔을 뿐인데 이렇게 공기가 다를 줄은 몰랐다. 물론 그 반나절의 이동에 워프게이트가 끼어있는 건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이트바테르에서 남쪽으로 쭉 내려오면 나오는 제국 제일의 항구도시, 폴라리스. 거기서 다시 배를 타고 휴양지로 유명한 작은 섬으로 이동하는 여정이었다. 새벽부터 출발한 여행은 점심나절이 되어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루, 이것 봐. 발바닥이 간질간질해.”
“벌써 벗은 거야? 정말이지.”
모처럼 신었던 구두는 두 짝을 나란히 한 손에 흔들고 스타킹의 얇은 천 아래로 전해지는 어린 풀의 감촉을 만끽한다. 오늘따라 더 들뜬 것 같아. 못말리겠단 그의 말에도 에슬리는 상기된 뺨으로 아하하, 웃을 뿐이었다. 열이 오른 뺨을 익숙하게 손바닥으로 매만지며 루는 그제야 내내 궁금해 하던 이야기를 꺼내었다.
“드문 일이네. 에슬리 네가 먼저 이런 곳에 오고 싶단 말을 꺼내고.”
에슬리는 이제야 답할 준비가 되었단 듯 개구진 표정으로 그에게서 몇 걸음 떨어져 두 팔을 벌렸다. 여기까지 와야 할 일이 있었다.
* * *
하나의 임무를 마무리 지으면 다음 임무가 올 때까지 이트바테르에서 머문다. 가끔은 움직일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돌아오자마자 새 임무지로 보내지기도 하지만 대체로 에슬리의 휴가 신청은 늘 통과되었다. 그러면 비행정 시간을 기다리며 연인에게 연락을 한다. 응, 다친 데 없어. 정말로! 못미더우면 가서 확인해봐. 응, 이제 곧 가. 챙길 짐은 거의 없었다. 연인과 나눈 목걸이, 저번 크리스마스에 선물 받은 머리핀, 통신석과 신분증 정도의 주머니 하나면 충분한 수준이다. 거기에 오늘은 하나 더, 선박 티켓과 지도가 추가되었을까.
촘촘히 별이 박힌 머리핀을 든 채 거울 앞에 서서 한참 고민하던 에슬리는 비행정 시간이 다가오자 결국 손안에 꽉 쥔 채 기숙사를 나섰다.
많은 것이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아직은 멋쩍고 익숙해지기 어려운 것들도 있었다. 익숙해지는 동안 다시 새로운 익숙지 않은 것들이 생기기도 했다. 이트바테르로 향하는 길은 전자였고 머리핀은 후자에 속했다. 선배, 또 휴가예요? 다녀오세요. 정문을 지키던 후배의 인사를 받으며 에슬리는 살짝 쑥스런 얼굴로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를 만나러 갈 때면 입는 팔랑거리는 스커트는 개중 제법 익숙해진 것에 속한다.
비행정에서 내려 다시 마차를 타고 이동. 그렇게 멀지도 않지만 가고 싶은 마음에 비하자면 한없이 멀다. 마차에서 내려 2층으로 된 건물이 보이기 시작하면 에슬리의 걸음은 조급해졌다.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다음 발을 내딛어 거의 날 듯 계단을 오르고 문을 열면 기다리던 이가 반겨줄까? 눈으로 확인하기도 전에 물씬 풍기는 그의 냄새에 에슬리는 온 힘을 다해 연인의 품에 안겨들었다.
“다녀왔어, 루!”
“어서 와.”
돌아오자마자 그의 품에 안겨 에슬리가 꺼낸 첫 마디는 ‘여행을 가자.’ 였다. 바로 내일 출발하는 갑작스런 일정이었다. 조금 놀란 눈을 하던 루는 하지만 곧 느슨하게 웃으며 며칠이나? 이번엔 어디야? 금세 받아주었다.
흥분은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쭉 이어졌다. 설렘은 워프게이트를 벗어나면서부터 최고조에 달했다. 공기가 달랐다. 뱃고동 같은 목청을 지닌 선원들이 여기저기서 암호와 같은 대화를 주고받고 선박장 근처에선 노인들이 싱싱한 물고기를 팔았다. 짠 냄새와 비린 냄새로 가득 찬 거리에서 살짝 벗어나면 선원들과 관광객들을 위해 아침부터 성대하게 지지고 익히는 각종 음식 냄새가 뒤섞여 식욕을 자극했다.
그 중에서도 갓 구워내 쫀득한 흰 빵에 소금과 버터로 졸인 흰살 생선 뫼니에르를 끼워 넣은 샌드위치는 두 사람의 좋은 아침 식사였다. 떠들썩한 아침 시장을 느긋하게 걸으며 샌드위치, 석화로 구운 소라 꼬치와 그 자리에서 짜주는 생과일주스까지 배불리 먹고 나면 딱 알맞게 배에 탈 시간이었다.
“그런 식으로 샌드위치를 해먹을 줄은 몰랐어. 굉장하네.”
“신선한 조합이었어. 가볍게 먹기에도 좋았고 공부가 되었는걸.”
흰 돛이 풍선처럼 부풀고 물살을 가르며 배가 운항을 시작한다. 낯설고 새로운 것 앞에서 에슬리는 늘 어린아이처럼 흥분했다. 모험과 여행은 그녀의 활기이자 생기였다. 부는 바람 앞에서 쭉 기지개를 켜며 에슬리는 끝을 모르고 펼쳐진 대양에 눈을 뜨겁게 빛내었다. 소금기가 묻어나는 바닷바람에 검은 리본이 나풀나풀 흔들렸다. 최근 조금 길어진 머리카락을 이렇게 묶는 게 에슬리는 마음에 들었다. 몇 번 한 적 없는 머리핀은 조금 어색해 귀를 넘기려다 괜시리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그러다 그와 눈이 마주치면 반사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피해놓고 아차 했다. 여기서 눈을 피하면 내가 지는 건데. 혼자 억울해하고 있으면 루는 굳이 그 점을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에 보이는 미소가 이럴 때는 유독 얄밉다.
“그래서 아직도 어디가 목적지인지는 말 안 해주는 거야?”
“음~ 조금만 더. 도착할 때까지만.”
갑판을 밟고 뱃머리에 올라서 감겨 오는 그의 팔위에 제 손을 얹는다. 두 사람분의 방풍막에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선 자리로 고였다. 고인 바람을 손가락으로 휘젓다 턱을 올리면 정수리 위로 그의 얼굴이 보였다. 색이 거진 빠져버린 눈동자 안이 반짝반짝했다. 아마도 바다가 반사시킨 햇살에 불과할 테지만 에슬리에겐 그라는 존재가 만든 별빛 같기도 했다. 예쁘다. 혼잣말과 함께 히죽 웃으며 그의 긴 눈썹과 눈동자의 주변을 손끝으로 덧그려 만지면 응? 하고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꼬리는 또 얼마나 달짝지근한지.
애정 어린 시선을 받는 것은 여전히 간단하지 않았다. 낯설다거나 제 것이 아닌 것 같은 불편함과는 다르다. 간단하지 않다. 아마도 천일의 반을 채우도록 그러한 이유는 타고나길 그녀가 서툰 탓도 있겠지만, 여전히 간절한 탓도 있을 것이다.
“사랑해, 루.”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사랑한다고 말해주길 바라는 것이다. 혀끝으로 감기는 수줍음을 한 번 깨물며 연인을 당겨 속삭였다. 오늘따라 어리광쟁이네. 머리 위로 들리는 웃음기 섞인 답에 에슬리는 얼른, 하고 답을 보챘다.
배는 어느새 섬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배가 선착장에 닿기 전부터 바다를 건너 달려갈 듯 몸을 내미는 에슬리의 어깨를 루의 손이 염려를 담아 붙잡아두었다. 뭘 걱정하는 거람. 투덜거리며 에슬리는 어깨에 올라온 손을 떼어 제 손의 깍지를 끼고 말았다. 같이 내릴 거야. 그 말에 연인이 겨우 눈썹을 누그러트리며 응. 고개를 끄덕였다.
───되짚어보면 많은 곳을 다녀왔다. 가을의 울, 봄의 베일, 여름의 비사우, 겨울의 엘버. 새로운 곳을 탐방하는 게 즐거웠고 모르던 것을 알게 되는 게 즐거웠다. 본 적 없는 풍경을 눈에 새기고 처음 맛보는 음식을 혀에 새기고 낯선 공기를 흠뻑 마시며 머릿속 세계지도의 조각을 채웠다. 그러나 어디를 가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그저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증명이 되고 말아.」
언젠가 그가 들려주었던 말 그대로다. 두 사람이 함께란 것만으로 모든 의미와 이유가 채워진다. ‘어디’가 아닌 ‘당신’과.
모든 것이 그에게로부터 의미를 갖는다.
어때, 예뻐? 두 팔 아래로 펼쳐진 꽃밭을 그에게 자랑하듯 내보였다. 이걸 보여주고 싶었다. 푸르게 물든 들판에서 한두 걸음 옮긴 것만으로 경계가 달라져 흰색, 노란색, 붉은색, 주황색, 그 외에도 온갖 색의 물감을 끼얹은 듯 화사한 꽃밭. 어디보다도 이른 봄이 담긴 곳이었다.
그래서 찾았다. 바다를 건너 먼 남쪽의 꽃밭까지 오는 전부가, 온화한 날씨도 오늘이란 날짜마저도 오로지 그를 위함이다.
“루에게 꽃을 주고 싶었어. 이트바테르는 아직 꽃이 피지 않았으니까.”
여기 앉아봐. 부드러운 풀밭 위에 그를 앉히고 뒤를 돌아 꽃을 찾았다. 한 송이, 두 송이, 검은 치마 위로 꼭 별을 담듯 혹은 볕을 담듯 노란 꽃송이들이 굴렀다. 이렇게 꺾어버리고 말아서야 금방 시들고 말겠지. 한 때는 그 시들고 말 것에 마음을 주는 일이 무서웠다. 실은 지금도 무서움이 남아 있다. 에슬리는 여전히 영원을 믿지 않는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만족스러울 만큼 치마 위로 꽃을 쌓아 얌전히 그녀 하는 양을 지켜보던 그에게로 몸을 돌렸다. 한 송이, 한 송이가 그녀의 마음을 형태로 내보인 것만 같았다. 정말 마음에도 형태가 있다면 좋을 텐데.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그러면 더 쉬울 텐데 말이야. 그게 어려우니까 마음을 주고받는 일도 어려운 거겠지.
그래서 오늘도 에슬리는 그에게 마음을 전한다. 마음을 준다.
그리고 오늘도 청한다. 당신의 마음을 내게 줘.
“어때, 루? 꽃밭을 보아서 기뻐졌을까? 함께 먼 곳으로 여행을 와서 행복해졌을까? 나는 행복해졌어. 꼭 오늘치의 행복이야.”
그의 앞에 쪼그려 치마 가득 쌓인 꽃송이들을 보였다. 한 송이 들어 손바닥 위로 굴리면 이 얼마나 작고 연약한 생명인지. 끊긴 줄기로부터 생기가 새어나가는 것이 눈에 보일 것만 같았다. 그게 안타까우면서도 애틋하다.
“오늘로 500일이래, 루. 무슨 날짜냐고 하면 루가 내게 사랑한다고 말해준 날로부터 500일이야. 나는 한 번도 이렇게 길게 숫자를 헤아려본 적이 없어서 신기하고 놀라워.”
우리의 500일 사이에도 얼마나 많은 꽃이 피었다 졌을까.
“꽃이 시드는 것처럼 사랑도 시들어. 물이 마르는 것처럼 행복도 말라. 행복은 소모품이란 걸 알았어. 그래서는 역시 영원 같은 건 없는 것만 같지.”
그러나 꽃은 내일도 필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늘 영원을 믿고 영원을 바라고. ……그게 말이지, 이제 조금 알 것 같아. 어떻게 하면 영원을 입에 담을 수 있을지. 믿을 수 있을지.”
사탕을 받은 적이 있다. 동그랗게 윤기가 흐르던 노란 사탕. 받자마자 입에 넣고 깨물었더니 금세 다 녹아 사라지고 말았다. 허망하고 슬펐다. 그러자 새로운 사탕이 주어졌다.
「또 줄게요.」
간단한 일이었다. 쓰지 않으면 내가 행복하지 않고 쓰면 자꾸만 닳아서 없어져버린다. 그렇다면 닳는 만큼 채워 넣자.
두 손 가득 꽃송이를 움켜쥐고 일어난다. 그녀를 따라 올라오는 시선에 눈동자는 맞추면 기분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마다 나는 루에게 새롭게 사랑을 하는 것만 같아. 아침 해가 뜰 때마다 루를 사랑하는 마음도 같이 떠올라. 그래서 매일 바라. 부디 당신도 나와 같기를. 오늘도 내게 꽃송이 같은 행복을, 사랑을 가득 채워주길.
“있지, 루. 오늘의 나는 행복해. 루와 함께할 수 있어서, 함께 있어서. 그러니까… 내일도.”
──내일도 내게 행복을 채워줘.
함께 행복한 일을 하자. 행복해지는 일을 해줘.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지듯 송이송이 꽃송이가 떨어져 내린다. 연인의 머리 위를 노랗게 물들이는 색에 에슬리는 환하게 웃었다.
“루의 사랑으로 나를 채워줘.”
500일!
굉장한 숫자예요. 500이라니. 무려 영화 300보다도 1.5배는 많은 숫자예요. 놀랍죠. 그리고 제 사랑도 500만큼 커진 것 같아요.
루 모겐스 500일의 시간만큼 사랑해...ㅠ 천일까지 사랑해줘. 1001일에는 마치 첫날처럼 또 사랑을 고백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