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루
메리 크리스마스
: 루 모겐스
재미난 꿈을 꾸었다. 만난 적 있을 리 없는 제 어린 시절과 그의 어린 시절이 한 자리에 모여 있는 풍경이라는 아주 재미난 꿈. 꿈이어서 그런 걸까, 있을 수 없는 일을 재현해두어서 그런 걸까.
한 가운데 우뚝 선 높은 전나무, 전나무를 가운데 두고 해와 달이 동시에 빛나던 하늘, 반짝반짝하게 내리던 눈은 만져도 녹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게 여러모로 지나치게 인조적이었지만 썩 나쁘지 않았다. 이제껏 겪은 수많은 이상한 일들에 비하면 한참 즐겁지.
남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는 건 별로 즐겁지 않았지만 커다란 전나무를 트리로 바꿔나가는 일은 즐거워서 의욕을 보였다. 아무것도 장식되지 않은 심심한 나무에 흰색과 빨강색이 엿가락처럼 얽혀서 지팡이 모양으로 굳은 캔디케인, 빨강, 파랑, 금색, 은색, 색색의 동그란 공 장식인 쿠겔, 은색으로 빛나는 길고 주렁주렁한 가랜드에 마지막으로 별 대신 빛나는 전구 장식까지 주렁주렁 달아가며 트리로 바꿔나가는 건 어떤 대단한 성취감도 주는 것 같았다.
그치만 트리라고 하면 역시 꼭대기의 별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어느 전승에서 신에게 닿겠다고 하늘을 뚫을 듯 탑을 세우려던 것처럼, 이 날만큼은 하늘의 별보다도 제가 더 빛나겠다는 듯 노란 빛을 과시하는 커다랗고 단단한 별 말이다.
어린애를 앞에 두고 자기가 별을 달고 싶다거나, 어른스럽지 못하단 자각은 있었지만 알 게 뭐냐였다. 에슬리에게 양보란 어린애든 어른이든 통하지 않는 말이었다. 그만큼 제가 갖지 못했던 것에 대한 고집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잠에서, 꿈에서 깬 그녀가 연인의 방으로 찾아가 제일 먼저 이 말을 꺼내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별을 사러 가자!”
하늘보다 눈부신 트리를 만들자. 우리의 행복이 바로 여기 있다는 걸 알 수 있도록.
* * *
눈이 내릴 기미는 보이지 않는 크리스마스 당일의 하늘이었다. 눈은커녕 시리도록 쾌청하여 새파란 하늘 아래로 제 입김만이 보였다. 이래선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무리인가. 말하자 옆에서 그가 작게 웃었다.
“눈이 보고 싶었어? 지금이라도 엘버로 갈까?”
“엑, 난데없이?”
“그야 에슬리는 아무래도 우리 집의 작은 트리로 만족 못할 것 같으니까.”
아까도, 사는 게 아니라 따러 가자는 줄 알 뻔했어. 엘버의 커다란 전나무를 뽑길 기대하는 건 아무리 봐도 그녀보다 그 같았다. 나무보다도, 그 나무를 뽑으려 하는 그녀를 보고 싶은 게 아닐까. 그래서 에슬리는 더욱 입술을 비죽였다.
“트리도 눈도 없어도 괜찮아. 루만 있으면 되는걸.”
그래도, 그녀의 말 한 마디에 금세 기쁜 듯 누그러지는 그의 표정을 보는 건 싫지 않다.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면 그녀 또한 손에 힘을 넣고 두 사람은 크리스마스 쇼핑에 열을 올렸다.
트리는 물론 집에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에 미리 작은 전나무도 거기에 얹을 장식도 사서 꾸며두었다. 하지만 꿈속에서 멋들어진 트리를 보고 오자 아무래도 집의 것이 허전한 듯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갖고 있는 것보다 조금 더 큰 트리를, 트리에 얹을 장식을 조금 더 다양하게, 이번엔 진저쿠키도 맑은 소리가 나는 종도 샀다. 겨우 1년에 하루를 쓰기엔 사치스러운 것들이었지만 그게 바로 크리스마스 트리의 가치가 아닐까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트리 꼭대기에 매달 별이었다.
“이건 좀 납작해서 안 예뻐. 저건 아까 전에 본 것보다 작은데, 으음~ 그건 색이 좀.”
이제까지 경우가 없을 만큼 깐깐해져서 별을 고르는 에슬리를 루는 마냥 재미나단 듯 보며 장단을 맞춰주었다. 그렇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아. 루의 장단에 더욱 열이 올라 열심히 이트바테르의 모든 가게를 뒤지던 에슬리는 그러나 결국 찾던 별을 못 찾고 맥이 풀려버리고 말았다.
“내가 너무 까다로웠나?”
그야 꿈속의 그 별과 같은 걸 찾는 건 아무래도 무리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눈에 차는 게 없을 줄은 몰랐다. 바쁘게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한겨울의 짧은 해는 서편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놀이 지는 반대편 하늘엔 별빛을 다 죽일 듯 빛나는 달이 있었다.
나란히 목도리를 두르고 코트를 걸치고 차림새를 단단히 했다 하여도 양 볼이 꽁꽁 얼어붙은 것 또한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에슬리의 뺨에 손등을 얹은 루는 그만 돌아갈까? 하고 제안을 했다.
“이대로 있다간 트리를 장식하기도 전에 크리스마스가 끝나버리겠어.”
“어쩔 수 없네……. 별은 원래 집에 있던 걸 쓰기로 할까.”
집에 있는 별도 물론 훌륭한 것이었다. 그리고 별이 아니더라도 크리스마스엔 할 일이 많다. 에슬리는 아쉬움을 삼키며 그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함께 한 일은 크리스마스 요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어제 미리 밑간을 해둔 소고기를 오븐에 넣어 로스트비프를 굽고 트리에 장식할 것과는 다른 진저쿠키도 굽는다. 곁들일 샐러드에는 리코타 치즈와 토마토를 듬뿍 썰어 넣었다. 냄비의 한쪽엔 스튜가, 다른 한쪽에선 뱅쇼가 끓었고 마지막으로 차게 식힌 부쉬드 노엘까지 꺼내면 흠잡을 곳 없는 크리스마스의 상차림이었다.
냄비와 오븐이 바쁘게 열을 돌리는 사이에는 함께 트리를 만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달던 장식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하나하나 알고 나자 트리를 장식하는 일이 더욱 의미 있게 느껴졌다.
“후아, 드디어 마지막으로 별이네.”
“별 다는 일은 양보해줄게요, 에슬리 어린이.”
“몇 번이나 말하지만 난……”
“애가 아니라 애인이란 거지?”
알고 있으면서 하는 쪽이 더 얄미워. 비죽 나온 입술을 다시 들어가게 하려는 듯 그의 입술이 가볍게 맞부딪쳤다 떨어진다. 이런 걸로 무마하려는 것도 나빠. 슬슬 버릇이 될 것 같은 주고받음에 에슬리가 약간의 위기감을 느낄 때였다. 그래서 문제의 별은 어딨지? 하고 트리 아래 널브러진 장식품들 사이를 더듬던 에슬리는 원래의 별 대신 뭔가 종이 보자기에 싸인 것을 발견했다.
종이 보자기는 푸석푸석한 모래색이었다. 종이가 굉장히 낡은 것도 같았다. 이런 게 있었나? 하고 기억을 더듬으며 보자기를 풀자 나타난 건,
별이었다.
두 사람이 꿈속에서 보았던 별, 마치 하늘의 별을 정말 떼어온 듯 그 어떤 별보다 빛나던 일등성을 떠올리게 하는.
“이건……”
“설마…?”
어른답지 못하네. 하고 신랄한 표정을 하는 제 어린 시절의 얼굴을 떠올린 건 절대 그녀만이 아닐 거라고 에슬리는 확신했다. 피식 웃어버리고 마는 그의 눈이 꼭 제 생각과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결코 사양하는 일은 없이 에슬리는 완벽에 가까운 노란 별을 두 손에 쥐고 트리 꼭대기에 올랐다. 전나무의 뾰족한 끝에 별을 얹자 겨우 이건가, 하는 감상과 묘하게 고조되는 고동을 함께 느꼈다. 단순히 별을 장식하는 일 정도가 아니었다. 제 역할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그간의 시간들을 관통하며 그녀 안의 구멍 난 추억을 채워주었다. 그 빠듯한 기쁨을 애써 억누르며 에슬리는 상기된 뺨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때 루~? 괜찮아?”
“응. 완벽해.”
하지만 제 아래에서 그녀와 트리를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봐주는 연인과 눈이 마주친 순간엔 기쁨을 참을 수 없어, 헤죽 벌어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활짝 웃으며 그에게로 뛰어내리고 말았다.
완성된 크리스마스의 만찬은 두 사람이 먹기엔 상당한 양인 것 같았지만 누구도 그 말을 꺼내지 않았다. 로스트비프를 얇게 썰어 그 위로 소스를 끼얹고 샐러드를 덜고, 와인 잔에 따뜻한 뱅쇼를 담아 짠, 소리와 함께 부딪친다.
“메리 크리스마스, 에슬리.”
“메리 크리스마스, 루!”
과일 향이 묻어나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소고기를 한 입에 다 넣는다. 소스도 구운 정도도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창밖으론 사람들의 떠들썩한 소리와 캐롤이 울려 퍼지고 있었고 집안은 요리로 인해 올라간 온도 덕에 뺨이 달아오를 만큼 따뜻했다.
매 순간 자각할 때마다 경이롭다. 이 행복이 그녀의 것이란 게.
“오늘 하루가 또 다시 최고의 하루가 되었어. 행복이란 이런 거구나 싶도록 루랑 또 만들었어.”
굉장해, 엄청 굉장하네. 이 이상이 없을 거라고 에슬리는 기분 좋은 확신을 하였다.
그가 손짓을 한 건 식사를 마치고 느긋하게 트리를 구경하던 도중이었다.
“──됐다. 크리스마스 선물이야.”
크리스마스 선물? 1차로 어리둥절하고 2차로 아차했다. 그러고 보니 트리를 꾸미는 일에 정신이 팔려 그에게 줄 선물은 하나도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지, 하고 초조해지는 그녀를 두고 그는 천연덕스럽게 마음에 들어? 같은 물음을 해왔다.
“……루가 준 선물인데 마음에 드는 게 당연하잖아.”
트리에 달기 위해 찾아다니던 별이 떠오르는 귀여운 디자인의 머리핀이었다. 제게 이런 게 어울릴까 그런 생각부터 하면서도 에슬리는 머리핀을 두 손으로 꾹 움켜쥐었다. 하지만 선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녀의 반응을 살피며 그가 느긋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여기에 마력을 주입하면…… 봐.”
일순 공기가 달라진다고 느낌과 동시에 방금 전까지 집이었던 공간이 별로 들어찬 공간으로 뒤바뀌었다.
우주에 발을 디딘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언제나 하늘 위, 손닿지 않는 곳에서 빛나던 별이 지금은 바로 제 옆에서, 혹은 제 아래에서 빛나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동화? 아니, 어떤 동화도 이런 세계를 그리진 못한다. 마법? 루가 부리는 이것이 마법이라면 루 외엔 누구도 마법사라고 스스로를 칭하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놀라움과 감탄으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 찬 공간이기도 했다.
“정말 이 세상에 루랑 나만 남은 것 같네. 신기해. 굉장해.”
루와 보내는 하루하루는 내가 주인공인 동화책의 다음 장을 넘기는 것만 같아서, ……그 뒤에 무어라 더 제 기쁨을 표현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가슴을 꾹하고 옥죄는 이 감각을 그저 기쁘거나 행복하거나 같은 단어 몇 개로 읊기엔 턱없이 부족해 결국 에슬리는 무어라 더 말하는 대신 어깨에 올라간 그의 손을 제 손으로 감싸 쥐었다.
못 견디게 보고 싶은 날이라니, 그거야 당연히──
“루랑 떨어진 시간 그 전부가 루를 다시 만나러 갈 때까지 기다리는 인고의 시간이야.”
그런데 이런 걸 선물하면, 더 참을 수 없게 되어버릴 것 같잖아.
허리를 끌어안고 품에 얼굴을 묻은 채 몇 번이고 읊조리고 읊었다. 터져 나오는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어떤 설탕과자와도 비교하지 못할 만큼 달디단 맛으로 채워져 있었다.
“있지, 루. 사랑해. 정말로 많이, 더없이 많이. 루의 말이 날 자꾸 터무니없는 어리광쟁이에 욕심쟁이로 만들어버려. 그런 말 들어버리면 떨어지지 말아달라고, 언제든 달려가 마주할 수 있는 거리에 있어달라고 말해버리고 싶어지잖아.”
루가 없는 시간 동안에 루를 더 그리고 말 거야.
“그건 아주 큰일이라고. 알아?”
꾹 끌어안았던 허리를 살짝 놓고 고개를 든다. 불평 같은 말에 그는 도리어 기쁜 표정이었다. 마치 그걸 바라고 있다는 듯. 약았어, 나쁘고. 하지만… 그런 루를 좋아해. 말과 함께 발돋움하여 그에게 입술을 대려는 순간이었다. 제 심장은 아직 달리는 말처럼 빠르게 두근거리고 있었지만 지속시간이 길지 않다는 말을 증명하듯 둘만의 세계였던 순간은 어느새 성냥불처럼 꺼지고 다시 전구의 조명이 빛나는 거실로 돌아와 버렸다. 이런, 벌써 끝나버렸네. 하고 머리핀을 만지작거리는 그를 두고 에슬리는 아까 별을 다느라 썼던 나무 의자를 다시 끌어왔다. 지금이라면 용기가 날 것 같았다.
상자에서 나온 건 그의 리본과 제 리본이 하나의 리본으로 묶인 겨우살이의 리스. 언제 달면 좋을지 고민하느라 아까는 꺼내지 못했던 것이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하늘의 별, 오늘만큼은 하늘보다 더 빛날 트리의 별, 그러나 가장 빛나는 별은 분명 눈앞의 그일 테지. 호랑가시나무와 겨우살이를 엮은 리스를 트리에 장식하고는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를 두드려 당겼다. 그리고는 어렴풋 열이 올라 붉은 기가 도는 흰 피부, 그 위로 손바닥을 올려 그의 온도와 제 온도가 같아지도록 매만지며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었다.
크리스마스, 겨우살이 아래에서 키스하는 커플은 행복해진다고 들었다. 굳이 하지 않아도 지금 이미 넘치도록 행복하였지만… 그에게 제 행복이 조금이라도 닿길 바라며 에슬리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대신해 몇 번이고 그와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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