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말하면서도 내심으론 고개를 저었다. 정말 나쁜 상상이야. 나는 나쁜 상상을 좋아하지 않아. 만약 이것이 나쁜 상상으로 끝나지 않는다면, 부디 한 번만 더 나를 믿어줘.
──언제나 오만이 나를 고꾸라트린다.
일순 섬광에 눈이 멀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온통 새까만 공간속에서 기이하게 형태가 일그러진 수많은 크리처와 센티넬만이 남아 있었다.
이미 한 번 일주일의 기억을 날린 경험이 있다. 그 사이 우리는 낯선 곳으로 이동해 있었다. 두 번이라고 어려울 게 없지. 그 자리에 있는 7소대의 센티넬은 서로를 인식하고 대화를 나누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스스로를 ‘정상’이라 믿었다.
“…우리가 지금 다 같이 한 방에 있는 거라면 어쩌죠?”
“불길한 소리로 아이들 흔들지 마렴, 월터.”
동요하는 대원들을 달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어서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 너를 찾는 것으로 머릿속이 가득했다. 우리는 정상이다. 그 전제부터 의심해야 했는데 안일했다. 그저 어딘가에서 우리도 없이 괴물을 상대하고 있을지 모를 네가 걱정이었다.
너를 지키는 역할은 나인데, 네 옆에 부재한 것이 불안했다.
자조할 기분도 들지 않을 만큼 어리석은 마음이었다.
한 번 더 섬광이 번쩍, 눈과 의식을 앗아갔다 돌려주었을 때 피투성이의 네가 보였다.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눈과 손을 속이던 광기보다도 그 순간의 네가 나를 뒤흔들고 미치게 했다.
너를 지키는 역할은 나인데, 네 목을 조르는 손이 나일 줄은 몰랐다.
치료하는 내내 지면이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아니, 흔들리는 것은 나였다. 매분기 응급처치 강의를 빼먹지 않기를 이 때 감사했다. 아무리 눈앞이 흔들려도 몸은 기억에 의존해 움직였다. 그 사이에도 심장이 불길하게 뛰었다. 어쩌면 호흡하는 법을 잊은 탓인지도 몰랐다. 바닥에 누운 너보다도 하얗게 질렸을 제 얼굴은 비웃지도 못할 만큼 엉망이었다.
“지키려고 한 거 알아. 원망 안 해.”
그런 말 하지 마. 내가 틀렸어, 율. 내가 잘못됐어. 잇자국이 남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내겐 울 자격조차 없었다. 우는 것은 스스로를 향한 동정밖에 되지 않는다. 나는 나를 원망해야 했다.
광기에 물드는 감각은 익숙하다. 머리가 어지럽고 오감이 흐트러진다. 누군가 가느다란 침을 정수리에 꽂고 휘젓는 것과 같았다. 춥고 아프고 외롭고 두렵다. 눈앞이 새까맣게 물들며 마음의 빗장이 한없이 느슨해졌다.
그 순간에 언제나 네가 있었다. 나를 잃어버리고 마는 거미줄의 미로 속에서 투명하게 빛나는 수정은 길잡이였다. 그만 홀로 미치지 않을 거라고 말하지 못하던 순간에 너를 믿었다.
오만조차 너의 결정으로 빛이 났는데, 그런 너를 부술 뻔했다.
다름 아닌 나의 손으로.
마지막으로 울었던 순간이 기억나지 않는다. 우는 법을 모르지는 않았다. 눈물이 날 순간이 적었을 뿐. 그렇지, 우는 법을 모르지 않았다. 네 위로 짜디짠 것이 한없이 쏟아졌다. 피에 젖은 옷자락을 움켜쥐고 심장가에 머리를 뉘었다.
언제나 네 품안에서 안정을 찾곤 했는데, 희미하게 들리는 고동은 안정을 찾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흐느낌 위로 네 손이 덮였다. 미안해, 울려서. 사과해야 할 사람은 나인데 네 말이 이상하게만 들렸다.
“무섭지 않았어. 결국 멈췄잖아. 네가 해냈어. 괴물과의 싸움에서 네가 이겼어, 이델. 자랑스러워해도 괜찮아.”
정말로? 아냐, 율. 아냐. 틀려. 나는 무서워. 내가 무서워. 이긴 게 아니야. 내가 멈춘 게 아니야. 그건 ‘멈춰진’ 거야. 마치 우릴 비웃듯 기분 나쁜 섬광에 의해 ‘놓아진’ 거야. 나는 할 수 없어. 나는,
이제 나를믿을 수 없어.
나쁜 상상을 하곤 했다. 내가 없는 곳에서 네가 무너지는 상상이었다.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다치고 피 흘려 쓰러지는 너를 구하지 못하는 상상을 하며 홀로 지새우는 밤이 있었다.
나쁜 상상이 눈앞에 있었다. 내가 있는 곳에서 네가 무너졌다. 네게로 뻗은 손이 너를 지키지 않았다. 너를 부수고 무너트리는 존재가 바로 나였다. 나쁜 상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