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능력에 잠시 눈이 멀기라도 했던 것 같다. 잿빛의 먼지가루에 잠깐 눈을 떼고 만 것이다. 신기루 같은 그것에 시선을 빼앗길 게 아니라 그 뒤로 홀로 서 있는 널 보았어야 했는데.
애쉬. 지켜주지 못한 내 공주님. 네 덕에 나는 또 오명이 늘었단다. 기사 자리는 반납해야겠어.
아카데미 시절, 너를 가까이에서 보기 전까지 너는 내게 그저 ‘유별난 아이’였단다. 언제나 동화책을 품에 안고 다니는 꿈꾸는 아이, 누구에게나 자상하고 상냥한 아이, 모두를 공주님 왕자님으로 부르는 이상한 아이, 아이들에게는 꿈속 이야기를 들려주며 정작 너는 선을 긋는 아이.
어째서 너는 한 번도 스스로 공주님이 되지 않았던 걸까.
선 같은 건 없다고 했지만 나는 너와 대화할 때마다 기묘한 선을 느끼곤 했다. 우리의 지향점이 같으면서도 겹쳐질 수 없는, 같은 극의 것이었기에 예민했던지도 모른다. 네가 들려주고 꿈꾸게 해주려는 동화와 나는 맞지 않는다. 나에게 전부를 바칠 온전한 상대가 너는 되어줄 수 없다. 서로 바라는 것은 비슷하면서 주려 하지 않았지. 맞물릴 수 없는 관계였다.
그런 우리가 페어를 짜게 되었을 땐 조금 막막함도 느꼈었지. 잘할 수 있을까, 라는.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어린 날의 나는 네게 신뢰를 얻는 방법을 모른 채 오만하게 명령만을 했고 너는 내 말을 마지막까지 지켜내지 못했다.
그 순간에 무너지던 너를 기억한다. 제가 나약해서 그래요.그렇게 말하며 불안을 감추지 못하던 너를.
동화책 바깥의 너는 불안하고 여리고 홀로 서지 못하는 아이였다. 타고난 심성일까. 불꽃 앞에 위태롭게 흔들리는 종이를 보는 것만 같았다. 금세 제 몸을 태우고 재가 될 법한. 내 눈에 넌 그래서 마냥 나약하게만 보였나보다.
하지만 너는 생각보다 강했다. 아니,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었다. 나는 보지 못했던 너의 면을 네 페어는 알아주었다. 애쉬는 강해요.그렇게 말하며 너를 신뢰하던 그 아이의 눈에 그제야 조금 너희를 안심했던 것 같다.
센티넬과 가이드는 서로에게 어떤 관계일까.
언젠가 물었던 답을 얻었길 바랐다.
너라면 스스로 답을 찾아낼 수 있을 거란다. 총명한 애쉬.
───비명이 하늘을 찔렀다. 통곡이 강을 이뤘다. 버석버석한 땅 위로 슬픔이 젖어 내렸다. 폐허에 가라앉지 않는 먼지바람이 맴돌았다. 너의 불안이었던 것, 곧 나의 불안이었던 것, 사실은 우리 모두 불안해하면서도 맹목으로 고개 돌리던 그것이 우리를 비웃듯 바닥에서부터 덮쳐왔다.
가장 비참했던 것은 그 순간에 모두가 최선을 다했단 것이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구해내지 못했다. 현실은 동화처럼 기적 같은 해피엔딩이 주어지지 않았다.
네 슬픔에 닿을 수 없었다. 닿기에는 내 슬픔 또한 컸고 나 또한 잃었고 그럼에도 네게 입발린 말을 하기엔 이번에도 우리는 같은 선 위에 있었다. 무슨 말을 해도 네게 닿지 않음을 내 자신부터 알았다.
그러니 나는 네게 위로 대신 약속을 하고 싶었다. 지지대를 잃어버린 네가 다시금 홀로 설 수 있을 때까지 네 곁에 서고 싶었다. 너를 구하고 싶었고, 지키고 싶었다. 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이번에야말로 네게 온전한 신뢰를 주고 싶었다.
「나는 여전히 네 공주님도, 너와 해피엔딩을 만들 왕자님도 되어줄 수 없지만, 한 번 더 나를 네 기사로 곁에 두어주겠니?」
「부디 믿고 맡기렴. 네가 불안하지 않을 만큼 견고할 테니.」
「믿어요.」
「이제야 말할 수 있겠네요. 역시 당신은 저 같은 반쪽 가이드의 공주님에는 안주할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너는 반쪽 가이드가 아니란다. 그 때에 한 번 더 그 말을 해주었어야 했어. 애쉬, 너는 훌륭한 가이드란다. 그 아이를 구하지 못한 건 네 탓이 아냐. 너 혼자만의 탓이 아냐. 부디 슬퍼마렴. 일어나주렴.
낙원을 잃어버렸다면 우리 낙원은 아닌 현실에서 살아가자. 네 현실에 아직 남아있는 사람들을 보아주련.
전하지 못한 말이 가득했다. 쌓인 그 말들이 닿을 주인을 잃지 못하고 흩어져만 간다.
그 순간 어째서 나는 너를 보고 있지 않았을까. 두고두고 곱씹어 되새길 악몽이다.
“나는, 네 신뢰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어. 애쉬.”
나를 믿지 못하던 그 날의 네가 옳았다. 너는 나를 믿어주었는데 그 믿음에 답하지 못했다. 나를 후회한다.
은색의 먼지가루가 덧없이 흩날리던 순간은 몇 번을 보아도 꿈결 같았다. 네 이능력은 정말 동화 속이었다. 마치 요정 할머니에 의해 신데렐라가 변신하던 풍경처럼 너의 반짝임에 감싸여 다른 내가 되는 순간이었다.
한 번쯤 네게 제대로 된 감사 인사를 할 것을 그랬다.
잠든 네 자리를 찾았다. 몇 날 밤을 불안해 잠을 청하지 못하더니 그간 못잔 잠을 몰아서 자듯 눈을 감은 너는 일어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네 앞에 앉아 손가락을 움직였다. 은색의 실들이 베일을 짜내었다. 부드러운 그것이 이윽고 네 얼굴을 면사포처럼 가려주었다. 더 이상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잠들길. 바라던 낙원에서 안식하길. ……우습지도 않지.
원하던 결말에 도달했니?
그곳에서 너는 행복하니?
아니,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누구든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리 없고 생을 바라지 않을 리 없는데. 챙도 너도, 살고 싶었을 텐데.
살아있는 인간의 생에 누구도 멋대로 엔딩을 정해선 안 되는 것인데.
우리는 조금 더 함께 살아갔어야 했는데.
“미안. 미안해. 미안하구나. 미안해. 아무리 사과해도 잃은 것은 되찾을 수 없는데. 그래도 조금만 더 들어주겠니. 미안해, 애쉬. 너를 지키지 못한 형편없는 기사여서,”
움직이지 않는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고해성사를 하듯 손 끝에 이마를 붙였다. 너는 이런 내 모습이 처음이라 놀랄까, 네 앞에서 강한 척 하지 못하게 된 나를 불안히 보진 않을까. 부디 이번 한 번만 봐주렴. 한 번만 네게 기대었다 일어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