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이송이의 붉은 꽃이 모두 떨어지고 꽃가지 끝에서 동그란 과실이 맺혔다. 봄이 지났다는 신호였다. 그리고 다시 알을 키운 과실 위로 지치지도 않는 듯 이슬비가 떨어졌다. 가느다란 빗줄기는 끊어질 듯 끊어지는 일이 없이 온종일 맺힌 열매와 잎과 가지를 적시고 땅으로 스며 진창을 만들었다. 이 비가 모두 그칠 즈음이면 매실이 익을 것이었다.
츠유梅雨의 계절이었다.
지구에 비해 한참 작은 행성이었지만 메데이아에도 사계절이란 것이 있었고 장마의 계절 또한 있었다. 이 작은 행성에 장마 시기의 양상 또한 지역별로 조금씩 달라졌다. 어느 지역은 마치 빗소리가 북을 때리는 것처럼 시끄럽고 요란하게, 무수히 많은 화살이 쏟아지는 것처럼 따갑고 매섭게 쏟아진다던가.
그러나 이 지역의 장마는 소리를 죽이고 조용히 흘러갔다. 빗소리는 적막을 일깨우는 잔잔한 음악과 같았고 희뿌연 안개가 땅 끝까지 내려앉아 시야를 흐리게 했다. 매실보다는 복숭아 익는 계절에 더 어울릴까. 도원향을 찾아 헤매는 우자라도 된 것 같았지.
물론 아인델은 이런 시기에 섣불리 바깥을 나가지 않았다. 감상적인 표현을 접어두고 과학 시간으로 돌아오자면 우기는 저기압이다. 기압이 낮아져 비구름이 쉽게 모여 드는 계절인 것이다.
저기압이란 것은 인간의 몸에도 영향을 미친다. 가뜩이나 저혈압인 아인델에게 우기란 몸 안의 작은 누름돌들이 모두 붕 뜨고 머리의 나사마저 느슨해지는 시기나 다름없었다.
자고 일어나도 늘 졸리고 움직임을 최소한으로 하고 집안에 고치를 짜 웅크린 채 눅눅한 습기를 말리며 보내는 것이다. 그녀를 위해 율릭은 매일을 바쁘게 제습기와 온풍기를 돌려야 했다.
그렇게 햇빛이 닿지 않은지도 어언 일주일, 아인델이 침대와 소파 외에 발을 딛지 않은지도 거진 5일이 지나던 날이다.
「나오겠나?」
띠링, 하고 메일의 알람이 울렸다. 적힌 이름은 익숙하다면 익숙하고 신선하다면 신선할 상대. 그러나 지금의 아인델은 상대를 가리지 않았다.
「거절하겠단다.」
「너무 즉답인걸.」
상대를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같은 거절을 한단 뜻이었다. 돌아온 답 너머로 쓴웃음을 짓고 있을 표정이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새까맣게 짙은 눈썹이 입꼬리와 같은 방향을 그리겠지. 그 표정을 떠올리며 아인델은 천천히 자판을 눌렀다.
「무슨 일 있니?」
「일이 없으면 부르면 안 되나?」
「네가 나를 부르는 게 일이라면 일이구나.」
답을 누르며 블라인드를 올린다. 바깥은 여전히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창 바로 앞의 빗줄기를 제외하곤 안개가 짙었다. 그래, 네가 생각나는 날씨구나. 저 안개 속을 헤치고 걸어 들어가듯, 안개를 깊이 들이마신 기억이 있었다.
언제나 가이딩이란 제게 썩 좋은 추억이 되지 않았지만…… 제 실책의 기억이기도 한 그것은 잊지 못할 것이었다.
「그래, 어디로 갈까.」
그래서 보낸 답은 일주일을 꼬박 꼼짝도 안 한 반동이기도 했다. 그리고 돌아온 답은 아인델을 한 번 더 놀라게 했다.
「내 집.」
종아리를 덮는 장화를 꺼내 신고 우산을 펼쳤다. 한 손에는 같이 마실 술 한 병과 몇 가지 안주류가 들어 있었다. 상대의 집에도 어련히 있겠지만은 초대받은 자로서의 성의였다. 부슬부슬하게 떨어지는 가느다란 빗줄기는 우산 위로 맑은 소리를 낼 힘도 없었다. 그러나 힘차게 쏟아지는 것보다 이 정도가 좋다. 아예 멎은 채였으면 더 좋았겠지. 찰박찰박 노란 장화로 물웅덩이를 피해 아인델은 초대해준 이의 집으로 향했다.
“요리도 직접 하니?”
현관 밖에서 젖은 우산과 장화를 털어내고 입구에 놓인 타월로 물기를 닦아내며 들어간다. 그렇게 짧은 복도를 지나 보인 풍경에 제일 먼저 꺼낸 말은 그것이었다.
“? 그럼 직접 하지. 너는 안 하나?”
“으응.”
안 한다고도 한다고도 말하기 애매하구나. 아인델의 반응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니케는 그녀에게도 앞치마를 건네주었다. 애매하던 반응을 한 겹 더하며 아인델은 그것을 아연히 받았다. 설마 나도 하는 거니.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일단 이것저것 꺼내봤어.”
“……그래.”
상대는 별로 듣는 기색이 아니었다. 아인델은 포기하고 꺼내진 재료들을 보았다. 훌륭하게 술안주용의 재료였다. 집안이라고 니케는 제법 편한 차림새였다.
높이 올려 묶은 머리카락이 흔들릴 때마다 그녀가 묘하게 들떠있음이 엿보였다. 그저 들뜨기만 한 걸까. 긴장은 하지 않았나. 시선으로 기색을 읽어내려는 아인델에게 돌아온 말은 쏘야는 어때? 그 한 음 높은 목소리였다.
그러자꾸나. 결국 저 또한 느슨한 미소로 돌려주었지.
붉은 소세지는 문어 모양으로 칼집을 내고 파프리카와 양파, 당근을 먹기 좋은 크기로 썬다. 니케는 옆에서 검색에 열중이었다. 양념소스 비율이 레시피마다 다르다며 무엇이 가장 좋은지 여느 때보다 심각해 보였다. 식칼을 쥔 김에 아인델은 다시 당근과 대파를 좀 더 잘게 썰었다.
“계란말이는 할 줄 아니, 니케?”
“어? 그래. 해보겠다.”
할 줄 아냐고 물었는데 해보겠다니, 너도 참. 그러나 굳이 정정해주지 않았다. 아인델은 하지 못하며 해볼 생각도 없기 때문이다.
바깥은 고요했다. 가느다란 빗줄기는 실내의 우당탕탕거리는 소음을 묻어주기엔 한없이 약했다. 깨지는 소리가 요란했지만 아무것도 깨진 것은 없었고 태우지도 않았다. 제법이구나. 그 한 마디에 높이 묶은 머리칼의 흔들림이 보다 강해졌다. 생각보다 더 알기 쉬운 아이였다. 아니, 알기 쉽게 변한 걸까.
제 앞에서 움츠리는 인간, 죄 지은 것이라도 있는 듯 눈을 피하거나 묘하게 기가 죽거나, 자리를 피하고 불편한 기색을 보이는 인간은 무수히 많았다. 눈앞의 인물 또한 그런 많은 사람 중 하나리라 생각했다.
실상 조금 달랐다. 아인델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를 향해 무언가 갈구하던 눈, 갈급증을 보이던 그 눈, 그러나 정확히 그녀를 향하지는 않던 눈.
그림자가 짙었다.
「네 입에서 가이드가 필요하다는 말이 나오길 바랐어.」
바라던 것은 인정이었다. 상대는 아인델이 아니었다. 바라던 인정을 줄 대상을 잃고 미아처럼 헤매는 것 같이 보였다. 물론 그리 쉽게 보이던 얼굴은 아니었지. 그럼에도 때때로 보이던 그, 우유가 아니라 새까만 커피라도 마시는 것만 같던 표정을 기억한다.
상대는 아인델이 아니었지만, 아인델이기도 했다.
「아인델. 난, 네가 내 손을 잡아주길 바랐어. 그뿐이야.」
바라던 것은 정말 인정이었을까? 아니면──……
────짠,하고 캔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목을 울리며 맥주를 넘기는 모습이 익숙해보였다. 평소에도 이렇게 혼자 마시니? 질문에 그녀는 그렇다만. 당연하단 기색으로 답을 돌려주었다. 군내 식당에서도 혼자 먹더니. 자연스럽게 혀를 차며 아인델은 다음에 또 불러주어. 뒷말을 이었다.
맞은편에 기쁜 듯 휘어지는 초생달이 있었다.
야채는 골고루 잘 익었고 소세지는 멋진 문어모양으로 다리를 꼬았다. 심혈을 기울여 한 방울, 한 방울 세어가며 만든 소스는 딱 좋은 맛을 냈다. 계란말이는 모양잡기에 실패했지만 맛은 나쁘지 않았다. 그 옆으로 마른안주들이 이었다.
아인델이 가져온 샴페인은 냉장고에서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피차 술이 강한 편도 아니면서 어쩌려고 이러는지. 그러나 더는 취하면 안 된다고 엄격하게 굴 이유도 없었다. 같은 생각을 했는지 눈이 마주치자 실없는 웃음과 함께 맥주를 넘겼다.
인정을 바랐을지 모른다. 필요를 요했을 수도 있다. 증명을 원했나. 그러나 그 모든 기회를, 타이밍을, 한 번 놓친 적이 있다.
지금도 바라고 있니? 물으면 그녀는 아마 고개를 저을 테지. 더는 필요하지 않아.
그래서 아인델은 다른 것을 주기로 하였다. 이를 테면 이렇게, 내밀어진 손을 맞잡는 대신 캔을 부딪치는 관계를. 친구라는 이름을.
매실이 익어가는 계절이었다. 안개비 사이로 신선한 바람이 휘감겨 지났다. 비 오는 날도 나쁘지 않구나. 의자에 느슨히 몸을 기대며 아인델은 불어온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