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밤이었다. 짙게 깔린 먹구름이 달마저 가려 그림자가 생길 여지도 보이지 않는 칠흑의 밤이었다. 장대비가 쏟아지려는 걸까. 아직은 마른하늘에서 천둥소리부터 우렁차게 들려올 즈음 번개보다 먼저 번쩍,하고 바닥의 마법진이 빛났다.
창밖으로도 번쩍하고 보일 만큼 환한 빛이었다. 수많은 책과 플라스크와 양피지와 잉크 냄새로 가득한 연구실에서 유일, 깨끗한 바닥에 그려진 그것은 정확히 표현하자면 마법진보다 어떤 복잡한 계산식에 가까웠다. 빼곡히 적힌 계산식은 어쭙잖은 지식으로는 읽어내는 것보다 무리였지만 만약 이해할 수 있는 이가 본다면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눈물 흘리며 존경과 감탄, 찬사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그거 꼭 읽어야 해? 조금 부끄러운걸.)
(쉿!)
정녕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영역의 지식일까? 다른 차원의 좌표를 계산하고 우주간의 거리를 가늠하고 공간을 왜곡하여 비틀린 틈으로 초대받지 않은 존재를 불러들인다. 다시 말해 악마 소환이었다. 철저하게 계산과 연산, 인간의 두뇌만으로 이루어낸 극한의 과학을 수단으로 한.
한차례 빛이 가신 계산식 위에선 희뿌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뒤이어 뾰족한 굽이 연기를 걷으며 바닥의 숫자들을 뭉갰다. 굽의 주인은 늘씬하게 뻗은 다리를 그물 같은 스타킹으로 옭아매고 아슬아슬한 치맛자락 아래 매끄러운 광택의 검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훤히 뚫린 등 뒤로 활짝 펼쳐진 피막날개나 머리카락 사이로 비죽한 검은 뿔까지 어디로 보나 인간이 아닌 존재감이었다.
(이쪽이야말로 쓸데없이 말이 길지 않아?)
(에슬리도 쉿 해.)
무엇보다도 눈동자였다. 통과해온 블랙홀을 그대로 응축해 박아 넣은 듯한 새까만 눈동자는 마주치는 순간 거부할 새도 없이 상대의 영혼을 빨아들일 것만 같았다.
“당신이 나를 불러냈어? 흐음, 과연 얼마나 간절한 소원이 있길래 그런 걸까. 어디 말해봐.”
들어는 줄게. 허공에서 느긋이 다리를 꼬며 악마는 오랜만에 마주한 흥미로운 인간을 탐색하였다. 어딘지 지치고 피로한 얼굴, 언제 햇빛을 본 것인지 창백하고 하얀 낯, 구부정한 자세와 지저분한 가운, 마구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제 손으로 더 휘저으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기까지 하고 있다. 아마도 자기가 이뤄낸 위대한 업적에 감동하고 있는 걸 테지. 그리고 무슨 소원을 빌면 좋을지 고민할 거야.
부? 명예? 그 두 가지 모두도 좋다. 혹은 아름다운 여인을 달라고 할 수도 있고 영원히 늙지도 죽지도 않게 해달랄 수도 있지. 소원에는 그 인간의 바닥이 보인다. 가장 깊숙한 곳에서 긁어 올리는 욕망. 어떤 고매한 인간도 단 한 가지 소원 앞에선 다르지 않았다. 당신도 마찬가지겠지. 대가로는 뭐가 좋을까. 영혼? 이 인간의 영혼은 어떤 색을 띠고 어떤 맛이 날까. 꼭 영혼이 아니어도 좋다. 가령 시간이라거나 정기라거나─── 멋대로 펼쳐나가던 상상의 나래는 맥이 풀린 듯한 남자의 목소리에 뚝 잘려나갔다.
“내가 바라는 건 벌써 이루어졌어. 술식을 증명해보고 싶을 뿐이었으니까.”
“……엥?”
“설마 돌아가는 길도 열어줘야 하는 건 아니지?”
“물론 혼자서도…, 그, 그게 아니라!”
자연스레 목소리가 높아지는 악마를 내버려둔 채 남자는 안경을 테이블에 벗어두고 피곤한 듯 눈가를 눌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개운해보였다. 앓던 이가 빠진 느낌일까? 기지개를 한 번 켜고 바닥이 끈적하게 마른 커피잔을 손에 든 남자는 미련 없이 연구실을 나갔다. 악마를 그 자리에 둔 채 말이다. 당황한 악마가 허겁지겁 그 뒤를 따른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잠깐만! 정말 바라는 게 없어? 무엇이든 이루어줄 수 있는데? 이 세상의 왕이 되고 싶다면 왕으로 만들어줄 수도 있고 불로불사를 원한다면 그것도 좋아.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면 조금 힘들지만 인과율을 조작해서 돌려보내줄 수도 있어. 어때, 탐나지 않아?”
등장할 때만 해도 제가 우위에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순식간에 수세로 몰리고 말았다. 이건 내 예상이랑 전혀 다른 그림인데! 악마가 발을 동동 굴리며 제 뒤를 따르든 말든 남자는 싱크대에 커피잔을 담그며 시종일관 느긋한 기색이었다.
“글쎄, 어떤 것도 관심 없는데. 굳이 욕심나는 걸 말하자면, 지식일까.”
하지만 지금은 됐어. 그것도 내 스스로 탐구하고 깨닫는 편이 좋아. 혼잣말처럼 덧붙여지는 말에 믿을 수 없다는 듯 악마의 목소리가 또 한 번 커졌다.
“그런 인간이 있을 리가 없잖아. 인간은 늘 욕망하는 생물인걸. 혹시 자기 자신을 모르는 거 아냐? 당신이 뭘 욕망하고 있는지조차 말야.”
재밌는 도발을 하는걸? 그제야 남자가 악마를 똑바로 보았다. 새삼스럽게 마주한 악마는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눈꼬리와 다르게 어딘지 무구한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순진한 흑黑이라니. 악마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악마의 검은색이란 모름지기 좀 더 타락하고 더럽혀진 것이어야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악마는 차라리 세상 모든 더러움을 빨아들이고 타락을 삼켜든 끝에 무無만이 남은 것처럼, 이를 테면 그렇지. 한 점 빛 없이 완전한 진공의 우주 같은 흑색을 갖고 있었다.
문득 남자의 수은빛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이것이라면 조금 흥미가 생길 것 같았다.
“내 욕망을 내가 모르고 있다, 라. 꽤 아는 척 말해오는구나. 그렇다면 내가 무얼 모르고 무얼 욕망하는지 네가 가르쳐줄 거야?”
“내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라니, 악마가 할 대답이 아니잖아. 겨우 찾아온 계약 찬스인데. 제 자존심을 건드린 이 남자를 계약으로 묶고 한 입에 꿀꺽 먹어치우지 않고서야. 절박한 얼굴로 제게 매달리며 구걸하는 꼴을 보며 그 영혼을 삼켜주지 않고서야 속이 풀리지 않을 것 같다.
아무래도 호락호락할 것 같진 않지만, 그럴수록 더 불타오르는 법이지. 악마는 호기롭게 턱을 들었다.
“좋아. 그럼 그걸 계약으로 하자. 당신이 모르는 당신의 욕망을 일깨우고 쥐어주는 것으로, 대가는 당신의 전부야.”
영혼도 시간도 몸도, 그 마음까지도. 이 정도는 받아야지 수지가 맞지. 악마의 제안에 남자는 느릿하게 제 턱을 매만졌다. 손가락 끝이 무심코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까지 닿는다.
“악마의 계약이란 생각보다 로맨틱한걸. 하지만 내가 모르는 나의 욕망, 내가 바라는 진리란 아무래도 네게 있는 모양인데… 그럼 나는 대가로 너를 가져야하는 걸까?”
그것도 나쁘지 않겠어. 남자의 말에는 많은 꿍꿍이가 감춰져 있었다. 그러나 내포된 그 많은 것들을 애석하게도 악마는 읽어내지 못했다. 허공에서 불타오르는 양피지를 꺼내고 그곳에 서로의 영혼을 건 채 사인을 마치는 순간까지도 말이다. 그야, 갖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쉽게 악마를 가질 리 없잖아. 방심했던지도 모르지.
“그래. 어디 한 번 마음껏 해봐. 나도 궁금하니까. 네가 내 욕망을 어디까지 받아줄 수 있을지.”
화르륵 계약서가 재가 되어 사라짐과 동시에 계약의 증표가 서로의 가슴에 새겨졌다. 이로써 두 사람은 하나의 운명으로 묶이게 되었다. 과연 이 계약의 끝은 어떻게 될지 갈 길이 길었지만……, 어떤 미친 과학자가 산다는 소문이 돌던 오두막이 언제부턴가 떠들썩하고 따뜻한 공간으로 변하게 되는 역사적인 첫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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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사기계약이었단 거 아냐? 그보다 내가 사역마가 되었단 말은 여기 한 마디도 안 나오는데.)
(사기계약이라니, 듣기 안 좋은 소리를 하네. 에슬리도 동의하고 사인했잖아? 사역마는 글쎄…, 나도 너에게 사역되는 건 어때? 공평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