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도 쭉 그녀에겐 경이롭고 놀라우며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는 것으로 남을 것이다. 익숙해지는 순간 제가 저로 남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토록,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다.
“사랑해, 루.”
간절함을 입에 담는 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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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지 않은 나뭇결의 냄새가 선명했다.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벽난로 불길이 두 사람이 앉은 소파까지 닿아옴에도 그 집은 여전히 젖은 공기와 새집 냄새를 풍겼다. 직접 고른 목재, 손수 칠한 벽, 손으로 훑어가며 시공이 끝난 걸 꼼꼼히 확인하였는데, 가시지 않는 풋내가 아직 이곳이 낯설기만 한 마음을 반증하는 것 같았다.
“이리 와, 에슬리.”
기묘한 건 그 모든 낯섦이 먼저 가 손을 내미는 그의 존재 하나로 아무렇지 않게 뒤바뀌는 것이다. 그와 연애를 시작한지 어언 2년 반을 넘기면서도 이럴 때 에슬리는 꼭 세상에 그밖에 없는 것처럼 새까만 두 눈 가득 사랑하는 연인만을 담았다. 그것만으로 공간은 어디라도 좋았다.
그러나 어디라도 좋다고 하기엔 이곳은 그보다 특별할 것이다. 이 낯선 공간은, 작년 가을 함께 살자는 제안을 받고부터 시작된 대 이사의 종착지이며 부끄러운 표현이지만 사랑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었다.
터를 정하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건축도면을 들고 방을 나누고─에슬리는 태어나 두 번째로 자신의 방을 갖게 되었다. 심지어 자신의 집은 처음이다. 이렇게 놀라울 수가─집이 만들어지는 동안 안을 채울 것을 다시 상상하고 꾸미고.
제 연인은, 루는, 언제든 늘 에슬리에게 해본 적 없는 경험을 하게 해주지만 이처럼 설레는 일은 또 없을 것이라고 에슬리는 이번에야말로 자신했다. 실제로 그 이후 크리스마스를 한 번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간들이 전부 끝나지 않는 크리스마스의 밤 같기도 했으니까. 물론 에슬리는 산타클로스보다도 루 모겐스를 더욱 좋아한다.
마침내 완성된 집은, 아직도 곳곳에서 새 것이라는 냄새가 빠지지 않아 낯설기만 하고 이곳이 보금자리라는 것에 적응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만 같았다. 당장 오늘 밤만 하더라도 안심하고 잘 자신이 없었다. 에슬리는 제국군에서 머무는 약 4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자신의 기숙사 방에서 안심하고 잠든 적이 없다.
하지만 차차 익숙해지겠지. 이곳은 더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그녀의 것’이니까. 오늘은 그 영광스런 첫날이니 내 방에서 자볼까? 루의 방에 찾아가지 말고. 딸기의 꼭지를 따는 손에 문득 고민이 깃들었다.
매번 어리광을 부리는 것도 적당히 해야 할지 몰랐다. 이런 말을 하면 그는, “네가 어리광을 부리는 것도 내 특권인걸.” 같은 말을 하며 시무룩하게 눈썹을 늘어트릴지도 모르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고쳐지지 않는 조심성이다. 불안증이라 해도 좋았다. 아무튼 오늘은 그러는 거야. 그렇게 정했어.
──주방에서 어색하게 간식거리를 챙기고 향한 곳이 그의 옆자리였다.
이사를 마친 뒤 기념비적인 첫 여가는 영화 시청이었다. 이트바테르의 집에는 없던 영사기를 구매하고 벽 한편을 깨끗이 비워버렸다. 낮 시간에는 저기에 뭐라도 장식해두는 편이 좋을까? 제법 허전해 보이는 것도 같아. 그런 생각을 했는데 완전히 어둠이 내린 시각이 되자 벽난로의 불빛, 테이블 위에 올려둔 작은 향초, 그리고 필름이 돌아가는 영사기 너머만 빛이 나는 거실은 그것만으로도 상당히 무드라는 것이 갖춰져 기분을 들뜨게 한 것 같았다.
사치스러운 선택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쁘지 않네.
다 베일이라 가능한 것이었다. 예술의 도시라 불리는 이곳은 중심지인 델피니온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다양한 공연이 벌어지는 것은 물론이오 다른 지방에선 볼 수 없는 ‘필름’이란 것도 흔히 팔았다.
카메라에 쓰이는 것과 조금 다른 이것은 영사기에 넣고 재생하면 영화를 볼 수 있다고 했다. 무채색으로 움직이는 사람들, 그 밑의 자막. 바로 조금만 걸으면 극장이 저렇게 많은데 굳이?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막상 필름이 돌아가는 거실을 보니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어느 극장에서도 느낄 수 없는 설렘과 아늑함이 있었다.
그리하여 에슬리는 새로 산 소파의 푹신함을 테스트하기보다 연인의 품이란 익숙함을 느끼며 그에게 기댄 채 무성영화에 집중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게 어쩌다 난데없는 사랑 고백까지 이르게 되었냐 하면.
요즘 가장 잘 나가는 로맨스 영화의 필름이라고 했다. 상인이 침을 튀겨가며 자랑을 하던 값이 아깝지 않게 영화는 무척 잘 만들어져 있었다. 다만 에슬리에게는 참 남 일처럼 느껴진 게 아쉽다면 아쉬운 부분이다. 사랑이라면 저 또한 하고 있을 텐데, 벽에 그려지는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어쩜 이렇게 공감도 몰입도 되지 않던지. 들던 감상이라고는 여자의 드레스가 참 입기 불편해 보인다는 것과─놀라울 것도 아니지만 에슬리 또한 저런 옷을 여러 번 입어 보았다. 연인을 위해서라면 나쁠 것 없지만. 역시 귀족 모임에는 저런 드레스보다 군복이 나은 것 같다─남자 배우가 루보다 키가 작나…? 정도. 뭐, 여배우도 저보다 한참 작다 보니 둘의 키 차이에 저희 모습을 대입하기는 또 어렵지 않았다.
깎아둔 과일을 하나씩 입에 넣으며 두 번째로 든 감상은 ‘와, 키스하네.’
……아니 잠깐, 고백 전에 키스부터 하는 거야? 맙소사. 정도. 아냐, 그럴 수도 있나…? 만약 나라면…, 까지 생각이 뻗던 에슬리는 그대로 제 생각을 지우고 옆에 놓인 팔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뭘 오해한 건지 머리 위에선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부끄러운 거야?” 같은 말이 들려왔지만 부정할 힘도 없었다.
키스를 마친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해 왔다. 입술을 뻥긋이자 아래 자막에 로맨스 소설에서 자주 보이는 대사가 흘렀다. 여자의 대답은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연기란 저렇게 하는 거구나. 어라, 연기인 건가? 그럼 저 사랑들은 전부 가짜인가. 아닌가. 역할은 진심인 걸까. 혼란스럽던 차 무심코 생각이 소리로 샜다.
“좋아한단 말, 저렇게 하는구나.”
저렇게 할 수도 있구나. 저렇게도 하는구나. 저런 말을 하는구나. 여러 가지 감상이 담긴 말에 연인은, “글쎄, 나라면……” 하고 운을 뗀 것이 마침내 이야기의 원점이다.
소리를 따라 흘긋 본 옆얼굴이 지나치게 달았다. 귀가 달아올라 숨을 죽이고 나긋나긋하게 흘러드는 고백을 들었다. 덤덤하게 나온 것 같기도 했고 한편으론 몹시 뜨거운 것도 같았다. 이럴 때 에슬리는 자만해졌다. 때때로 답지 않게 열이 오르는 그의 모습이 온통 제 독차지인 것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고 또 만족스러웠다.
한편으로는 생경해서, 몇 번을 듣고 또 듣고 수도 없이 들어도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고백이란 참을 수 없을 만큼 달고 또 애가 타는 것이어서, 기뻐서, 몹시도 설레어 매 순간 꼭 처음 듣는 고백처럼 아찔해지고 말아서.
매번 왜 나만 이러는 걸까 억울해지기도 해서, 부끄러움을 투덜거림으로 감추듯 그 옷자락을 붙잡은 채 고개를 묻어버렸다.
“루는 매번, 어떻게 그렇게……”
“표현의 차이만 있을 뿐, 나도 늘 에슬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니까.”
그건, 그야, 알지만 나도 같지만.
나 또한 몇 번을 말해도 부족한 말이었지만.
예전에는 무엇이 어떻게 경이로운지에 대해서, 어째서 이것을 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지에 관해서 똑바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지금의 에슬리 챠콜이라면 드는 감정을 잘 갈무리 해 말을 고른 끝에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익숙해지고 싶지 않아.
익숙해질 수도 없지만.
필름이 돌아가는 영사기 너머의 연기에 몰입이 되지 않는 것도, 소설이나 극의 이야기가 다 남의 이야기 같은 것도, 그러면서도 자꾸만 그들의 이야기에 제 모습을 대입해보고 마는 것도 전부, 전부.
이제는 호흡의 일부가 되고 말았기에, 에슬리는 익숙함을 경계했다.
사랑이란 그녀 삶의 목적과도 같은 것이며 제 뿌리에 다다른 감정으로, 이것에서부터 내일이란 것을 이었기에 에슬리에게 사랑은 늘 경이롭고 또 예찬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라고 해도 정말 예찬하느냐, 맹신하느냐 묻는다면 오히려 그 반대로 이 감정에 불신하고 끊임없이 경계하는 편이었지만.
그랬기에 더욱,
“나는… 무슨 미사여구를 붙여야 좋을지도 모르겠고, 어떤 말이 마음을 흔드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그 입술에서 나오는 고백이 사막의 모래밭에서 찾아내는 보석처럼 가치 있는 게 아니었을까.
“나도, 사랑해. ……오늘도 변함없이. 어제보다 더.”
그러니까─, 루도 더 들려줘. 내가 루의 사랑으로 흠뻑 적셔질 수 있도록.
제 속삭임에 벽난로의 불길보다 더 낯을 뜨겁게 하는 연인과 눈을 맞추었다. 영사기의 필름이 돌아가는 소리에서 완전히 의식을 떼고 고개를 들어 입술을 겹쳤다. 요령 없는 제가 보일 수 있는 최선이란 이런 것이어서, 맞닿은 곳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따스한 숨을 삼키며 오늘은 역시, 루의 옆에서 자고 싶어. 입맞춤의 다음에 할 말을 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