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일의 여름은 걱정했던 것만큼 덥지 않았다. 도시 안까지 물길이 나 있는 아름다운 수상도시가 여름에는 물지옥으로 변하는 게 아닐까─실은 이트바테르의 여름이 지독하기로 유명하다─지레 겁을 먹었던 것에 비해 놀랍도록 산뜻한 공기였다.
그래봤자 아직 6월, 갓 여름에 접어들었을 뿐으로 벌써부터 베일의 여름을 다 본 것처럼 굴기엔 섣부른 감이 있었지만 흐드러지도록 색색의 봄꽃으로 물들었던 언덕이 파릇파릇한 잎사귀로 옷을 갈아입는 계절의 변화 가운데서 시작이 나쁘지 않았다.
“여기는 우기가 9월에서 11월쯤이래.”
“헤에. 꽤 늦는구나.”
“응. 그러다가 가을겨울에 홍수가 날 만큼 물이 불기도 한다나 봐. 눈은 거의 안 내리고. 눈이 보고 싶으면 위로 올라가래.”
“그럼 겨울이 되면 엘버에 다녀와도 좋겠어.”
그것도 좋지. 답하며 에슬리는 소파에 무기력하게 늘어진 루를 흘겨보았다.
뜬금없이 기후 이야기를 꺼내게 된 배경이 바로 저기, 저 소파 자리에 있었다. 넉넉히 3인용은 될 긴 소파에 그보다 긴 몸을 얹으며 벌써부터 더위 먹은 소리를 내는 연인에게 말이다.
“그게 아니라…, 겨울 이야기는 겨울에 하고, 벌써부터 덥다고 우는 소리 하긴 이르다고.”
“하지만 에슬리~… 이런 건 상대적인 거잖아. 사막에서 지내던 에슬리와 다르게 20년을 꼬박 엘버에서 산 나를 좀 더 배려해줘.”
늘 그렇지만 제 연인은 뻔뻔하고 또 달변가다. 연인과 말로 싸워 이기려는 건 무모한 일이었고 입씨름을 하다 보면 진만 빠질 게 눈에 선했다. 그래서 부러 답을 피하자 이해해주지 않을 거야? 물어오는 목소리는 또 얼마나 얄밉던지.
──얄미워도 별 수 없었지만. 에슬리는 가끔 사랑받고 있다는 걸 너무나 잘 아는 연인을 예쁘게 봐야 할지 밉게 봐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아무튼 그와 말로 싸우느니 힘으로 질질 끌고 나가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혼자 다녀와도 상관없지만… 이사 올 때 약속했는걸. 정원은 같이 돌보겠다고. 이렇게 말을 꺼내면 그는 안 나가겠다는 건 아니라고 냉큼 오리발을 내밀까.
액체 고양이처럼 늘어진 연인의 반대편으로 가 앉은 건 나름의 심술이다. 어느새 등을 덮게 된 길이를 손으로 대충 빗으며 에슬리는 어떻게 연인을 꾀어낼지를 고민했다. 생각과 손이 따로 움직였다. 한 움큼 움켜쥐어 올려 묶자 살랑살랑 꼬리치는 말총머리의 완성이다.
그리운 모습이었다. 20살이 되면서부터 기르고 싶어도 기를 수 없던 머리카락을 여기까지 기르게 된 건 기쁜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연인도 좋아해주는 걸까? 어떤 머리 모양이든 다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유독 묶어 올릴 때면 슬그머니 다가와 치대는 일이 잦았다.
꼭 지금처럼.
“내가 묶어줄 수도 있었는데.”
“자기 머린 안 묶고?”
언제 일어난 건지. 잔머리가 삐져나온 부근을 긴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그가 몸을 붙여 왔다. 목덜미 부근에서 전해지는 속삭임은 따스하다고 의식하기 전에 오싹한 긴장감부터 안겨주었다.
“나는 이따가, 나갈 때?”
나갈 생각은 있고? 표정이 말을 대신한다.
손가락은 동그란 뒤통수를 따라 이어지는 곧은 선부터 차근차근 짚어왔다. 팽팽한 근육 사이 부드러운 살결, 피부 아래로 느껴지는 맥박, 사일란의 낙인과 그 주위의 희미해진 멍울까지. 루는 더듬고 짚어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워 보였다.
─아니, 취소, 취소. 손가락이 지난 자리 위로 입술이 닿았다. 반사적으로 움츠리자 오른손이 허리를 휘감고 쉬이, 얌전히 있으란 듯 품으로 당겼다. 구부정해진 등에 그의 고동이 들렸다.
여름이 바로 여기 온 것 같았다.
“……더워졌어.”
“역시 나가지 말까?”
왜 이야기가 또 그쪽으로 새지? 투덜거려도 그는 못 들은 척이다. 높이 묶은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살살 걷어내곤 목덜미에 쪽, 이어 물길을 따라가는 뱃사공처럼 척추선을 짚으며 입술이 지분거렸다. 역시 더웠다. 한낮의 실내에 어울리지 않는 묘한 기류다. 찌르르-하고 새가 울었다.
손가락 다음으로 입술을 대는 건 반칙만 같았다. 단단히 옹글져 지문이 선명한 손끝에 이어서 여느 곳보다도 부드럽고 섬세한 입술이 닿으면 더 예민하게 느끼는 게 당연한데. 내는 호흡마저 더워졌다. 어느새 소파의 등받이 쪽으로 반쯤 걸쳐진 에슬리는 땀방울이 밴 이마를 쓸며 건너편 전면창을 보았다.
정오를 지난 바깥은 높게 자란 해바라기 대를 태양이 눈부시게 집어삼키고 있었다. 줄기 끝의 꽃봉오리는 잘 여물어갔다. 이번 달이 끝날 쯤엔 지상의 햇님이라고 불러도 손색없도록 만개하겠지. 역시 물 주러 나가야 하는데. 잡초도 정리하고 못 자란 대를 솎아내고 그리고 또……,
상념은 열을 머금은 입술이 닿을 때마다 끊겼다 이어지길 반복했다. 숨이 달다. 한 번씩 폐가 오르내릴 때마다 삼키는 공기가 달고 습해졌다.
이윽고 옷과 옷 사이의 틈, 5번째 허리뼈가 위치한 살갗 위까지 입술이 내리누르자 에슬리는 그만 몸을 뒤집었다. 그래봤자 연인의 두 팔 안이었다. 올려다보면 이렇게 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싱글벙글 웃는 낯이 있었다. 잘 익은 토마토를 수확하는 만족스런 농사꾼의 낯이다.
얄미워, 진짜.
여름은 해가 길어 다행이었다. 나가는 건 미루고 일단 이 더위부터 해결해야지. 뻗어오는 팔을 그는 기꺼이 응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