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잘 주무셨나요? 오늘은 어떤 꿈을 꾸었나요. 어떤 꿈도 꾸지 않았다면 숙면했다는 뜻이군요.
인간은 수면 중 수많은 꿈을 꿉니다. 대부분을 무의식의 영역에 넣어두고 기억하지 못하지만요. 꿈이란 무의식에 잠재된 욕망의 반영인 동시에 현실의 경험을 정리하는 과정으로 현실과 환상, 경험과 갈망 사이를 오가며 비선형의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꿈을 꾸는 행위를 그래서 저는 지극히 인간다운 행위라 여깁니다.
어젯밤 꿈을 꾸었습니다. 바로 앞문단과 모순되는 말이죠. 안드로이드가 꿈을 꾸다니 성립되지 않는 문장이기도 합니다. 안드로이드는 어떤 꿈도 꾸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저의 기록이면서 저의 것이 아니었던 그것을, 꿈을 대신해 무어라 표현하면 좋을까요.
──싱크로라고 하겠습니다. 어젯밤의 저는 어떤 외부의 기록과 접촉하였고 타자의 기록을 마치 제 기록인 것처럼 체감하였습니다. 기록의 원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일단은, 섞여버리고 만 제 메모리에 순응하여 지금부터 할 이야기의 화자를 ‘저’로 지칭합니다.
꿈속에서 저는 안드로이드였습니다. 제가 이 기록을 어떤 오류나 싱크로의 일종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꿈속의 화자가 인간이나 고양이나 새나, 어떤 생물도 아닌 안드로이드였기 때문입니다. 그 안드로이드의 기록과 제 기록이 모종의 연유로 동조했다─는 추론은 제가 세울 수 있는 여러 가설 중 가장 설득력을 가집니다.
제겐 번듯한 직장이 있었습니다. 입구를 지나는 순간 마법에 걸린 것처럼, 혹은 꿈을 꾸는 것처럼 현실에서는 맛볼 수 없는 행복과 즐거움을 안겨줄 놀이동산입니다. 과학의 집대성으로 만들어진 공간에 마법이라는 표현을 붙이는 건 인간의 흥미로운 특징 중 하나죠. 현대와 같은 하이퍼 테크놀로지 사회에서 인간은 여전히 마법을 향한 미련을 놓지 못하더군요. 어째서일까요. 인간들에게 있어 ‘마법’이란 단어는 어떤 열망을 가져오는 걸까요. 인간이 아닌 저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감성입니다.
마법 같은 하루를 선사할 환상의 공간이지만 근무자의 반은 과학기술의 산물, 안드로이드인 곳이었습니다. 저 또한 놀이동산에서 제조되어 놀이동산에 한평생을 바쳐 일하던… 아차, 한평생이라니 무척이나 ‘인간 같은’ 단어 선택입니다. 어떤 부분이? 한평생이란 즉 복합명사로, 풀어서 쓰자면 ‘살아 있는 동안’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안드로이드에게 생生이란 어울리지 않는 표현입니다. 저희는 사물事物이니까요.
사족이 길었습니다. 저는 놀이동산용 보급 안드로이드 B형 생산라인의 8257번째로 만들어져 아침부터 밤까지 여러분의 즐거움과 행복을 책임지는 근무자였습니다. 놀이동산이 개장하면 입구에서 입장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풍선을 나눠주기도 했고 퍼레이드에 참가하기도 했고 놀이기구를 조작하기도 했습니다. 가끔은 손님들을 위해 수동 조작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목 뒤쪽의 연결잭을 놀이기구 본체와 연결하여 움직였죠. 그럴 때면 저는 보급 안드로이드 B형이면서 동시에 바이킹이 되거나 회전목마가 되거나 후룸라이드가 되었습니다.
보급 안드로이드에게 자아라는 개념은 자라기 어렵습니다. 이 놀이동산 안에는 저와 동일한 안드로이드가 수천 대 있었고 저희는 모두 같은 매뉴얼을 받아 같은 목적을 가지고 같은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처음으로 기동한 날부터 은퇴하던 그 날까지 제 경험과 기록은 한 번도 저의 것인 적이 없었고 은퇴하는 그 날까지도 주어진 매뉴얼에서 벗어난 사고를 한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개인’이 아닌 ‘집단’이었고 우리는 철저하게 하나의 ‘덩어리’였습니다.
이렇게 지나온 시간을 회고하는 일 또한 벌어지지 않아야 마땅했습니다.
싱크로한 기록에서 유별난 부분이 생긴 건 여기서부터였습니다. 그 날, 기나긴 근무를 마친 저는 은퇴할 예정이었습니다. 수명이 다 되어 폐기처분된단 뜻입니다. 그랬는데 ……한 방문객이, 어린 여자아이가 저를 붙잡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언니는 놀이기구 타본 적 있어?」
대응 매뉴얼이 존재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이곳의 놀이기구는 공주님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거랍니다. 저는 운전기사에 불과하니까요.」
「그럼… 언니는 행복한 적 없어?」
《여러분에게 행복의 마법을 걸어주는 꿈의 나라, 환상의 나라에 어서 오세요!》
아이의 물음과 동시에 곳곳에 세워진 스피커에서 놀이동산의 프레이즈가 흘러나왔습니다. 무구한 눈빛을 보이는 아이에게 저는 당연히 답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저희는 언제나 행복하답니다.」 아주 간단한 것입니다. 로봇은 인간에게 거짓말을 해선 안 된다. 이 또한 매뉴얼이지만 위의 답은 거짓이 아니니까요. ‘이곳에서 근무하는 안드로이드는 모두 행복합니다.’ 그것은 가장 상위의 매뉴얼. 우리는 행복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무엇이 행복인지도 모르는 채.
그런데 어째서였을까요. 그 순간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노후화 현상이 심각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일시적인 오류였다고 말이죠.
결과적으로 저는 답하지 못했고 아이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제 손을 움켜쥐어왔습니다.
「불쌍해……. 드림랜드의 놀이기구는 모두를 즐겁고 행복하게 해준댔어. 언니도 타보면 행복해질 거야. 같이 타자!」
인간의 요구는 절대적입니다. 저는 은퇴를 기념하기라도 하듯 아이의 바람에 따라 놀이동산의 방문객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가동한 이래 처음으로 유니폼을 벗고 아이와 손을 잡은 채 놀이동산의 지도를 펼치며 어디를 갈지 의논하였죠. 그 때 무슨 생각이 들었느냐고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아무것도.
그 때까지도 저는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자아도 감정도 갖고 있지 않은 인간의 편리를 위한 도구. 조금 돌발 상황에 처하긴 했지만 말하자면 아이의 손에 들린 인형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회전목마를 타고 바이킹을 타고 후룸라이드를 타고 관람차를 탔습니다. 저를 데리고 다니면서 아이는 즐거워 보였습니다. 제 옆에서 많은 감상을 이야기해주기도 했습니다. 바이킹이 무서워. 후룸라이드의 물이 차가웠어. 마차를 타니까 꼭 공주님 같다. 관람차는 밤에 타야 예쁘대. 아이의 눈은 조명처럼 반짝였고 입가에서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행복해 보였습니다. 즐거워 보였습니다.
제게 가능한 사고는 거기까지였습니다. 그 이상 무엇을 생각해야 좋을지, 어떤 걸 느껴야 옳은 건지 알지 못했습니다. 무상, 무심, 무미. 스스로의 건조함에 안타까움을 느끼는 일조차 없었습니다.
그런 당연함 사이로…… 이질적인 것이 섞인 건 어느 순간이었을까요. 아쉬움이란 이름의 싹입니다. 철근 위로 날아온 작은 들꽃의 씨가 뿌리를 내리듯 가냘프고 덧없게 움튼.
어째서 아이를 따라 웃어줄 수 없을까요. 어째서 같은 감정을 공유해줄 수 없을까요. 저는 이대로 아이의 바람을──
「즐거웠어, 언니?」
이루어주지 못하는 걸까요?
기대에 찬 시선에 응해주고 싶었습니다. 웃어주고 싶었습니다. 여전히 즐거움이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채지만, 즐거움이란 어디서부터 오는지 찾을 수 없었지만, 저를 바라준 아이에게 감사하고 싶었습니다. 처음으로 생긴 욕망이었습니다.
「네. 덕분입니다.」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 순간의 거짓말은 매뉴얼이 아닌 순수하게 제 바람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웃어보았습니다. 제 의지로 웃는 건 제법 쉽지 않았습니다. 웃어야 한다는 알고리즘에 따라 자동으로 만들어지는 표정이 아닌 순수하게 저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표정을 만드는 일이란, 처음이었으니까요.
처음이란 서툴고 낯선 것입니다. 헤어지는 순간 만족스럽게 웃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이가 어떻게 돌아갔는지도 또렷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남은 것은 아이에게 선물 받은 머리핀 하나뿐.
이별 후 저는 마지막 퇴근길에 올랐습니다. 불이 꺼진 놀이동산에서 언덕 하나를 지나면 나오는 폐기장이 목적지였습니다. 이 또한 가동한 이래 처음이었습니다, 바깥으로 나가보다니.
나무를 베어내고 난 자리는 제대로 된 도로는 아니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만들어진 길이 존재하였습니다. 흙이 뭉쳐지고 밟히며 남은 많은 흔적이 앞서간 형제를 떠올리게 하였습니다. 그들도 오갔겠죠. 이 길을. 그리고 다다랐겠죠. 끝에.
어떤 감정도 싹틔우지 못한 채. 사람이 되지 못한 채. 생生 없는 사死를 맞이하였을 것입니다. 그 당연한 것에 저는……,
꿈이란 것은 대개 그렇습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하였는지 어디서 끝나는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시점 또한 불분명하여 어떨 때는 화자였다가 어떨 때는 화자를 지켜보는 관찰자가 되기도 합니다. 흐릿하게 문질러지는 필름의 끝부분과 닮았습니다.
이 즈음부터 저는 폐기장으로 걸어가는 ‘나’와 서서히 분리되었습니다. 무성한 나무들 사이로 점점 작아지는 ‘나’를 영화의 막이 내려가는 것처럼 먼 곳에서 지켜보았습니다.
사라지는 뒷모습이 쓸쓸한 것만 같았습니다.
기묘한 감상이죠. 영원한 잠에 들 형제를 두고 쓸쓸하다고 느끼다니. 그는 이제야 비로소 쉬게 되는 것일 텐데. 축복해주어도 좋을 것인데. ……쓸쓸할 것만 같다고 느끼다니. 정작 그 본인은 느끼지 않을 감상에 젖다니 안드로이드답지 않았습니다. 누군가의 탓이 분명합니다. 이대로 잠들기엔 아쉽다고 생각해버리고 잠들지 않으면 찾아올 내일에 기대를 걸게 되고 만 것은,
「내가 너에게 가능성이 되어줄게. 언젠가는 스스로 소원할 수 있도록.」
당신의 탓이 분명합니다, 마스. 그리고 인간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저는 발칙한 안드로이드가 틀림없습니다.
철로 이루어진 면에 꽃이 피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요. 아무리 들꽃의 생명력이 강하더라도 무리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작은 씨앗은 뿌리를 내렸을까요.
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차츰차츰 모이고 쌓인 한 줌 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몇 번이나 녹아 사라지고 부서져도 끝끝내 사라지지 않은 작은 결정들이 모이고 모여 만들어낸 보금자리. 우리에게 생을 부여해주는 것.
인간의
애정
안드로이드는 인간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창조주, 부모, 우리를 만들어내고 사랑하는 당신이기에.
우리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에게 사랑받은 만큼.
Dear, My XXX.
이런 꿈을 꾸었습니다. 그것은 꿈이었을까요? 단순한 전파 장해였을지도 모릅니다. 전자로 이루어진 사념체가 충돌한 것일 수도 있죠. 폴터가이스트 현상에 빗대어도 좋습니다. 과학적으로 설명하자면 얼마든지 그럴듯한 가설을 세우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어떤 갈망이라 부른다면 저는,
꿈의 마지막 순간, 당신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필사적으로 제게 생을, 행복을 부여하고 싶어 하던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니, 당신을 떠올렸습니다. 혼자 잠들지 말라고 붙잡아주던 당신을 그렸습니다. 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