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개가 아닙니다, 마스. 안드로이드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ST사의 군용 프로토 타입 안드로이드입니다.”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니잖아. 누가 그걸 모르냐. 아니면 그것도 안드로이드식 농담이냐? 소리 대신 눈으로 쏟아지는 말을 읽어내며 카르테는 얌전히 손을 내밀었다. 뻔히 그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서도 굳이 한 번 더 불필요한 말을 덧붙이는 것은 카르테 또한 그와의 대화를 즐긴다고 해석해도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스스로 말하지 않는 한 마일즈 번이 알아줄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의외로 둔한 면이 있으니 말이다. 혹은 자신이 없는지도 몰랐다. 유독 안드로이드를 대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그였다.
아카데미의 정문이었다. 휴일 오전이라 행인은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없지도 않았다. 그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무시하고 카르테와 마일즈는 둘만의 세계였다. 그 둘만의 세계가 옆에서 생각하는 꽃송이 날리는 세계가 아닌 긴장과 농담의 줄타기라는 것에서 정말 둘만 아는 세계였다.
오늘이 바로 두 사람의 계약 연애가 영광의 첫 스타트를 끊는 날이다.
손을 내밀자 그가 깍지를 얽었다. 사귀는 사이면 이렇게 하는 거라며. 말투는 심드렁한 듯 퉁명스러웠지만 두근, 두근, 손끝에서부터 전해지는 맥박에 카르테는 자연스럽게 그의 체온과 맥박을 검사했다. 평균보다 조금 빠른 심박수다. 대체로 만사에 심드렁한 태도를 취하는 자칭 소시민(희망)인 마일즈는 남들보다 심박수도 조금 느린 편에 속했다. 말하자면 잘 놀라지도 않고 긴장도 하지 않는단 뜻이다.
하지만 지금의 심박수는, 카르테는 파동을 그리는 붉은 렌즈를 빙그르르 굴리며 고개를 살짝 올렸다. 눈이 마주치자 곧장 축 쳐진 눈썹이 팍 찌푸려졌다. 너, 말하지 마라. 다시 소리 대신 눈빛이 안드로이드를 협박해오고 인간의 메시지를 충실히 따르는 안드로이드는 순종적인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스…….”
이것이 그 결과값이다.
“───할 말 있으면 하고, 말려면 말지 왜 말을 하다 말아!?”
다시 말하지만 마일즈 번, 이능력자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능력의 소유자로 그 능력에 얽힌 사건사고가 많은 탓인지 만사에 심드렁한 태도를 곧잘 취하는 사람이지만… 의외로 금세 욱하고 부끄러움을 화로 대신 표현하는 면도 있다는 것을 이 안드로이드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잘 알고 또한 잘 찔렀다.
“아뇨,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잖아!”
“손이 따뜻합니다.”
“이제 와서 무마하려는 거냐?”
“연인다운 일 제 1번입니다. 다음은 무엇을 해보겠습니까?”
“아주 무시하지, 그래. 인간에게 헌신한다는 안드로이드가 자알 한다.”
거기서 그 말을 꺼내는 건 치사하지 않습니까, 인간. 이번엔 카르테 쪽에서 시선을 보내자 마일즈는 코웃음으로 답해주었다.
이쯤 되자 평소와 다름없는 심박수로 돌아와 그가 잡은 손을 조금 더 제 쪽으로 당겼다. 당기는 대로 카르테는 반보 더 마일즈에게 다가갔다. 맞잡은 손은 어딘지 어색하고 뻣뻣하였고 그의 얼굴은 꽤나 가라앉았다고 해도 여전히 붉은 기가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아무렇지 않은 척을 가장하려는 그를 이번에야말로 카르테는 모른 척 해주었다.
그는 무엇을 그렇게 부끄러워하고 있는 걸까. 그에게 결여 감정 중 하나인 ‘사랑’을 간접 체험 시켜준단 취지로 시작한 연애였지만 카르테는 이것이 어디까지나 흉내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물건을 상대로 사랑을 느껴서는 정상의 범주에서 어긋나버릴 것이다─물론 이런 표현은 그가 싫어할 것 또한 잘 알았다─. 흉내 낼 뿐인, 진심이 없는 행위에 가뜩이나 사랑이 결여된 그가 두근거림이나 설렘, 들뜸을 느끼지 않을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마일즈는 긴장하거나 멋쩍어하거나 어색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조금, 미스테리다. 렌즈가 현상의 해석을 위해 바쁘게 돌았다.
“다음은 뭐, 영화라도 볼까?”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흉내에 불과하지만 행동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카르테는 이 계약이 그에게 또 다시 유의미한 경험을 남겨주리라 판단했다.
연인다운 일 제 2번으로 함께 영화를 보았다. 로맨스 영화였다. 그러나 마일즈는 깨와 꿀이 쏟아지는 스크린을 보며 내내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차라리 공포 영화가 나았을까 생각하다가 카르테는 공포 영화를 보는 연인의 클리셰를 떠올렸다.
「꺄아, 무서워!」
「이리 와, 눈 가려줄게.」
클리셰를 자신과 마일즈에게 대입하던 카르테는 그 길로 가정을 접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는 레스토랑에 들러 식사를 했다. 카르테는 훌륭히 인간을 모방하여 파스타를 먹었다. 스푼 위에 포크를 찍어 돌돌 말아 입으로 옮긴다. 수많은 데이터를 분석한 끝에 고른 맛집은 안드로이드의 자존심을 지켜주었다.
“마스.”
“……그것도 해야 하는 거냐?”
“아앙.”
“……아앙.”
카르테는 계획에 빈틈없는 안드로이드였고 두 사람은 레스토랑에서도 충실히, 겉모습만은 아주 다정하게 서로 먹여주는 커플이 되어보였다.
식사를 마치고 난 다음은 흔들다리 효과를 노려 롤러코스터라도 타보지 않겠냐고 제안했지만 마일즈에게 이상한 시선만 받으며 다음 기회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유는 마일즈가 아닌 카르테에게 있었다.
“저 롤러코스터, 중간에 물길 통과한다.”
넌 젖으면 안 되잖아. 덤덤한 듯 세심한 배려에 카르테는 잠깐 그의 사랑 가능성을 재고할 뻔했다. 상대가 안드로이드가 아니었다면 설레서 반해버릴지도 몰랐다. 어째서 재고할 ‘뻔’ 하였냐면 상대를 반하게 하는 것이 아닌 그가 반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 뒤로는 평범하게 휴일을 즐기는 시간이었다. 서점, 옷가게, 게임센터, 10섹터의 상점가는 젊은이들을 위한 놀거리가 풍부했고 마일즈는 이런 자리에서 빼는 성격이 아니었다. 테이저건으로 갈고닦은 사격솜씨로 카르테에게 쿠션을 안겨주기도 했다.
품에 도넛모양 쿠션을 안게 된 카르테는 미미하게 만족하였다. 표정으론 알 수 없는 미세한 변화였다.
“마스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합니다.”
“어떤 평가?”
“자기 사랑은 몰라도 남을 설레게 하는 법은 잘 아는군요. 마스답습니다.”
“뒷말은 별로 칭찬처럼 안 들린다. 그보다… 설렜냐?”
“설렜습니다.”
눈과 눈이 마주친다. 정확히는 눈과 렌즈가 마주쳤다. 지잉, 소리가 날 것 같은 원을 그리는 렌즈를 한참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마일즈는 전혀 안 믿는 기색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대단히 유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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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하루 일정이 모두 마감되었다. 두 사람은 마지막까지 손을 잡은 채 기숙사로 돌아왔다. 아카데미 정문을 넘어선 순간부터 무수히 많은 시선들이 두 사람─정확히는 한 사람과 한 안드로이드─에게 쏠렸다 맞잡은 손까지 내려갔다 다시 얼굴로 향하며 수군거림이 있었지만 여전히 두 사람 모두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았다. 아마 내일쯤이면 전 아카데미에 소문이 퍼지겠지. 진실을 아는 것은 동기생 중에서도 아주 극소수일 것이다.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일즈는 카르테를 방문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이런 사소한 디테일이 두 사람의 연극을 보다 실감나게 해줄 것을 믿었다.
그래서 카르테는 마지막으로 준비하고 있던 비장의 한 수를 꺼내들었다.
“마스.”
“응?”
“…….”
“……뭐냐?”
그의 옷자락을 살며시 잡고 가지런히 눈을 감는다. 각도는 턱을 살며시 아래로, 이렇게 하면 감긴 속눈썹과 입술이 그의 시야에 또렷이 들어올 것을 알았다. 그리고는 5초 간 기다리기. ……그리고 5초가 지나 카르테는 무심히 다시 눈을 떴다.
“안 하나요? 키스.”
동시에 마일즈에게서 헛숨을 들이킨 기침이 터졌다. 너, 너 그거……. 구세계의 드라마에서는 이 또한 클리셰였습니다만. 그래서, 그, 나랑 한다고? 네, 합니다. 다시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마일즈는 얘기를 꺼낸 것만으로 눈 밑으로 열이 오른 것 같았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 안드로이드와 대단히 대조적이다.
뺨 대신 머리카락이 붉은 안드로이드는 사이드 업으로 올린 포니테일을 따라 고개를 살며시 기울였다. 제가 너무 빨랐습니까? 그 태연한 물음에 마일즈에게서 울컥한 답이 터졌다.
“한다, 한다고! ……다시 눈 감아봐.”
시키는 대로 눈을 감았다. 첫날부터 바로 키스하는 건 어디의 속도위반이냐. 투덜거림과 함께 어딘지 긴장한 듯한 숨결이 바로 앞을 스치고, 이어 부드러운 것이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키스, 그보다 뽀뽀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옅은 접촉이다.
그러나 틀림없는 접촉이었다. 사랑을 싹 틔우고자 하는.
입맞춤을 마치고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면 시선을 옆으로 돌린 채 아무렇지 않은 척에 여전히 전력을 다하는 그가 보였다. 이리저리 아무것도 없는 벽만 훑던 시선이 힘겹게 그녀에게로 돌아오며 마일즈에게서 또 한 번 심드렁함을 가장한 허세가 나왔다.
“뭐… 별 거 없네.”
벌겋게 열이 올라 겉으로 보기에도 뜨거워진 채 말해서야 설득력이 없었지만. 카르테는 굳이 그의 언행불일치를 지적하는 대신 그새 열이 사라진 입술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그거 일부러냐? 평균보다 1.7배더 퉁명스러워진 목소리에 고개가 좌우로 움직인다. 그를 의식하게 만들고자 의도된 행동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