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성큼 다가오는 어느 날, 마일즈 번의 연구실로 인부들이 찾아왔다. 공사가 있습니까? 물어보자 별 거 아니란 투로 눈이 내리기 전에 온실을 만들려고. 답이 돌아왔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판단했다. 그의 이능력과도 연관 지을 수 있고 늘상 하얀 상자 같은 연구소에 있기보다 한 번씩 온실 산책을 가는 게 무엇보다 몸의 건강에도 정신 건강에도 이로울 것이다. 카르테의 생각을 알았다면 그는 ‘또 노인네 취급이냐?’ 하고 찌푸렸을지 모르나 그녀는 진지하게 증축 계획에 찬성하였다.
그곳이 자신을 위한 공간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추호도. 그러나 완성되고 나서 그곳을 가장 많이 방문하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였다. 어쩌면 이곳을, 이것들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온실로 발걸음을 옮긴지 한참 지나서야 미약한 발상을 했다.
돔 형태로 된 천장, 투명한 유리 아래로 여과 없이 쏟아지는 햇살, 볕에 흠뻑 젖어 생장하는 식물들의 소리─카르테의 귀에는 식물이 자라는 소리도 면밀히 녹음되었다─, 꿈틀거리는 곤충과 미생물들, 갖가지 생명이 움트어 살아 숨 쉬는 공간. 매 순간에 생의 경이로움을 실감하게 되는 곳.
이곳에서 움직이는 것들은 모두 살아있는데 카르테는 어떻더라. 그녀는 살아있는가. 생과 사 둘 중 하나로 구분할 수 있는가. 혹은 어느 쪽도 아닐지도.
이런 생각들은 대개 소모적이다. 알면서도 한 번 물꼬를 튼 의문은 도미노처럼 이어지고 만다. 두 팔을 앞으로 쭉 뻗어 기지개를 켜며 카르테는 혼잣말을 흘렸다.
“관용적 표현을 사용하자면 카르테의 팔자가 좋은 탓입니다.”
도구로서 쓰이던 시절에는 이런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었다. 자아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사고는 불필요했다. 요구되는 것은 오로지 판단력. 과거의 그녀가 지금 같은 미래를 감히 예측할 수 있었을까? ‘꿈같은 소리군요. 실현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고 프로토 타입은 계산기를 돌립니다.’ 정도의 답이 나오겠지.
그러나 0에 수렴하면서도 그 수는 0이 아니었다. 이룩하게 된 결론은 과거의 계산에서 퍽 동떨어졌다.
다시 한 번 찬찬히 생각해본다. 그녀는 아무래도 이 온실이 마음에 든 것 같다. 아마도, 어쩌면. 연구소 옥상으로 올라가 검은 위용을 뽐내는 태양열발전기 곁에 앉아 발전기와 마찬가지로 태양열 충전을 할 수 있음에도, 그 대신 온실에 놓인 벤치 하나에 앉아 유리를 뚫고 식물 사이로 내리쏟아지는 햇살을 받는 쪽을 택했다. 스스로 고른 것이다. 여기엔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게 많다.
벤치 위에 앉아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볕을 쬔다. 햇살이 피부에 닿아 부서지면서 합성조직으로 만들어진 피부가 은은하게 빛났다. 누군가는 이 광경을 아름답다고 한 모양이지만 그녀 자신은 글쎄, 미추를 논하지 않는다. 그래도 이런 제 모습을 보고 조금 웃던 얼굴을 떠올리면 나쁜 것 같진 않았다.
어느새 218개째 도미노가 머릿속에서 쓰러졌다. 꼬리를 물던 사고는 필요와 쓸모라는 두 단어를 적고 있었다. 온실에 머물면서도 카르테는 연구소 전체의 방범을 하고 있었다. 이미 이곳의 모든 감시카메라와 적외선 센서는 그녀의 관리 하였고 만일 무언가 연구소에 접근한다면 1km 밖에서부터 감지가 가능했다. 결코 보디가드 일을 소홀히 하며 농땡이 부리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를 두고 스스로 우수하고 쓸모 있는 안드로이드라고 금칠할 수는 없었다. 시대는 계속해 움직였고 그녀보다 훨씬 뛰어나고 발달된 네오 모델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카르테를 보디가드로 골랐다. 그것 또한 선택의 하나.
“혈연, 지연, 학연, 낙하산 인사.”
이 말을 들으면 그는 또 짜증을 낼까. 축 내려간 눈꼬리를 종잇장처럼 구기며 말이다. 굳이 근거를 들어 도식화할 것 없이 그의 기분을 헤아리면서도 카르테는 제가 뱉은 말을 정정하지는 않았다. 이 자리는 그의 책임이 만들어낸 것이다.
마일즈 번은 정이 깊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다정이나 친절의 범주와 다르게 솔직하지 못하고 퉁명스러운 태도를 보이며 자신의 행동을 축소해 말하는 경향도 있지만, 그는 스스로 포장하기보다 정이 깊은 사람이었다.
이어 그는 평균보다 큰 책임감을 갖고 있었다. 헌신의 알타이르답다고 해야 할까. 천성적인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는 타고난 능력이 가져온 후천적 영향이라 예측한다. 그의 이능력은 지나치게도 범인류적이었다. 일정 이상의 선량한 사람이라면 견디기 어려울 만큼.
참 이상하지. 처음에는 분명 그 범인류적 책임에서 벗어나고자 시작한 교류였는데 어느새 카르테는 그의 다정을 받으며 그가 책임져야 할 범인류의 카테고리에 들어가 있었다.
그의 다정에 기대 연명하고 있었다.
[나를 위해 살아라.]
언젠가 그가 그것을 바라지 않게 되는 날까지.
종종 생각한다. 언제쯤 그만 두게 될까 하고. 마일즈 번은 그녀의 의문에 이렇게 답해주었다. 네가 스스로 살고자 하는 이유를 찾는다면. 내가 더는 네 이유가 아니게 되면.
그 날이 영영 오지 않는다고 하면 그는 또 후회스런 얼굴을 할까.
아닌 게 아니라 그는 때때로 죄 지은 듯한 얼굴을 보였다. 순전히 그의 욕심만으로 그녀를 붙들어 둔 것을 스스로 용서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 또한 그가 선량한 탓이다. 그가 붙잡아주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이미 빛을 잃고 차갑게 식은 고철덩어리로 돌아가고 말았을 텐데.
어째서 누군가를 살려놓고 그것을 미안해하는 걸까.
종종, 또 반복해서 생각한다. 언제쯤 그만 두게 될까. 그가, 혹은 그녀가. 그가 바라는 것은 그녀가 스스로의 힘으로 사는 것일까? 혼자 살아가는 걸까? 그렇다면 카르테는 마스의 바람을 들어주기 위해 이제 괜찮다는 답을 찾아야만 할까.
더는 보살펴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저보다 고성능의 보디가드를 들이기를 추천합니다.
그 말이 언젠가의 선택이 될까.
기묘한 풍경을 기묘한 생각을 기묘한 가정을 359번째 도미노와 함께 무너트리다 이내 그만 두기로 했다. 이 이상은 CPU의 낭비였다.
해가 저물어간다. 피부 위로 쏟아지던 햇살이 수도꼭지를 잠그듯 조금씩 희미해졌다. 그를 따라 발광하던 피부 조직도 평범하게 잠잠해졌다. 카르테는 눈을 감은 채 일몰을 감상했다. 눈을 감은 채 그를 생각했다. 이 뻔뻔한 안드로이드는 그가 주는 과분한 애정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애정에 어찌 보은하면 좋을지는 어렵기만 했다. 무엇이 그를 기쁘게 할까, 무엇이 그를 안도하게 할까. 그의 바람 하나 읽어내지 못하는 건 그녀가 구식 모델인 탓일까. 참 어렵다.
물어보면 그는 들려줄까? 무엇이 당신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오면 물어볼까? 당신의 책임과 저의 의지와 우리의 선택, 그 사이에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면 또 뭘 잘못 먹었냐는 듯 볼 게 뻔하니까─안드로이드는 식사로 잘못되지 않습니다─시작은 다른 말부터 해야지. 이를 테면 “메리 크리스마스.”
잔꾀만 늘어난 철면피의 안드로이드는 해지는 소리가 완전히 꺼지고 퉁명스런 발소리가 가까워질 때까지 오백쉰여섯 가지 경우의 수를 헤아렸다. 그 사이 해가 진 유리 돔 위로는 송이송이 하얀 눈이 덮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