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넵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테리는 그 옆을 지키고 있었다. 테리에게서는 달콤한 향기가 흘러나왔다. 테리, 나 물. 더듬거리는 목소리에 꿀을 녹인 물컵이 잡혔다. 꼴깍거리고 물을 전부 넘기고 나자 디모넵의 옆에 찰푸닥 앉아 있던 작은 포켓몬이 한숨을 쉬었다. 디모넵을 책망하는 게 여실했다.
‘어린아이가 술이라니, 안 돼요. 디모넵.’
꼭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테리가 옆에 얌전히 있어주는 건 무척 오랜만인 기분이었다. 그래서 디모넵은 혼나는 것도 마냥 좋다고 테리의 몸을 끌어안았다. 말랑하고 부드러운 감촉과 그 아래 흐르는 미지근한 온도가 익숙한 그대로였다.
“테리. 기분은 좀 풀렸어?”
테리는 얌전했다. 진화하고 나서 들던 혼란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것 같았다. 햇빛을 받아 꽃이 피고 해가 지면 꽃잎을 여미는 몸의 변화에 겨우 익숙해진 것이다. 그러고 나서야 디모넵은 테리가 진화할 준비가 되지 않았었다는 걸 알았다. 포켓몬의 뜻 하나 알아주지 못하는 모자란 트레이너였다.
아직 꽃을 피우고 싶지 않았다. 무엇을 바라고 꽃을 피워야 할지 스스로 알지 못했다.
그러나 변화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찾아왔고 휩쓸렸다. 꽃이 피는 순간 웃는 얼굴이고 싶었는데 웃고 싶지 않았다. ……웃고 싶지 않은데도 웃어야 했다.
사실은 얼마나 울고 싶었는지.
“테리. 약한 게 싫었던 게 아니었어. 그렇지?”
애정이 담긴 트레이너의 속삭임에 테리는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트레이너와 포켓몬은 오랜 시간을 함께했고 그만큼 닮아 있었다. 배틀은 즐겁다. 하지만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이기면 좋지만 진다고 분하지도 않다. 무엇보다도 자신은 작은 열매에 불과하니까. 열매인 스스로가 보일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이는 걸로 충분했다.
다만 불안했던 건 나를 두고 가는 트레이너.
약한 나는 더 이상 당신에게 필요한 존재가 아니게 될까봐. 진화하는 다른 포켓몬들, 크고 강해진 모습, 화려하고 강력한 기술, 그 모습에 디모넵이 기뻐할 때마다 테리는 마음 한구석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내가 당신을 따라갈 수 있을까요? 당신을 따라가도 될까요? 디모넵. 진화하면 따라갈 수 있을까요. 진화해도 쫓아가지 못하면 어쩌죠. 디모넵은 바라요? 내가 진화하는 걸. 나는요.
“내가 너를 조급하게 했어. 미안해.”
테리는 배틀이 싫지 않았다. 패배에 좌절하는 게 아니었다. 그저 저를 두고 불쑥 성장하는 트레이너를 쫓아가기에 조금 숨이 찼다. 그래서 속상했고 심술이 나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랬는데 난 그것도 모르고 네게 어서, 얼른 이리 와. 부르기만 했어.”
괜찮아. 너랑 나랑은 절대 헤어지지 않는걸. 좋아해. 아주 많이 좋아해. 내 소중한 꽃.
꽃이 피기 위해서 열매는 한 번 캄캄한 땅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한참을 웅크리고 견디면 이윽고 싹이 트고 싹이 자라 줄기가 튼튼해진다. 봉오리가 맺히는 건 그 다음이다. 피어나는 건? 조금 더 시간이 걸린다. 꽃의 일생은 피었다 지는 것으로 끝이다.
체리꼬의 일생은 피고 지길 반복한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비가 올 때도 눈이 올 때도 체리꼬의 기쁨을 찾아 햇빛을 모으고 찬란히 피어났다. 그리고 휴식을 취할 때에 잎을 여미고 웅크렸다. 네거티브라니, 꽃잎을 여미는 건 슬픈 일이 아니었다. 낮과 밤에 우열을 두지 않는 것처럼 구분을 둘 뿐이다.
이제야 겨우 테리는 스스로의 뜻으로 잎을 여닫을 수 있게 되었다. 바뀐 몸에 적응했다. 통, 통, 변함없이 조그만 발자국을 남기며 테리는 디모넵이 깜빡한 가방도 모자도 챙겨와 주었다. 무엇에 불안하고 우울했던 걸까 신기할 만큼 지금은 평온했다.
나는 너 없으면 안 되잖아, 테리. 바보야. 어리광을 부려오는 트레이너의 이마를 꿍하고 부딪치며 웃기지 말아요. 하고 답할 만큼.
기쁠 때도 슬플 때도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우린 쭉 함께할 거야. 네가 꽃 피우고 싶을 때 내가 지켜보고 네가 쉬고 싶을 때 안아줄게.
그 두 번째, 테리와 디모넵과 루나톤
디모넵은 출발할 때부터 테리를 품에 안은 채였다. 테리는 몇 번인가 꼼지락거리며 ‘제 발로 걸을래요, 디모넵.’ 하고 의사 표현을 한 것 같지만 디모넵은 테리를 품에서 놓을 수 없었다. 우웅, 테리. 그러지 마. 나 외로워.
테리는 디모넵의 칭얼거림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무서우면 가지 않으면 되잖아요. 하지만 인간의 호기심이란 무엇이라고. 욕심은 또 무엇이라고. 디모넵은 솔룩도 루나톤도 다른 친구들도, 무엇보다 메테노가 보고 싶었다.
반짝반짝한 유성. 우주에서부터 온 신비한 별 포켓몬. 유적과 고대도시가 과거를 헤치고 들춰보는 일이라면 우주는 시간이 아닌 공간을 탐구하는 일이었다. 디모넵의 얄팍한 지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심오한 세계이고 그렇기 때문에 막연한 동경이 더 큰 분야이기도 하다.
아르세우스의 시작은 어디였을까. 아무것도 없는 곳?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면 그 ‘아무것도’를 받쳐줄 공간이 필요하진 않았을까. 아니면 ‘아무것도’란 것은 하나의 점과 같을까. 점에서부터 팽창하는 우주, 팽창하는 세계속에 생명체를 만드는 아르세우스.
“테리, 우주는 역시 창조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아.”
테리는 디모넵의 중얼거림에 ‘에효.’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 옆을 둥실둥실 뒤따르는 루나톤은 디모넵의 말을 이해한 건지 아닌지 속을 알 수 없는 눈동자로 느릿한 공명음을 냈다.
그 세 번째, 테이의 일기
태어나서 며칠을 동굴에 머물고 그 다음 며칠을 도시에서 머물렀다. 혜성시티라고 불리는 도시는 그 이름에 걸맞게 여기도 저기도 반짝반짝 빛이 나고 모든 것이 쏜살같이 바쁘게 지나갔다. 숙소 근처에 있던 커다란 예술극장은 밤낮으로 조명이 반짝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밀물처럼 썰물처럼 오고 갔다. 시내로 가면 꼭대기가 보이지 않을 만큼 높은 건물들이 수두룩했고 길을 걸을 때마다 쇼윈도 너머에 아름다운 것이 많았다.
테이는 트레이너의 품에 안겨서 도시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친구의 집에 방문해 인사를 하기도 했고 아름답다고 소문난 눈꽃호수를 구경했다. 극장에서 연극을 관람하기도 했다. 해본 적 없는 수많은 경험들은 모든 게 새롭기만 한 아이의 눈을 넘치도록 채워주었다.
“그 중에서 뭐가 제일 기억에 남았어, 테이?”
트레이너의 질문에 테이는 눈꺼풀을 느릿하게 껌뻑였다.
‘배틀…….’
테이는 아직 한 번도 배틀을 해본 적이 없었다. 아직 어려서, 라는 배려심 넘치는 이유는 아니었다. 나갈 기회가 없어서, 라고 하는 쪽이 맞겠지.
테이가 나서지 않아도 디모넵의 엔트리에는 이미 쑥쑥 자란 포켓몬들이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아장아장 걸음마를 하는 테이의 옆으로 혼자 러닝을 다녀오는 테마리,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시티를 빙글빙글 돌던 테비, 테이를 챙겨줄 때는 무척이나 상냥하지만 배틀에 나서면 용서 없이 위협적인 테루테루, 트레이너에게 불릴 때마다 테이에게 ‘선배를 잘 보고 있어!’ 으스대는 테토, 마지막으로 누구보다 트레이너의 신뢰를 한몸에 받는 테리까지.
‘저기 내 자리는 없어.’
혜성체육관의 엔트리에 이름이 올랐을 때, 테이는 긴장과 설렘을 느꼈다. 어쩌면 나도 저기 설지 몰라. 혼자 각오도 다졌다. 그러나 제 차례까지 오지 않았다.
아름다운 나인테일을 앞에 둔 마지막 순간, 테마리가 공격을 견디지 못할 거라 생각한 디모넵은 테이의 몬스터볼을 꼭 움켜쥐었다. 디모넵은 기권을 할 생각이었다. 테이에게 패배의 경험부터 가르쳐주고 싶지 않았다. 그 때 테이가 느낀 감각은 배틀을 앞에 둔 흥분감이었다는 것도 모르고.
끝이 갈라진 꼬리를 바싹 세워 몬스터볼의 표면을 두드리며 테이는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디모넵의 다른 포켓몬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나도 저기 서고 싶어. 하지만 제 차례는 오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시합장 위에 서 있던 건 트레이너가 묶어준 자주색 리본을 위풍당당하게 들어 올리는 성원숭이었다. 누가 봐도 이 시합의 주인공은 그였다.
몬스터볼에서 손을 떼고 성원숭을 향해 달려가는 트레이너의 뒷모습을 보며 테이는 ‘다음엔.’, ‘다음 내 차례에는 꼭.’ 어떤 바람을 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