귓속에 물이 찬 것처럼 소리가 먹먹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달리아 씨의 소리를 놓치지 않고 들었다. 도망치고자 한다면 도망칠 수 있었다. 하지 않았다. 체념이었다. 내가 여기서 외면한다 해봤자 변하는 것은 없다는.
도망치고 외면하고 발버둥치고, 모두 제법 힘이 드는 일이다. 필사적으로 눈을 감고 벌벌 떠는 건 많은 체력을 소모했고 우는 일조차 진이 빠졌다. 화르륵 타오르던 불길이 그만큼 빠르게 소진되어 재만 남은지도 몰랐다.
재속을 손가락으로 만지작만지작하다가 피식 웃었다. 숯검댕이인 기분은 여전히 울적하고 할 수만 있다면 더 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온몸의 수분이 쏙 빠져 미라가 되어버리도록 눈물을 짜내며 슬퍼할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미 너무 울어 머리가 아팠다. 두통이라는 건 고통 중에서도 제법 큰 쪽에 속하는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있자니 모든 게 귀찮아졌다.
모든 게 귀찮았다. 달리아 씨가 저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화강돌이 캠프에 있는 것도, 벌벌 떨거나 슬퍼하거나 기대하거나 실망하거나 모든 게 전부 귀찮아졌다. 이대로 캠프를 나올까 하는 충동도 잠시간 들었다. 처음부터 라이지방에 온 목적은 달리아 씨에게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정말 아빠랑 이혼할 거예요? 아빠를, 나를, ……가족을 버릴 거예요? 더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아요?
답을 들었다. 목적을 달성했다. 아직 캠프에 남을 필요가 있을까. 그냥 짐을 싸서, 아무도 모르게……. 아, 기차에 타버렸지. 귀찮네……. 한숨을 훅 내뱉었다. 아무도 없는 침대차의 한 칸을 차지하고 누워서 손에 쥔 딱딱한 조각만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고 그것을 집어던졌다. 던지려 했다. 테리가 말렸다. 결국 힘없이 다시 누웠다. 하염없이 졸리고 피곤했다.
가방 속의 도시락이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테이의 경우,
태어나서 가장 먼저 본 것은 일순 안심하고 이어 죄책감을 느끼던 트레이너의 표정. 그 뒤로 트레이너가 저를 향해 그 표정을 짓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었다.
태어나서 가장 많이 본 건 트레이너의 웃는 얼굴. 잘 웃는 트레이너였다. 방실거리고 양 입꼬리를 한껏 당겨서 환하게. 풀타입의 포켓몬은 늘 태양을 동경하고 햇빛을 사랑한다. 테이에게 트레이너의 미소는 따스하게 제 몸을 적시는 햇살과 같았다.
이름은 디모넵. 풀타입 포켓몬을 좋아해준다. 고스트 타입은 약한 것 같다. 날씨가 좋으면 테리와 테이를 양옆구리에 끼고 광합성을 하러 나간다. 그 때마다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테이의 지식은 대부분이 디모넵의 이야기로 이루어졌다. 디모넵이 말한 꽃, 디모넵이 말한 마을, 디모넵이 말한 포켓몬, 디모넵이 말한……
‘디모넵은 기차에 탈 거라고 했어. 다 같이 도시락을 먹을 거라고 했어.’
‘그 때 디모넵은 웃고 있었어.’
‘지금은 웃지 않아. 왜?’
‘도시락도 먹지 않아. 기차를 보지 않아. 왜?’
태어나서 가장 많이 본 건 트레이너의 웃는 얼굴. 가장 최근에 본 건 하지만 우는 얼굴. 디모넵의 손을 잡고 카페란 곳에 다녀왔다. 다른 포켓몬들은 두고 저만 데려간 일은 처음이라 조금 기뻤다. 의지해주는 것 같았다. 별로 의지가 되지 못한 것 같았다.
트레이너는 자신을 닮은 사람을 앞에 두고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을 지었고, 그 순간에 테이는 완전히 잊혀졌다. 의지가 되지 못했다. 조금 쓸쓸했다. ……그렇구나. 이게 트레이너가 말하던 쓸쓸하단 감정인 걸까.
“테리. 도시락. 모두랑 먹어.”
식으면 맛없으니까.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트레이너가 웅얼거렸다. 테리는 흘끔 트레이너를 보다가 다른 말 없이 이미 식은 도시락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도시락은 전단지의 사진과 똑같이 생겼다. 테이는 디모넵의 말을 기억했다. 포켓몬도 같이 먹을 수 있게 만들었대. 감자샐러드랑 닭튀김이랑 소시지랑 주먹밥이랑……. 테이는 뭐가 제일 좋아? 같이 먹으면서 알려줘.
트레이너는 도시락을 함께 먹지 않았다. 테이는 쓸쓸함을 배웠다.
‘괜찮아요. 자고 일어나면 디모넵은 괜찮아질 거예요.’
‘그걸로 괜찮아?’
‘괜찮지 않아도요. 괜찮아지는 거예요.’
‘괜찮지 않은 것 같아.’
트레이너와 함께 도시락을 먹지 못했다. 테이는 쓸쓸함을 배우고, 이어서 갈망을 배웠다. 나는 좀 더 트레이너에게 힘이 되고 싶어. 의미를 갖고 싶어. 네가 힘들 때 나를 찾아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