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없는 풀, 뿌리내린 나무, 늘 그 자리에 있는 것, 피고 지고 생을 반복하는 것, 인간의 잣대로는 가늠할 수 없는 저마다의 시간을, 삶을 살아가는 사랑스러운 존재들. 아이가 사랑하던 세계.
한없이 따사롭고 안온한 곳, 영원이란 멀리 있는 이름이 아니다. 사철의 변화가 없는 마을과 태어나서 지금까지 머문 화원은 자체로 영원한 것만 같았다. 그곳에 머물 수도 있었다. 고이려는 것이 아니다. 그 땅에서 이루어지는 순환의 일부가 되어도 좋았다. 그럼에도 뛰쳐나온 건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모든 선택에 커다란 의미가 있지는 않다. 갈림길에서 방향을 정하고 발을 내밀기까지 대단한 결심 같은 건 없어도 좋았다. 사소한 계기, 한 번 움직일 힘, 시작은 늘 작은 것에서부터 비롯되었고 일단 출발하고 나면 도리어 멈추기가 요원해질 뿐이다.
타성에 젖어 움직였다.
아이의 챌린지는 그 정도 일이었다. 또래의 친구, 하지만 자신과는 너무나 다른 삶을 살아온 옆자리와 달랐다. 중압감이나 부담감, 저를 몰아세우며 매진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언제든 멈춰도 좋았다. 계기만 있다면 멈출 수 있다고, 그 정도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정도 일이고 싶었다. 의미를 부여하지 않던 것은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 도전에 너무 많은 것을 걸었다가는 잃고 난 뒤가 무서웠다. 저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진지한 사람들을 보며 그처럼 진지할 수 없는 스스로에게는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 마음’은 ‘그 정도 수준’에서 그치고 달성이 끝났다. 다음이 없었다. 「이 길은 막힌 길입니다. 돌아서 가세요.」 말뚝 박힌 길 앞에 우뚝 멈춰 섰다. 분하다고, 속상하다고, 미안하다고, 이로 다 토해낼 수 없는 감정들이 그제야 무너진 댐처럼 쏟아졌다.
나는 무엇이 그리도 서글프고 속상했던 것일까. 우리의 챌린지에서 내가 바라던 것은──,
눈앞의 플라제스는 몇 해를 살아온 것인지 가늠할 수 없는 기품이 있었다. 길게는 수 백 년을 살아가며 화원을 가꾸는 포켓몬. 전설처럼, 동화처럼 아름답고 신비로운 존재. 그 앞에서 첫사랑이라도 마주한 것처럼 두근거렸다. 언젠가 테레지아, 너도 이렇게 자랄 수 있을까? 꼭 키가 크는 게 아니더라도 아름답게, 빛나게.
꿈을 보았다. 향수를 그렸다. 언젠가 나중에, 먼 미래에──. 그렇지만 반드시 말야.
“……어라.”
두 볼을 감싸오는 다정한 손길에 깨닫기보다 앞서 후둑 눈물이 쏟아졌다. 슬프거나 괴로워서, 그런 감정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안도. 문득 시야 가득히 빛무리가 번졌다.
아무것도 잃지 않았어. 조급해 하지 않아도 돼. ‘이 자리에 있으니까.’
두 손에 감싸여 제 아래 선 포켓몬을 보았다. 배틀이 끝나고도 볼로 돌아가는 대신 옆에 서 있던 아이. 옆을 지켜주었던 아이.
「그건 말이야, '여기가 끝이 아니야. 함께 더 나아가자─.' 라는 뜻은 아닐까?」
우리는 아직 작고 힘이 없어서, 미숙하고 부족하기만 해서 지금의 너와 나로는 이 말뚝 너머에 길이 있는지조차도 보이지 않지만…… 꼭 포기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아직은 그렇게 스스로를 용납해주기에는 미안한 감정이 앞섰지만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나면.
“고마워, 제나.”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격려에 아이는 눈물 젖은 뺨을 하고도 힘껏 웃어 보일 수 있었다. 구름이 갤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