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와 헤어지던 그 마지막 날의 이야기예요. 한 명, 한 명 기차에 오르는 걸 보면서 대단히 묘한 기분이었어요. 3개월을 함께한 친구들과 이별인걸요. 아무렇지 않을 수 없었죠. 영영 헤어지는 게 아닌데도 쓸쓸하고 허전하고 섭섭하고…… 한편 오묘한 기분인 건 다른 이유도 있었어요.
불과 일주일 전만 하더라도 저는 기차를 타는 쪽이고 역에 남는 사람들과 손을 흔들어 이별할 거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는데 눈 깜빡하는 사이 뒤집히고 만 위치가 오묘하더라고요. 돌아가지 않는 거예요. 이곳에 남아 앞으로의 시간을 보내는 거죠. 그게, 무어라고도 말 못 할 기분이어서 열차가 점이 되어 보이지 않을 때까지도 한참 그 자리에서 모두를 배웅했어요.
그러고선 막 돌아서는데 마침 보인 거예요. 피칸이. 기차에 타지만 않았을 뿐이지 그 역시 금방이라도 어디론가 떠날 듯한 채비를 하고 있었어요. 아마 피칸만이 아니라 남아 있는 다른 사람들도 각자 자기 가야 할 방향으로 떠나겠죠. 당연한 풍경 가운데 유독 사자의 갈기처럼 마구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한 아이에게 시선이 간 건 이유가 있었어요.
“피칸, 벌써 갈 준비해요?”
“디모-! 헤헤, 그렇슴다.”
물끄러미 눈가부터 살피면 당연하게도 더 이상 붉은 자국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았어요. 그야 그렇겠죠. 지금의 피칸은 ‘보여도 괜찮은’ 상태일 테니까요. 그게 아니라면 이 자리에 있지 않았을 거예요. 제 시선에 피칸은 왜 그러냐는 듯 무구한 표정을 지어 보였는데요. 저는 가타부타 말하는 대신 고개를 내저었어요.
“이제 어디로 가요?”
제 물음에 피칸은 엘리 씨를 배웅하러 갈 예정이라거나 그 다음엔 일단 집에서 한숨 쉴 것 같다거나 다른 지방으로도 물론 갈 거라거나 그 전에 라이지방을 조금 더 돌아볼 계획이라거나 여러 가지를 즐겁게 이야기해주었어요. 그렇게 말하는 표정에는 설렘이나 기대, 들뜸뿐이었고요.
피칸은 늘 그랬던 것 같아요. 언제나 웃는 얼굴밖에 보여주지 않아요. 이 말은 정답이 아닐 거예요. 정확한 말을 고르라면 ‘제 앞에서’ 보여주지 않는 거겠죠.
북새마을에서의 첫 만남을 떠올렸어요. 태어나 처음으로 한 노숙, 며칠을 밖에서 지내다 겨우 도착한 마을의 여관, 문을 열자마자 나뭇결이 한 방향으로 부드럽게 정돈되어 있던 내부는 포근한 지푸라기 냄새와 따스하게 데워진 공기로 맞아주었죠.
그곳에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나타난 친구는 건초로 둘러싸인 듯한 여관 온기와는 다른 열을 갖고 있었어요. 이를 테면 아직 마르지 않은 풀을 뽀송뽀송하게 말려줄 만한 햇살 같은 느낌일까요. 헤이즐 씨와 피칸의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첫인상은 무척이나 에너지틱한, 활발한 또래 친구.
피칸도 여행을 떠나고 싶단 걸 알고는 꼭 우리 캠프에 함께 해주었으면 하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처음 하는 여행은 파트너와 둘이 자기 힘만 가지고 해보고 싶다고 피칸은 답했죠. 그게 아쉬우면서도 조금 우러러보게 되었어요. 저는 아무리 테리가 함께라지만 혼자 여행하는 건 쓸쓸해서 못할 것 같았는데 말이에요!
그 뒤로 종종 경로가 겹쳐서 지켜본 피칸의 모습은 ‘혼자서도 잘 해내는 아이’였어요. 어려운 일은 없는 걸까? 곤란한 건. 정말 뭐든 혼자 괜찮은 걸까? 조금 의아할 정도로 말이죠. 저 같으면 벌써 몇 번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의지하고 아빠에게 우는 소리를 하고 그러다 결국 크게 넘어지고 주저앉았을 수도 있는데 피칸은 혹시 천재라도 되던 걸까요? ──그럴 리 없는데 말이에요.
하지만 물어볼 기회가 없었어요.
아마 그게, 피칸과 제가 나눌 수 있는 선이었던 것 같아요. 저만이 가진 거리는 아니었던 게…… 아쉬움의 하나였어요. 누군가 그 거리를 좁혀주었더라면.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걸어갈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을 거예요. 흔들리고 넘어지고 주저하는 일 없이 올곧게, 그렇게 해야만 보이는 풍경도 있겠죠. 하지만 한 번쯤 넘어졌다면, 주저하느라 타이밍을 놓쳤다면, 흔들려서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면 그제야 비로소 보이는 풍경이 있어요.
꼭 아는 것처럼 말하는데요. 정말 아는걸요. 그 때의 제 곁엔 무너진 저를 지탱해줄 사람들이 곁에 있었어요. 제가 자책하거나 자괴감에 빠지거나 그래서 더는 일어나고 싶지 않을 때에 손 내밀어준 사람들이요.
그런데 피칸은, 아무도 몰래 혼자 울고 돌아오는 거예요.
혼자 울고 혼자 털어내고 혼자 일어나고, 그것들을 나쁘다고 하진 않아요. 어쩌면 누군가는 ‘강하다’고 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저는 그런 피칸을 모른 척하고 혼자 강하게 있도록 두고 싶지 않았어요.
“디모는 앞으로 어떻게 할지 궁금함다!”
“저는 목새마을로 가요. 구체적인 일정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피칸이 서리산맥을 등산할 때 따라갈 정도의 여유는 있지 않을까요?”
피칸은 제가 아주아주 좋아하는 친구이니까요. 조금 더 기대고 의지해주면 좋겠는걸요. 지금처럼요. 같이 가고 싶다는 제 말에 금세 기쁜 표정을 숨기지 않는 친구인데, 어떻게 혼자 두겠어요.
사람들이 저마다 다르다는 건 알아요. 저는 어리광 부리기를 좋아하고 혼자는 외로워서 싫고 누군가 절 필요로 해주면 아주 기뻐지지만 누군가는 저와 다르겠죠. 피칸도요. 다만 그럼에도, 피칸을 지켜보고 응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언제든 혼자가 힘들 때 기댈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주었으면 했어요.
아직 피칸보다 작지만 이런 저라도 피칸을 안아줄 수 있는걸요.
“목새마을에서 새 집을 얻게 되면요. 정원을 꾸미고 싶어요. 넓은 꽃밭을 꾸려서요. 피칸에게 줄 화관을 직접 만들 수 있도록.”
며칠 전에 주었던 꽃은 시들었을까요? 그래서 이번엔 쉽게 시들지 않을 것으로 준비했어요. 프리저브드라고 해서요. 특수한 가공을 한 한 송이 꽃을 반지처럼 엮었어요. 그리고 피칸의 손가락에 끼워주었죠. 이건 약속의 의미예요. 언젠가 멋진 챔피언이 될 피칸에게, 이 한 송이 꽃이 화관이 될 만큼 축하의 꽃을 가꾸며 기다리겠다는.
“정원이 생기면 꼭 초대할게요. 보러 와주세요.”
뭔가 쓰고 싶은 내용은 많았는데(피칸에게 기대는 것도 강함이라는 이야기라거나 패배 뒤에 얻을 수 있는 것이나 여러 격려나 칭찬이나 여타저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