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날이었다. 새벽이슬이 덜 말라 촉촉한 아침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며 에슬리는 그보다 두 계단 앞섰다.
낮이 되면 또 무더워지겠지. 그렇지만 지금은 아직 손을 맞잡기에 딱 좋았다. 높이도 아주 딱.
“계단 위에 뭐가 있을지 난 벌써부터 설레.”
그러니까, 얼마나 더 남았는지 세지 말고. 연인의 눈이 어디로 향하고 무얼 헤아리는지 순식간에 알아차리고 핀잔을 놓으면, 그런 거 아니라고 그는 시치미를 뚝.
그러면 사알짝 흘겨보다가 특별히 넘어가준다고 손만 고쳐 잡았다.
마디가 단단한 손가락 사이로 그보다 작은 손가락이 촘촘히. 온도는 변함없이 따스했다. 당신이, 내가 여기 있다는 증거다. ――단숨에 마음이 들떴다.
“오늘도 분명 즐거운 날이 될 거야.”
우리가 함께하는 것만으로.
두 계단 위의 포니테일이 기분을 따라 경쾌하게 흔들렸다
#.995
마법이 있으면 물 위를 걷는 일조차 어렵지 않다. 그런데도 굳이 곤돌라를 빌리고 노를 쥐는 건 마법으로는 겪을 수 없는 것들을 체험해보기 위해서겠지.
이를 테면 땡볕 더위 아래서 노를 젓는 연인 보기.
시켜놓고 느낀 건데 생각보다 그럴싸했다. 엉거주춤한 자세 대신 허리가 꼿꼿한 게 전직 기사란 걸까. 결코 실망한 건 아니다.
2m는 될 법한 긴 노가 물길을 갈랐다. 상쾌한 소리와 함께 수면 위로 긴 그림자가 일렁인다.
풍경이 예뻤다. 직관적인 감상과 함께 두 발을 곧게 뻗어 물에 담그자 곧장 장난스런 목소리가 들렸다.
“빠지면 안 돼, 에슬리.”
차림이 가볍기는 했다. 소리에 반응하듯 무게중심을 옮기자 당연하게도 배가 왼편으로 쏠렸다. 어어, 하는 소리에 추임새를 넣듯 입꼬리를 히죽 당겼다.
“빠트리는 건?”
돌아온 시선은 사고뭉치 고양이라도 보는 것 같았을까.
소금기 묻어나는 바람이 남쪽에서부터 불어왔다. 은색의 물고기 떼, 작렬하는 한낮의 태양, 바람을 타고 전진하는 쪽배, 배 위에 선 두 명의 유랑자.
물의 도시가 아름다웠다.
#.998
해질녘의 빛이 세상을 포근히 물들였다.
눈이 시리도록 선명했던 여름 낮의 세계는 넘실넘실 차오르는 노을에 물들어 이른 가을처럼 색을 갈아입었다.
하루를 두고 사계절을 다 보냈다. 아침의 봄, 한낮의 여름, 해질녘의 가을, 그리고 밤이 곧 겨울을 부르겠지.
그 전에, 아직 서로의 열이 햇빛 아래 식지 않았을 적에 어서……,
조금 더 가까이.
“눈 안 감아줘?”
등이 따뜻했다. 햇살이 이곳까지 스치고 지난 걸까. 더는 밀려날 곳도 없는 벽을 딛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미세한 눈높이 차이.
라고 하면 그는 미세하지 않은데. 얄밉게 웃겠지만 여기서 고개만 슥 돌려도 닿지 않는다.
“글쎄, 어쩔까~…… 앗.”
그래서 뜸 좀 들여 볼까 했더니, 언제 다가온 거람. 입술이 포개졌다. 조금 달았다. 여기까지 내려오느라 그가 얼마나 엉거주춤하게 또 불편하게 무릎을 굽히고 있을지 따위는 가늠도 못한 채 에슬리는 얌전히 눈을 감았다.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질투하듯 끼어들려다 모자만 건드리고 지나갔다.
#.999
한 손에는 문 닫기 직전의 가게에서 산 간식을 들고 반대 손으로는 당신의 손을 잡았다.
밤공기가 습하게 달라붙었다. 벌레 우는 소리도 들렸다.
예약한 숙소는 꽤 골목진 곳이었고 마력석이 박힌 가로등이 인적 없는 길을 드문드문 밝히고 있었다.
이 도시에서는 별이 잘 보이지 않을 것만 같았다.
역시 늦어도 집으로 돌아갈 걸 그랬나.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먼지를 털어낸 담벼락에 가볍게 걸터앉아 당신을 불렀다.
“루, 이리 와 봐. 이리 와서 손을 잡아줘.”
어디에 있든 어느 곳이든간에 우리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별은 변함없이 빛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사랑도 필히 빛바래는 일 없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기에 오늘에 보이지 않아도 내일은 다시 빛나줄 것이라고 불안해하지 않기로 하며 다만 이처럼 손을 맞잡고 이마를 맞대어 오늘도 오롯이 서로를 눈에 담으며 세상에 꼭 당신만 남은 것처럼 세상이 다 너인 것처럼 빛나는 것이 별이든 가로등이든 중요한 건 그 빛을 통해 내가 보이고 당신이 보인다는 하나의 사실만을 쥐고 나는 어느 여름밤에 또,
당신에게 고백해.
“우리 약속을 하자. 함께 천 번째 밤을 헤아리기로.”
구백구십구 번째 밤을 넘기고 천 번째의 낮과 밤이 올 때까지 함께하자. 사랑한다는 말 대신 영원하자는 말 이상으로 당신에게 주고 싶은 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