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블렛 H. 베리
빛이 켜진다. 조명이 테이블을 비춘다. 머리 위에서부터 일직선으로 내리꽂는 빛. 무대 위의 한곳에 시선을 집중시키기 위함이다. 누군가는 스포트라이트가 익숙했고, 누군가는 아주 조금 몸을 빼고 싶었다. 그럼에도 자리에 남아 2인극을 펼친다.
물론 실제 극은 아니다. 그저 여자의 이미지가 그랬다.
“네 잔에 독을 탔다. ──라고 한다면, 너는 믿을 것인가?”
홍차의 김이 어둠 속에서 촉촉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들려오는 말에 일순 멈추었던 손이 장미잼을 한 스푼 넣어 휘 휘 저었다. 머금자 쌉싸름한 단맛이 입안을 맴돌았다. 그 상태로 시선을 들면 감정의 편린조차 비치지 않는 시린 눈동자가 응시해오고 있었다.
“저를 흔들어서 이득이 없는데도요.”
“이득이 있다면 할 것 같고?”
이어지는 물음에 색이 다른 두 눈이 부드럽게 휘어진다. 그가 무얼 묻고 싶은지야 명확히 알고 있었다. 로블렛 호프 베리의 의도를 읽는 법은 보통 사람과 달랐으나, 이제와 어렵지 않은 것이었다.
“앞선 말을 철회할까요. 저를 흔들어 얻을 게 있었네요. 질문에 대한 제 반응. 그리고…… 그 질문으로 저도 하나 알았어요.”
“호오, 무엇을?”
“당신이 결코 하지 않을 행동을 가정하는 것과 그 가정에 대한 제 반응을 보는 것 중 후자가 이겼군요.”
제게 그럴 마음도 없으면서. 변덕이었을까, 호기심이었을까. 무엇이든 그의 흥을 돋우었겠지. 저를 표본 삼아 봤자 썩 도움은 되지 않을 테지만. 찻잔 안은 어느새 반쯤 줄어 있었다. 독이 있다면 가장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다 해도 좋았다.
“만족스러운 수집이 되었나요, 로블렛?”
두 여자가 나란히 웃었다.
조명이 탁, 소리를 내며 꺼진다. 무대 위에서 테이블과 의자가 사라진다. 이 다음은 1인극이다.
이 세상에 나는 모든 것들은 마땅히 주어지는 자리가 있다. ──고 비에모드 라반둘라는 생각했다. 꽃이 피고 지는 자리, 사슴이 휘청거리는 다리를 세워 달리는 자리,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짊어지는 의무와 책임, 어머니의, 다시 어머니의, 다시 그 위의 어머니의 자리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역할. 숙명. 누구나 자신의 무대를 갖는다.
불이 켜진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흰 장미가 홀로 피었다. 누구도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다.
13살의 아이는 손가락 한마디 분량의 대본을 외웠고 거울 앞에서 표정을 바꾸었고 오로지 저에게로만 내리꽂히는 조명 아래에서 노래했다. 아이를 위해 준비된 자리였다. 서투름은 용납되지 않았다. 그야 아이도 서툴 생각은 없었다. 아이라기엔 뛰어났고 어리다기엔 비상했으며 사람이라기엔 타고난 본능을 억누를 이유를 모르던─그러나 억지로 참아야 했던─순백의 아이는 꽃이었고 새였으며 그러나 인간은 아니었다. 그런 아이만이 갖는 무대가 있었다. 그가 노래한다. 모두가 그에게 찬사를 보낸다.
탁, 불이 꺼졌다.
다음 불이 켜진다. 사방에서 터지는 빛, 조명, 수많은 반짝임. 이 중 그를 찾을 수 있는가?
13살의 아이는 무수한 말과 표정 속의 함의를 읽었고 자신의 생각은 적절히 감추었다. 산란하며 부서지는 빛 아래에서 지나치게 돋보이지도, 휩쓸려 사라지지도 않도록 균형을 유지해 자리를 지켰다. 한 번이라도 그르치면 의자를 빼앗기고 만다. 무대는 아이를 위한 것만이 아니었으니 스스로의 몫을 취해야 했다. 인간이기에 주어진 마땅한 것들을 하나하나 제 손으로 꺾어나가다 보면 즐거움도 기쁨도 줄기가 잘려 시들어갔다. 그렇게 무대에 자신을 맞췄다. 그가 계속해 마모된다. 힘든 줄도 몰랐다
탁, 불이 꺼졌다.
무대가 변한다. 서로 다른 자리에 있던 두 무대가 이어 붙는 순간이다.
서로의 자리가 퍽도 달랐다. 마주할 일이라곤 없을 줄만 알았다. 그런데도 살다 보면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두 배우를 한 자리에 올리는 일도 생기는 법이렷다. 생엔 대본이 없기에 가능했다. 닮은 듯 다른 환경을 거쳤고 다른 환경 속에서도 비슷하게 자란 끝에 필요해진 것. 나를 향하는 빛이 아닌, 내가 향할 빛을 얻길 바랐던가. 어렵게 빙빙 돌려 말했으나 결론은 간결하다. 너는 내 틈을 찾았고, 나는 네 자리에 남고 싶었다. 서로 다른 조각을 지닌 우리는 처음, 이해를 찾았으나 끝에는 이해와 공감을 넘어 동반하게 되었다.
이야기를 돌린다. 비에모드 데지에 라반둘라는 타인을 간파해내는 일이 특기였다. 아주 작은 시선의 움직임, 제스처, 한숨, 표정, 뱉어내는 말의 앞과 뒤를 통해 상대를 이해한다. 그러나 로블렛 호프 베리의 의도를 읽는 법은 보통 사람과 달랐다. 그에게는 진실도 거짓 같았고 거짓마저 진실이 되곤 하니 어떻게 그의 언어를 알아들을까.
사실은 아주 간단하다. 제 말을 경청하는 그에게 비에모드는 입술을 당겨 웃었다.
“당신은 제게 복잡한 방법을 써오지 않으니까요.”
네가 이 말을 꺼냄으로써 내게 얻을 것을 생각하면 어렵지 않게 답이 나온다. 언제나 너는 대단한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러면서 내게는 바라라고 했지. 소중히 대해지고 있던가? 아마도, 아무래도. 네가 내게 그러하듯이.
독이라곤 한 방울 들어가지 않은 찻잔에 재차 온기가 감도는 찻물을 부었다. 가을을 맞이하는 건조한 공기 위로 수증기가 피어오른다. 상념으로 만든 무대의 막을 내린다. 어느새 장미가 다 졌네요. 곧 저 푸른 잎들도 다 떨어져 쓸쓸한 계절이 찾아오고야 말겠지. 계절은 그다지 타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추위는 꺼려졌다. 겨울이 오면 아테레까지 올라오기 힘들어질까.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이, 준비해온 말을 꺼냈다.
“로블렛. 로블렛 베리. ──롯(Rott). 이렇게 불러도 되나요?”
무수히 많은, 그 중의 마침표. 검은 잉크. 점. 의미가 무엇이든 의도는 다른 게 아니었다. 그저 네게 한 걸음 더 다가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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