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딘테그로 : 혁명의 도화선

20. 재의 향

천가유 2021. 10. 24. 21:51

 

: 개인로그

더보기

Q. 이곳은 아무도 없는 흰 방입니다. 당신 혼자뿐입니다. 긴장을 풀고……

A. 흰 방은 싫어요.

의자에 앉지도 못한 채 여자는 그 심상을 거부한다. 단호한 목소리, 여자의 시선은 바닥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그조차도 거부하듯 눈을 감고야 만다. 눈꺼풀이 만들어내는 새까만 풍경으로 도주한다.

안정적인 환경 제공 실패.

 

Q. 지금 기분이 어떠신가요?

A. 모르겠어요.

Q. 좋다거나 싫다거나. 편안하다거나 갑갑하다거나.

A. 좋지도 싫지도 않아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아요.

Q. 정말 싫지 않습니까?

A. ……말하기 피곤해요.

누적된 피로, 대화 거부, 단절. 그녀는 몹시 지친 것 같았다. 최소한의 겉치레까지 포기하고 무력하게 고개를 숙인다. 라벤더 컬러의 머리카락이 비처럼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힘없이, 계속해서. 자신의 기분을 돌아보고 소리 내어 표현할 한 줌 의지조차 잃은 무기력함이 여자를 잠식하고 있었다.

대화를 지속하기 어려움.

 

Q. 그럼 질문을 바꿔보죠. 이야기는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목적한 바를 달성하였습니까?

A. 아마도.

Q. 패배하셨는데도요.

A. 승리도 가치가 없었을 테니까요.

Q. 어째서?

설명하기조차 고되다는 듯, 혹은 지겹다는 듯 여자는 하릴없이 머리카락만 꼬았다. 대화에 응할 마음이 없는 듯 한쪽으로 기울어진 턱끝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길었고 또 피로한 일이었다. 한참을 침묵하는 여자에게서 소리 대신 다른 방식의 답을 청해야 했다.

근본을 파고들자면 애당초 여자에게 신앙이란 무엇이었냐는 질문부터 시작된다. 그녀는 정말 신의 존재를 믿었는가? 글쎄, 그저 오랜 관습을 따랐을 뿐이다. 의심하지 말고 의문도 갖지 않았다.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헌신하고 순종했다. 그것을 나태라고 하기에 그녀는 지나치게 부지런하기도 했다. 오천 년을 이어져 내려온 관습과 법도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에게 더 엄격했고 엄중했다.

당신에게 너그러운 사랑과 자비를.

나에게 한 치 어긋남 없는 잣대를.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해왔던 것일까. 피로 물들어가는 대지를 두고 끊임없이 되물었다. 배운 대로 행하였을 뿐이다. 그 행함이 선한 사회로 이어지길 바랐다. 그릇된 이상이었을까? 이번 새 천 년이 계기가 될 줄 알았다. 병들고 곪은 땅을 정화하여 새로운 반석을 세우고 그 위에 다시금 당신의 영광되는 일이 행해지길 바랐다. 무구한 신뢰였다.

신뢰가 배신당했다.

그곳에 신은 없었다.

맹신은 그 위태로움만큼 깨졌을 때 거꾸로 찌른다. 여자가 바라던 세계는 승리에도 패배에도 없었다. 이런 식으로 그간 쌓아올린 근간이 무너지리라 상상한 적 없었다. 허망했고 아연했다. 목숨을 바칠 가치가 있는가. 의문이 머리를 때렸고 이십육 년이라는 맹신의 무게가 여자를 짓눌렀다. 숨조차 쉬지 못할 부담이었다. 고통이었다.

그러나, 원망도 분노도 불꽃처럼 솟아오르기엔 연료를 필요로 한다. 여자는 이미 태울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피로했다.

 

A. 아무도 이런 곳에서 죽지 않길 바랐어요. ‘아무도란 말은 지키지 못했지만 그래도 제물이라거나 희생이라거나, 그런 말에 쓰이지 않아 다행이에요.

A. 그 하나만으로 버텼으니까.

 

키워드, 책임. 사명.

 

Q. 그게 당신의 목표였습니까?

A. 그래요. 인베스의 뜻을 따르는 게 제 사명이었지만 그것이 제 신념은 되지 못했어요. 하지만 주어진 책임이 있었고, 무엇이라도 붙잡고 버티기 위해 제겐 없는 신념을, 목표를 지닌 인베스의 검들을 제 뜻처럼 수호하고자 했죠.

A. 그들의 돌아올 자리로 남아 틀림없이 기뻤답니다.

100년만 지나도 역사를 잊어버리고 의심하는 게 인간이다. 100년의 10, 거기서 다시 5배를 곱한다. 드래곤에겐 어땠을지 모르나 인간에게는 지독하게 긴 시간이었다. 그 사이 인간들이 만들어낸 종교란, 신앙이란 이미 원시적인 두려움과 경외에서 벗어나 인간을 위해 작동하고 있었다.

그래. 결국 종교도 신앙도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 여자 또한 인간을 위해 있었다. 인간을 위해 쓰였다. 인간을 지켰다. 보란 듯한 성취였다. 제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것으로 마침표를 찍어도 좋다고 하겠다.

A. 하지만 이제 다 끝났어요. 저는 쉬고 싶어요.

 

키워드, 휴식.

 

Q. 어떻게 쉬고 싶죠?

A. 아무도 절 찾지 않는 곳에서, 숨을 죽이고.

 

바닥을 향하던 눈이 허공으로 느릿하게 방향을 바꾼다. 빛을 찾아 고개를 드는 양 싶었으나 초점이 어디에도 맞지 않았다. 문득, 여자가 제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고 웅크린다. 언제부턴가 그랬다. 숨 쉬는 법을 잊었다. 아가미를 잃어버린 물고기처럼 가쁘게 입만 뻥긋였다. 옷 위로 등뼈가 곡선을 그리며 도드라졌다. 자국이 살을 발라낸 날생선 같았다. 곧 죽을 것 같았단 말이다.

그러나 정말 죽을 리는 없었다. 오래지 않아 호흡은 정상을 되찾는다. 아무 일도 없었단 듯 표정을 갈무리하고 습관처럼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곧게 선다.

세상이 여자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된 걸까. 여자에게 세상이 필요하지 않은 걸까. 어느 쪽이든 여자가 그리는 풍경은 그랬다. 캄캄한 방, 커다란 베개를 끌어안고 엎드려 눈 감는다. 불 꺼진 세상에 남은 것이라곤 침묵. 모든 것에서 등을 돌리고 취하는 휴식. 저를 찾는 목소리라곤 전부, 전부 무시한다. 이제 저는 필요 없잖아요. 역할을 다했다. 쓸모를 다했다. 쓰러진 말이 체스판 위에서 치워지듯 여자는 그만 무대에서 내려가고 싶었다.

그곳에 여전히 잔향이 남아 있을까? 누가 그 흔적을 더듬을까. 다만 그 자리에 재가 있었다.

 

'레딘테그로 : 혁명의 도화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22. 마녀와 생쥐  (0) 2021.11.11
21. 스포트라이트  (0) 2021.10.31
19. 운명이 안긴 곳  (0) 2021.10.24
18. 작은 사자를 졸업하는 당신에게  (0) 2021.10.24
~ 이 뒤로 엔딩 후 ~  (0) 2021.1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