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심각하게 경찰청의 수상한 부분이나 지역 간의 격차, 심상치 않은 포켓몬의 움직임 따위로 팍팍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오늘은 그새 서로 맡은 바 역할을 바꾸어 서게 되었다. 세상엔 하나의 일도 하기가 힘들다는데 라이지방의 관장님은 모두 초인인 걸까? 어머니이자 여관의 사장님이자 레인저이면서 보안관이고 체육관 관장까지 하고 있는 헤이즐은 그럼에도 얼굴 한 번 찌푸리는 일이 없었다. 존경스러울 뿐이다.
어느덧 해가 저물었다고 하는데도 다가가기도 전에 녹아버릴 것 같은 체육관의 열기를 느끼며 에셸은 마지막으로 제 포켓몬들의 표정을 한 번씩 살펴보았다.
“그럼 한 번 더 설명할게요. 오늘 우리는 북새체육관에 도전하러 갑니다.”
상대할 관장님은 미세스 볼케이노. 멋진 이름이라 반해버렸다고 몰래 웃으며 초보 트레이너는 포켓몬들에게 차근차근 브리핑을 이어나간다.
“불타입 엑스퍼트 관장님이라고 하세요. 하지만 다른 타입의 기술들도 골고루 배우고 있어서, 우리도 많이 아플 거라 생각해요.”
위키링은 그게 불만인 것 같았다. 같은 불타입, 거기에 격투까지 쓰면 됐지. 물기는 왜 문단 말인가. 오늘 경기에서 제가 나설 자리는 없을 것만 같았다. 저글링은 자기 말랑한 배를 통통 두드리며 믿음직스럽게 준비가 되었다고 했다. 사실 저글링에게 중요한 건 상대가 어떤 기술을 쓰든 마음껏 구를 수 있는 무대였다.
마지막으로 냐미링을 보자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 에셸은 고개를 투욱 꺾었다. 배틀이 하고 싶은지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남의 꿈을 탐내는 이 아이라면 이번에도 헤이즐의 포켓몬들을 잘 재워줄 수 있을까? 기대가 있었다.
“냐미링, 오늘도 배불리 먹고 오면 좋겠지요?”
나지막한 자장가 같은 울음소리에 손을 부빈다. 어제, 스카치의 배틀을 한참 돌려보며 또 직접 이디스의 파인과 대결하며 골몰해 보았지만 확신은 얻을 수 없었다. 이 확신이란 반드시 이긴다는 확신은 물론, 절대 질 거란 확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날 그 날의 컨디션, 포켓몬의 기세, 순간적인 판단과 치밀한 전략. 마지막으로 약간의 운, 여러 가지가 모여 하나의 결과를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우리는 행운의 여신의 가호를 얻기 위해 돋보이는 노력을 할 뿐이다.
“반드시 이기고 오자는 말은 하지 않을게요. 대신, 우리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오기로 해요. 오늘의 경험이 아쉬움으로 남지 않도록.”
지면 분할까? 많이 속상할까? 좀처럼 투지를 가져본 적 없는 그에겐 퍽 낯선 감정이다. 지고 싶지 않아서, 포켓몬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누군가와의 약속을 위해 고뇌에 고뇌를 거듭하는 캠프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다. 루버는 얼마나 고민하는지 이러다 어린 나이에 미간에 골이 새겨질 것만 같기도 했다. 누림마을에서도 느꼈던 열기다.
에셸에게는 그들과 같은 필사적인 마음이 없다. 재미있게도 그래서 더 준비를 소홀할 수 없었다. 혹여나 제 태도가 얕잡아보거나 불성실함으로 보이지 않도록. 이것은 그만의 각오다.
언제나처럼 완벽하게 다림질 된 옷, 깨끗한 장갑, 빠진 곳 없이 묶인 머리카락에 매무새를 다듬고 체육관에 들어선다. 발걸음과 함께 산들산들 불어오던 봄바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화산의 열기에 화르륵, 증발하고 말았다. 대단한 기세다. 한 번 더 감탄하며 에셸은 자세를 단정히 했다. 가장 중요한 건 미소.
“안녕하세요, 헤이즐 관장님. 며칠간 관장님께 많은 가르침을 얻었어요. 오늘은 그 중에서도 챌린저로서, 많은 것을 배워가도록 하겠습니다.”
치맛자락을 쥐고 무릎을 굽힌다. 허리는 숙이되 머리는 너무 떨어지지 않도록. 예의바른 인사를 마친 도전자는 짐짓 어울리지 않게 눈썹에 힘을 주며 기세를 올렸다. 무대 위에 선다면 그 무대에 맞는 모습이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둔치시티의 에셸 달링, 체육관의 온도에 밀리지 않도록 저만의 셸링 포인트를 올려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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