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링과 친밀도 로그
시합이 끝나고 몇 시간이 지나도록 복슝열매처럼 달아오른 뺨이 가라앉지 않았어요. 정말 큰일이죠. 이 열을 어쩌면 좋지, 하고 몬스터볼이 담긴 가방을 꼭 안은 채 그래서 하염없이 걸었답니다. 모두가 잠든 야심한 밤의 들판은 고요하고 바람이 지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어요. 협곡에서부터 부는 차가운 바람이 들판의 풀들을 눕히며 지나갈 때면 사사삭하고 잎사귀 부벼지는 소리와 흔들흔들하게 휘어지는 갈대의 풍경 덕에 어쩌면 루가루암들이 달리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더랍니다.
한참을 긴 호흡과 함께 걷고 나서야 진정이 되었어요. 마침 적당한 곳을 발견해 벤치에 앉아 다리를 쭉 폈죠. 하늘은 새까맣고 맑고 서늘해서, 아까의 체육관에서의 열기가 전부 거짓말만 같았어요. 그래서 다이러리를 펴고 차근차근 오늘의 배틀을 복기해보기로 했답니다.
“그 날 그 날의 컨디션, 포켓몬의 기세, 순간적인 판단과 치밀한 전략. 마지막으로 약간의 운.”
그렇게 되뇌며 들어갔지만 정말 그 말대로 될 줄은 누가 알았을까요.
“이번에야말로 무모하게 부딪치는 게 아니라 침착하게 해보려고 했는데, 결국은 대격돌이었어요.”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 그 말처럼 헤이즐 씨를 따라 뜨겁게 움직여보려고 했지만요. 그 순간의 저는 정말로 평소의 제가 아닌 것처럼 어떤 거대한 열기에 휩쓸려 움직였어요. 이판사판이었죠. 매 순간, 순간이.
“처음에 가디의 위협에 대비해서 교체하는 전법까지는 뜻대로 움직였는데.”
생각보다 더 빗나가던 구르기, 냐오히트가 올 줄 알았는데 나타난 차오꿀, 거기에 또 빗나간 구르기, 에라 모르겠다 하고 시도한 최면술, ……언제 깰까 조마조마했어요. 주먹을 얼마나 쥐었는지 장갑이 주름투성이였죠. 하지만 냐미링은 무려 두 번이나 차오꿀을 버텨주고 무사히 냐오히트까지 무대를 옮겨주었어요.
“사실은 말이죠. 위키링이 냐오히트를 버텨내지 못할 줄 알았더랍니다.”
가방에서 위키링을 내보내자 제 말을 다 들었는지 불만스럽게 저를 툭툭 두드려왔어요. 하지만요, 위키링. 당신은 작고 무른 촛불이고 상대는 당신보다 몇 배나 빠르고 강했는걸요. 당신의 2배도 넘는 냐오히트가 콱 물어버리면, 저는 그대로 당신이 쓰러질 줄로만 알았어요.
바둑을 놓듯이 있는 그대로 공격하는 걸로는 절대 이길 수 없었어요. 그렇다면 불확실한 도박을 해보는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당신은……”
그 이빨을 두 번이나 버틴 것도 모자라서, 이판사판으로 걸었던 도박이 성공하기까지 정말 저는 간절히 인내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위키링만 남은 상황에서 ‘아, 승산은 없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고 냐오히트가 독에 걸린 순간에도 ‘이걸로 이겼다.’ 같은 안심이 들지도 않았죠. 심판의 목소리가 들리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당신이 마지막에 서있던 거 있죠.”
위키링을 벤치에 앉히고 그 앞에 쪼그렸어요. 높이가 맞으니 그 불꽃이 더 잘 보였어요. 아까의 시합장에서도 그랬죠. 화산이 펑펑 터지는 그 붉고 환한 공간에서 제 눈엔 이 불켜미의 빛이 가장 환했어요. 배틀은 즐거운가요? 오랜 저택을 나와 돌아다니는 지금은 만끽하고 있나요? 제 질문에 위키링은 늘 그랬듯 한손을 번쩍 든 채 기운찬 대답을 들려주었어요.
“자양 씨가 그랬어요. 가장 밝게 빛나는 양초였다고. 제 눈에도, 잊지 못할 풍경이었답니다.”
역시 저는 위키링의 불빛이 있으면 어떤 눈부신 광경도 무섭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는 함께 피로슈키를 나눠 먹고 돌아왔어요. 승리 후의 피로슈키는 어떤 만찬보다도 맛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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