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말라카이
싫어한다는 건 반대로 말해 그것이 제 약점임을 시인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언짢음이나 분노로 표현하지 않아도 제 의사와 상관없이 주어진 결핍이 그에게 상처를 만들었으리라는 건 눈에 선히 보였다. 열다섯의 말라카이는 더는 엄마 없는 집이 아니었음에도 여전히 그와 관련해 날선 반응을 숨기지 못하는 것처럼. 어머니가 있고 없고가 중요한 문제가 아닌 걸 테지. 이미 한 번 그의 마음에 깊이 흉을 남기고 만 그것은, 시시때때로 전혀 다른 자극에도 불구하고 부싯돌이 튀기듯 뜨겁고 붉게 소년을 태웠다.
진화鎭火가 필요했다. 너를 상처 입히려 하는 말에 넘어가 스스로를 상처주지 말라고 누군가는 알려주어야 했다. 하늘을 찌를 듯 마구잡이로 쌓인 젠가를 시간을 들여 하나하나 천천히 뽑아줄 손이 필요했다. 그야 인간은 혼자가 아니고, 손이란 많을수록 좋았기에.
한 마디, 한 마디 주제넘은 말이 이어질 때마다 그의 마음에 파란이 이는 것 같았다. 알로라와는 다른 이곳의 바닷물은 얼마나 짰던가? 너를 괴롭히진 않았던가? 세찬 물보라에 휩쓸려 죽죽해지는 낯이 선명했다. 마치 건드려선 안 될 곳을 건드린 것만 같았지. 오만했지. 누구나 상처가 건드려지는 걸 좋아할 리 없는데도.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눈 감고 있는 게 나았을까. 일순 후회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만해도 좋고 주제넘어도 좋으니, 외떨어진 섬 위에서 다른 섬과 접할 줄 모르고 그저 위로, 위로 하염없이 제 마음을 뾰족하게 쌓아올릴 줄만 아는, 그 높이가 저의 마음을 지켜주는 성벽이라도 되는 것처럼 굳게 믿는 소년을 이번에도 다만 안아주고 싶었을 뿐이다. 아마 캠프의 많은 이들이 비슷한 마음일 것이다. 왜? 라고 만일 묻는다면, 순수한 친애이다. 호의였고 정이었다. 네가 마땅히 그럴만한 사람이었다.
익숙해졌으면 했다. 고향과 이곳은 달랐다. 바뀐 환경에, 바뀐 사람들의 손에 쌓아올린 젠가가 하나씩 뽑혀 무너지는 대신 부드럽게 허물어지길 바랐다. 그렇게 네 흉까지 덮이길 바랐다.
울창한 알로라의 자연을 닮은 녹색, 정리될 줄 모르는 성난 갈기 같은 곱슬머리, 깨끗한 자연에서나 보인다는 아름다운 산호색의 눈, 햇빛이 부서져 내린 낯. 자연에서 일부를 똑 떼어온 것처럼 조형된 소년은 잿빛의 도시 풍경과는 참 어울리지 않았다. 그 감상은 두 달이 지나도록 변하지 않아 폭풍처럼 지나간 수많은 일들을 넘어 지금 여전히 인공과 인간이 싫을까. 여전히 사랑받는 일이 낯설까. 아니라면 좋을 텐데, 생각을 한다.
“……너, 남에게 간섭이 심하네.”
그런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었지.
여자는 그가 언젠가 찌르듯 말한 것처럼 넘치는 애정과 호의, 다정 속에서 자랐다. 나약하게 보이면 잡아주었고 손이 가야 할 때에 성가셔하는 일 없이 손이 주어졌다. 무언가를 원하면 그것을 얻는 삶이었다. 물론 그 모든 게 아무런 대가 없이 주어지지야 않았으나─여자에게는 베풀어진 것만큼의 책임이 늘 뒤따랐다─그가 보기엔 복에 겨워도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여자는 받은 만큼 베푸는 것이 당연하고 또 익숙했다. 겨우 그 뿐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지만 여자가 당연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것이 당연하지 않은 소년은 낯설어 했고 때론 거부를 표하기도 했다. 그 거부가 저가 싫은 것은 아님을 알기에 이제 여자는 고민한다.
차가 새 잔에 담겨 온기를 피웠다.
“어떤 방식이, 얼마만큼의 거리가 당신과 제가 서로 납득하고 수용할 수 있는 애정과 호의의 선이 될까요.”
이렇게 물으면 넌 또 뭘 그런 걸 묻느냐고 소년은 펄쩍 뛸지도 모르지. 하지만 여자에겐 퍽 진지한 문제였다. 그렇다고 제가, 저 좋은 방식대로 당신을 껴안아오면 정색한 표정 하고선 ‘누님, 적당히 좀 하시죠.’ 말할 것 아니에요. 저도 제법 참고 있다고요. 사랑할 줄 알면서 사랑받을 줄은 모른다. 자연과 포켓몬에게는 한없이 해박하고 너그럽지만 인간에겐 그렇지 않다. 그래도 다 같은 사람이 아니잖아요. 구별해주면 좋겠어요. 싫어하지 말아주세요. 하고 싶은 말은 이게 다였다.
──정작 당신은 먼저 남을 걱정하기 일쑤면서.
나는 해도 되지만 너는 안 된다고 쩨쩨하게 선을 긋지 말고요. 네? 좀 더 걱정 받고, 좀 더 사랑받고. 당신이 쌓아올린 위태롭고 날카로운 벽이 언젠가 와르르 무너지는 대신 마지막 한 조각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로 정리되어서 벽 대신 소중히 대해주는 사람들의 울타리로, 당신의 세계가 따뜻해지길.
하나를 걱정하게 해줬더니 열을 걱정해버렸지. 그래도 네가 허락해준 틈이었다. 리본 장군은 당당히 그 틈새를 벌리고 안쪽으로 연분홍빛 봄바람을 불어넣어만 갔다.
리본장군이라고 부르던 귀여운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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