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켓몬스터 : 디 이노센트 제로

75) 03.09. 거리조절의 시간

천가유 2022. 5. 1. 11:03

For. 말라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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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한다는 건 반대로 말해 그것이 제 약점임을 시인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언짢음이나 분노로 표현하지 않아도 제 의사와 상관없이 주어진 결핍이 그에게 상처를 만들었으리라는 건 눈에 선히 보였다. 열다섯의 말라카이는 더는 엄마 없는 집이 아니었음에도 여전히 그와 관련해 날선 반응을 숨기지 못하는 것처럼. 어머니가 있고 없고가 중요한 문제가 아닌 걸 테지. 이미 한 번 그의 마음에 깊이 흉을 남기고 만 그것은, 시시때때로 전혀 다른 자극에도 불구하고 부싯돌이 튀기듯 뜨겁고 붉게 소년을 태웠다.

진화鎭火가 필요했다. 너를 상처 입히려 하는 말에 넘어가 스스로를 상처주지 말라고 누군가는 알려주어야 했다. 하늘을 찌를 듯 마구잡이로 쌓인 젠가를 시간을 들여 하나하나 천천히 뽑아줄 손이 필요했다. 그야 인간은 혼자가 아니고, 손이란 많을수록 좋았기에.

한 마디, 한 마디 주제넘은 말이 이어질 때마다 그의 마음에 파란이 이는 것 같았다. 알로라와는 다른 이곳의 바닷물은 얼마나 짰던가? 너를 괴롭히진 않았던가? 세찬 물보라에 휩쓸려 죽죽해지는 낯이 선명했다. 마치 건드려선 안 될 곳을 건드린 것만 같았지. 오만했지. 누구나 상처가 건드려지는 걸 좋아할 리 없는데도.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눈 감고 있는 게 나았을까. 일순 후회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만해도 좋고 주제넘어도 좋으니, 외떨어진 섬 위에서 다른 섬과 접할 줄 모르고 그저 위로, 위로 하염없이 제 마음을 뾰족하게 쌓아올릴 줄만 아는, 그 높이가 저의 마음을 지켜주는 성벽이라도 되는 것처럼 굳게 믿는 소년을 이번에도 다만 안아주고 싶었을 뿐이다. 아마 캠프의 많은 이들이 비슷한 마음일 것이다. ? 라고 만일 묻는다면, 순수한 친애이다. 호의였고 정이었다. 네가 마땅히 그럴만한 사람이었다.

익숙해졌으면 했다. 고향과 이곳은 달랐다. 바뀐 환경에, 바뀐 사람들의 손에 쌓아올린 젠가가 하나씩 뽑혀 무너지는 대신 부드럽게 허물어지길 바랐다. 그렇게 네 흉까지 덮이길 바랐다.

울창한 알로라의 자연을 닮은 녹색, 정리될 줄 모르는 성난 갈기 같은 곱슬머리, 깨끗한 자연에서나 보인다는 아름다운 산호색의 눈, 햇빛이 부서져 내린 낯. 자연에서 일부를 똑 떼어온 것처럼 조형된 소년은 잿빛의 도시 풍경과는 참 어울리지 않았다. 그 감상은 두 달이 지나도록 변하지 않아 폭풍처럼 지나간 수많은 일들을 넘어 지금 여전히 인공과 인간이 싫을까. 여전히 사랑받는 일이 낯설까. 아니라면 좋을 텐데, 생각을 한다.

……, 남에게 간섭이 심하네.”

그런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었지.

여자는 그가 언젠가 찌르듯 말한 것처럼 넘치는 애정과 호의, 다정 속에서 자랐다. 나약하게 보이면 잡아주었고 손이 가야 할 때에 성가셔하는 일 없이 손이 주어졌다. 무언가를 원하면 그것을 얻는 삶이었다. 물론 그 모든 게 아무런 대가 없이 주어지지야 않았으나여자에게는 베풀어진 것만큼의 책임이 늘 뒤따랐다그가 보기엔 복에 겨워도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여자는 받은 만큼 베푸는 것이 당연하고 또 익숙했다. 겨우 그 뿐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지만 여자가 당연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것이 당연하지 않은 소년은 낯설어 했고 때론 거부를 표하기도 했다. 그 거부가 저가 싫은 것은 아님을 알기에 이제 여자는 고민한다.

차가 새 잔에 담겨 온기를 피웠다.

어떤 방식이, 얼마만큼의 거리가 당신과 제가 서로 납득하고 수용할 수 있는 애정과 호의의 선이 될까요.”

이렇게 물으면 넌 또 뭘 그런 걸 묻느냐고 소년은 펄쩍 뛸지도 모르지. 하지만 여자에겐 퍽 진지한 문제였다. 그렇다고 제가, 저 좋은 방식대로 당신을 껴안아오면 정색한 표정 하고선 누님, 적당히 좀 하시죠.’ 말할 것 아니에요. 저도 제법 참고 있다고요. 사랑할 줄 알면서 사랑받을 줄은 모른다. 자연과 포켓몬에게는 한없이 해박하고 너그럽지만 인간에겐 그렇지 않다. 그래도 다 같은 사람이 아니잖아요. 구별해주면 좋겠어요. 싫어하지 말아주세요. 하고 싶은 말은 이게 다였다.

──정작 당신은 먼저 남을 걱정하기 일쑤면서.

나는 해도 되지만 너는 안 된다고 쩨쩨하게 선을 긋지 말고요. ? 좀 더 걱정 받고, 좀 더 사랑받고. 당신이 쌓아올린 위태롭고 날카로운 벽이 언젠가 와르르 무너지는 대신 마지막 한 조각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로 정리되어서 벽 대신 소중히 대해주는 사람들의 울타리로, 당신의 세계가 따뜻해지길.

하나를 걱정하게 해줬더니 열을 걱정해버렸지. 그래도 네가 허락해준 틈이었다. 리본 장군은 당당히 그 틈새를 벌리고 안쪽으로 연분홍빛 봄바람을 불어넣어만 갔다.


리본장군이라고 부르던 귀여운 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