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켓몬스터 : 디 이노센트 제로

76) 03.09. 태엽이 감기는 소리

천가유 2022. 5. 1. 11:07

For.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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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도 함께 이 떨림을 나눠주세요.

계절이 하나쯤 앞서던 때의 어느 날이다. 실로 가볍게 내뱉었던 말이 세 달간의 여정을 관통할 줄은 그 때는 한 치도 몰랐다. 혹시 너의 캐이시는 그 때부터 이 미래를 보았을까? 기억의 태엽이 감기는 소리와 함께 실없는 의문이 느긋하게 흘렀다. 그 사이 보폭을 맞춘 걸음이 손과 나란히 이어졌다.

여전히 쉽지 않았다. 장갑 벗은 손을 보이는 게. 얼핏 스치면 티 나지 않을, 그럼에도 알아보고자 한다면 알아볼 수 있는 그 흉은 무슨 일이 있었다를 숨기지 못하게 했다. 그저 시선만 닿아도 어깨를 움츠렸다. 흉이면서 흠이었지. 그래도 너와 있을 때면 곧잘 벗었다. 손을 잡을 때, 머리를 만지거나 귓가에 닿을 때, 그러다 살짝 눈썹이라도 건드려볼 적에 장갑이 먼저 닿지 않도록. 마주 힘주어오는 손을 조금 더 잘 잡고 싶어서 사소한 부분에 신경을 썼다. 그러고 싶다, 스스로를 위한 선택이었다.

바로 거기부터 가진 않을 건데…… 최종 목적지는 도착하고 나서의 즐거움으로 남겨주시면 안 될까요?”

뺨과 귀에 열이 잔뜩 올라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이끌었다. 22년이 담긴 사랑하는 도시다. 보여주고 싶은 곳이 많았다.

 

홈그라운드는 가는 곳마다 인사하기 바빴다. 그 때마다 제가 여기 온 거, 어머니껜 비밀이에요.’ . 사람들에게 부탁을 하고 다녔다. 사람들이 많은 곳, 북적거리고 시선이 모이는 곳, 견디기 어려워하지 않았나? 혼자 다닐 땐 한 번도 의식하지 않았던 걱정이 들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너를 살폈다. 괜찮아요? 저기, 너무 힘들면 일행이 아닌 척해도 되니까요. 차라리 이 손을 놓을까 고민도 했다.

그러면서도 좋아하는 곳을 소개하는 일은 멈추지 못하고, 졸업한 학교나 자주 들르던 카페, 맛집으로 이름난 레스토랑, 달링의 선박들이 정박한 항구, 그 아래 방파제 난 곳까지 이끌거나 방파제 밑으로 흘끔흘끔 보이는 포켓몬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파도치는 해안선의 벤치에서 잠시 쉬어갈 때는 젤라또도 먹었다. 살비보다 쌀쌀했지만 어느새 그리 춥지만은 않은 바람이 불어오게 된 계절을 따라 좋아하는 맛을 골라보았지.

-저기, 파란지붕으로 된 곳이 달링상회예요.

명함에 적힌 주소는 둔치에서 한눈에 보이는 곳에 있었다. 도망 다니는 처지라 떳떳하게 소개하진 못했다. 지금쯤 제 자리엔 얼마나 많은 일들이 쌓여 있을까. 해본 적 없는 일탈에 가슴이 무척 두근거렸다. 이러다 정말 어머니께 잡히면 뭐라고 변명을 하지. 스푼을 입에 문 채 막막함에 잠기다가도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은 잠시 꾸깃 넣어두었다. 지금은 온전히 너를 위해 쓰는 시간인걸. 네게 집중하고 싶었다.

즐거울 때는 발이 아픈 줄도 몰랐다. 걱정을 숨기고 또 한참을 걸었다. 소중한 고향 풍경에 네가 들어있는 게 신기하고 기분을 들뜨게 했다. 등 뒤로 이어지는 배경이 색을 바꿔가는 동안에도 그 자리에 선 사람은 변함이 없다는 게, 좋았다. 혼자만 떠들진 않았나? 너도 즐거웠어야 하는데. 그러다 어느덧 어둑해지는 하늘, 거리의 가로등이 촘촘히 빛나기 시작해 슬슬 마지막 목적지로 향했다.

오래 기다렸죠? 이제 가볼까요.”

수상할 법도 한 길을 따라 점점 도시를 벗어나 걸었다.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수풀을 헤치고 나자 쓰지 않게 된 낡은 등대가 모습을 나타냈다. 고스트 포켓몬이 나온다는 소문이 돌아 누구도 접근하지 않는,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숲속의 비밀기지였다. 끼이익, 하고 오래된 경첩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녹슨 문을 열고 캄캄한 안쪽을 더듬어 스위치를 올렸다.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알록달록한 꼬마전구들이 내부를 밝혀주었다. 허름한 외관과 달리 안은 꽤 열심히 꾸민 티가 보였다. 바닥엔 양탄자가, 벽에는 태피스트리가, 나름대로 조그만 티 테이블까지 갖춘 아늑한 공간이다.

위키랑과 둘만의 비밀장소였는데, 이제 주노 씨도 알게 됐네요.”

샹델라는 머리 위에서 내가 특별히 허락해주는 거야~ 팔짱을 끼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색과 청색의 빛이 낡은 등대 내부를 환히 빛냈다. 어릴 적엔 티 테이블 근처를 밝히던 작은 촛불이 그 사이 저렇게 커버렸다. 고마워요, 위키링. 너그러운 파트너에게 감사인사를 전하며 어린아이용의 조그만 의자로 네 어깨를 민다. 여기 앉아요, 우리. 대부분이 어린아이용인 덕분에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면 일곱난장이의 집에 머무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 창밖이 바로 보였다.

여러 이유가 있었는데요. 이곳을 좋아하는 장소로, 비밀기지로 삼게 된 것. 그 중 하나가…… 항구가 보여서 그랬어요.”

도시에서 조금 벗어난 낡은 등대의 창 너머는 검은 바다와 항구의 빛만을 담고 있었다. 유리창으로 번지는 빛을 지켜보며 테이블에 놓인 상자의 태엽을 돌렸다. 얇은 철판이 느긋하게 회전한다. 그 때마다 톡, 톡 철판을 두드리며 오르골 소리가 흘렀다. 티테이블을 채우는 낭만을 따라 기억은 또 다시 몇 개인가의 마을을 거슬러 올랐다.

「……왜 그랬는지는 안 물어봐요?

알고, 위로해 드리고 싶은데……. 말씀하시고 싶다면, 그 때, 기다릴게요.

그 때 물어봤더라도 답해주었겠지. 또 대단치 않은 것처럼, 이제 다 괜찮은 것처럼. 소리 내 말하다 보면 정말 그런 것처럼 스스로 믿었을지도 모른다. 그랬을 테지만네가 준 시간에 감사한다. 지금이라면 그 때보다 조금 더 괜찮게 말할 것 같았다. 흉이 보이는 손등을 창에 얹었다. 동그랗고 작은 창의 딱 반이 가려졌다. 그러면 빛도 반절이 되었다.

소곤거림이 뒤따랐다. 저기, 두 번째인가 세 번째 즈음의 자리에서 선박이 폭발하는 사고가 있었어요. 16년 전에요. 벌써 한참 옛날이죠. 그 자리에 제가 있었고, 또 어머니가 있었고. 빛이 아주 눈부셨고 폭발 소리가 끔찍이 컸고. 그래서…… ……느릿하게 이어지던 설명의 마지막은 언제나처럼 이제는 괜찮아요.’로 끝마치지 않았다. 손등의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종이가 타들어간 자국처럼 희미하게 번진 흉터를 침묵 속에서 응시할 뿐이었다. 지금도 장갑은 쉬이 포기하지 못한다.

여긴 등대의 빛이 무서워서 빛이 닿지 않는 곳을 찾다가 발견했어요. 한창 배를 쳐다보지 못할 땐 창문을 꽁꽁 숨겨서 닫아두었는데 조금씩 배가 무섭지 않아지면서 이 작은 창으로 보이는 배나 바다 구경을 하곤 했죠. 광활하게 펼쳐진 풍경은 아득하게 두려울 때가 있었는데 조그맣게 볼 때면 그만큼 두려움도 줄어드는 것만 같아서요.”

그래도 지금은 배에 직접 탈 정도로 나아졌어요. 첫 시도는 위기의 순간에 솟아나는 괴력에 가까운 것이었으나 한 번이 어렵지. 두 번, 세 번 못할 것도 없는 자신감이 있었다. 씩씩하게 웃어 보이기도 했다. 거기까지 이야기를 마칠 즈음엔 이제 괜찮다는 말이 자연스레 뒤따랐다. 신기하지. 괜찮지 않음을 말해서 괜찮아지다니.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데려온 건 아니었는데, 여기까지 오자 자연스럽게 꺼내고 말았다. 다 지난 이야기를 해버린 건 아닐까 하는 아차 싶은 한편, 많이 알아가는 건 좋은 일이라고 해주던 네 말에 또 기대버렸다. 우물쭈물 하다 이번엔 제가 좋아하는 차를 대접했다. 잘 건조시킨 홍차잎에 이국의 꽃과 과일향을 더해 첫 향기는 달콤한 베리향이, 이어서 섬세한 꽃향기가 뒤따르는 섬세하고 우아하면서 상큼한 차다. 찻잔을 비울 즈음에는 아릿한 꽃향기의 잔향이 남았지.

그 사이 오르골의 태엽이 한 바퀴 다 돌았다. 새로이 태엽을 감기 위해 손을 뻗다가 문득 네 반응을 살폈다. 함께 떨림을 나누기에 이곳은 마땅한 곳이었을까. 제게는 익숙함에서부터 오는 편안함이 우선인 공간이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이 장소에 대한 떨림이나 설렘을 기억하려면 오직 이곳에 나타난 전에 없는 낯섦을 통해서다. 이를 테면 불켜미가 앉던 자리에 앉은 낯선 청년이라거나, 주전자의 온도가 식어가면서 더 선명해지는 두 사람분의 체온이라거나, 생각보다 공간이 넓지 않다는 깨달음이나 제법 대범하게 굴었을까? 하는 자각 따위다.

이제 어쩌면 좋지? 의 난처함은 긴장과 함께 덤처럼 뒤따랐다. 갑자기 모든 게 어색해지려 할 때, 타이밍 좋게 낭만이 빚어낸 마법을 깨트리듯 손목의 워치가 울렸다. 발신인의 이름이 마치 자정을 알리는 요정 할머니처럼 보였다. 이 다음은 피할 수 없는 숙명뿐일까. 벌써부터 한숨 쉬지 않도록 조심하며 워치를 껐다. 오르골 소리마저 멎어 공간은 적막뿐이었다. 이제 가장 중요한 순간을 앞두고 있었다. 할 일 리스트에 제일 먼저 적혔던 약속, 과연 그 점수는.

괜찮았나요? 오늘.”

서운하지 않을 만큼 즐거운 시간이 되었을까요? 기대와 걱정을 담아 건너편을 응시하면 알록달록한 꼬마전구의 빛 사이로 네가 있었다.


네네, 저 데이트 했어요. 약간 이즈음부터였던 것 같지. 고록?-답록?-답록의답록?-둘이사겨?-아직아냐? 하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