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리포트:: 향긋한 한 잔
허브티 카페가 마칠 시간이 되어서야 조심스럽게 문을 밀고 들어갔어요. 그리운 차임 소리와 함께 내부를 정리하던 벤더 씨는, 마치 제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웃으며 반겨주시더라고요.
“어서 오시지요, 에셸 양.”
“제가 올 걸 미리 아셨나요?”
포켓몬들의 안내를 따라 앉으면 이미 티포트까지도 준비가 되어 있지 뭐예요. 아이참, 이러면 안 되는데. 오늘은 제가 대접해드리러 온 건걸요. 카페의 주인에게 되려 앉아 있으라는 부탁을 하고 허리에 손을 올려 보아요. 자, 다즐링. 우리 소중한 분께 기억에 남을 한 잔을 대접해볼까요.
“저보다 앞서서 찾아온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에요.”
아무래도~ 모두 초보이던 시절에 벤더 씨에게 많은 가르침을 얻기도 했고. 이후에도 뒤늦은 첫걸음을 하려는 분들 모두 벤더 씨를 찾아가곤 했고. 라이지방의 짐 리더 분들은 하나같이 훌륭한 분들이지만, 캠프의 스승이 있다면 당신이 아니었을까요.
재잘재잘, 고요한 카페를 경쾌한 목소리로 채우며 분홍색의 포트데스와 함께 유려한 움직임으로 특별한 한 잔을 준비했어요. 오늘의 차는 ‘달링 블렌딩 애프터 나이트 에디션’, 저의 성장을 보여주듯 깊고 원숙한 맛이 우러나오는 홍차랍니다. 감사한 스승에게 차를 대접하며 느긋하게 그의 맞은편에 앉아 홍차의 향기를 따라서 기억을 더듬어 올랐어요. 그 때도 이렇게 영업을 마친 카페에서 모였었지.
“누림마을에서 캠프가 출발할 때만 해도 아직 싹도 보이지 않는 땅 아래의 씨앗이었어요. 어떤 꽃으로 피어날지 저조차도 감이 오지 않을 그 때, 제 첫 싹을 봐주신 상대가 벤더 씨였답니다.”
배틀 코트에 오를 때만 해도 막연하게, ‘도전할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라는 마음뿐이었어요. 과감하고 또 매섭게. 사실 그 때는 아직, 숫된 치기가 더 컸어요. 정돈되고 다듬어지지 않았죠. 패배한 경험이 없던 제게 모든 일은 순풍처럼 잘 풀리기만 할 줄 알았고 필사적인 마음도 몰랐죠.
그래놓고 정말 이겨버렸잖아요. 드라마틱한 패배와 성장의 서사가 있던 건 그러니까, 아니지만요. 오히려 그게 저답고 좋지 않던가요? 그곳조차도 제게는 현실이었던 거예요. 물 흐르듯, 봄바람이 지나듯 부드러우면서도 틀림없이 움직여나가던.
그럼에도 틀림없이 많은 것을 배웠어요. 아주 중요한 것을 얻었어요.
“즐거움. 그리고 저다움.”
침착하면서도 과감하게. 사실은 제게 그런 저돌적인 면이 있는지조차 몰랐는데 당신의 말 덕분에 ‘그렇구나. 저는 제법 저돌적이고 과감한 사람이었어요.’ 그렇게 새로운 정의를 갖게 되었어요. 그 뒤로 용기를 내야만 하는 순간에 매번 벤더 씨의 말을 떠올렸어요.
“팔름 씨에게 엄청 많이 고생했거든요~”
터레인 배지를 보여주면서 잠깐 우는 소리를 하기도 했더랍니다. 당신이 말해준 과감함을 잃어버리고 내내 소극적인 지시만 내렸죠. 4번 중 한 번은 침착함마저 잃어서 정말 엉망이었는데. 그렇게 고착화를 겪으면서 한참 생각했어요. 어떻게 해야 저다움을 찾아 배틀에 임할 수 있을까.
“그럴 때 당신이 제게 준 선물을 떠올렸어요.”
당신이 제게 준 귀한 말들을요. 덕분에 다시금 일어날 수 있었답니다. 아, 물론 헤이즐 씨나 로렐 씨에게도 비슷하고 또 중요한 것들을 많이 배웠어요, 그 말도 꼬옥 전해주셔야 해요.
“사실 다른 관장님들께도 많은 것을 배워서 누구 한 분만 찾아오기 어려웠지만 오늘 벤더 씨를 찾아오게 된 건, 배틀만이 아니라 또 한 가지 중요한 걸 당신에게 배웠기 때문이에요.”
카페와 체육관, 그리고 과수원까지 여러 일을 병행해 소화해내는 법. 캠프 초반의 저에게는 정말 숨 막히도록 힘들었거든요. ──물론 지금도 힘들긴 해요. 솔직하게 덧붙이며 웃었어요. 그 때 당신이 들려준, 시간이 필요하다는 조언과 저만의 호흡을 찾아야 한다는 것. 그 말을 또 오랫동안 생각하고 곱씹었어요.
“어느 쪽도 포기하고 싶지 않으니까, 욕심내고 싶었으니까요. 그래서 지금은…….”
아직도 조금 힘들고 벅차긴 하지만, 제 호흡을 찾기 위해 휴식을 취할 줄도 알고 제법 적응한 것 같아요. 그 사이 부드럽게 단련된 표정을 하고 차를 한 모금 마셨어요. 다즐링의 차는 정말 맛있죠?
“휴식을 취하려 할 때면 같이 호흡을 맞춰주며 어울려주는 분들도 계셔서, 이대로 잘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을 얻었답니다.”
오늘은 이런저런 보고를 드리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어느새 한참 길어진 이야기를 슬슬 마무리하며 마지막으로, 벤더 씨에게 화분에 리본이 묶인 배지를 선물해드렸어요. 이건, 스승님께 드리는 제 마음이랍니다.
“다시 한 번 머리 숙여 인사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벤더 씨. 앞으로도 당신이 이곳에서…… 수많은 새싹들의 시작을 도와주길 기대하고 있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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