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파피루스
『캠프도 슬슬 막바지인걸. 이 캠프가 끝나기 전에, 지나온 흔적을 따라서 의미를 남겼던 상대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눠보는 건 어때?』
언제였더라. 포켓몬 리그를 앞두고 정말 여정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캠프의 인솔자 파피루스가 그런 말을 꺼냈다. 그의 말에 캠프 사람들은 저마다 찾아갈 상대를 떠올렸다. 의미 깊은 상대는 아주 많았고, 각각에 특별한 추억들도 있었다. 각자 떠오른 사람과의 일화를 이야기하며 꽃피우는 동안 에셸은 가장 먼저 ‘그’를 떠올렸다.
「파피루스 님을 상대로 찾아가면 안 되나요?」
「응? 나는 찾아오지 않아도 늘 여기 있는걸!」
늘 거기 있고말고요. 저희의 시작과 끝에 서 있는 사람인걸요. 그래서다. 에셸에게 이 트레이너 캠프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었다.
「내가 바라던 게 그거야. 모두 에셸처럼 특별한 기분을 느끼면 좋겠네.」
캠프가 시작하던 첫 마을에서 나누었던 대화가 에셸에게는 약속과 같았다. 절대로 특별한 기분의 연속일 거예요. 저도, 캠프 사람들 모두도. 그리고 약속은 훌륭히 지켜졌다. 22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느껴본 적 없던 아드레날린 대분비의 순간! 현실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던, 마치 하늘을 걷는 것만 같던 부유감까지.
처음에는 오히려 그 부유감이 두렵기도 했다. 정말 꿈속을 거니는 것만 같아.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제 발로 걷고 땀흘리고 노력하는 사이 기묘한 비현실감은 벗겨지고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기적 같은 현실이구나. 느끼게 되었다. 이제껏 보내온 시간들이 가짜라는 뜻은 아니었으나, 말로 채 다 표현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달랐다. 전부 파피루스 덕분이다.
“그래서 찾아와버렸어요~…… 후후. 곧 누림마을에 다녀올 거예요. 그 전에 잠깐 인사만 하려고요.”
당신을 찾아올 때까지만 해도 캠프의 인솔자에게 드리는 감사인사였는데. 정말 챔피언이라니 너무하지 않아요? 뭐, 하지만… 서프라이즈 정보는 차치해둘게요. 제가 대화하려는 상대는 포켓몬 레인저이자 제 동경의 대상, 캠프의 리더 파피루스 님이니까.
처음 의뢰를 받을 당시에는 트레이너 캠프 내의 사람은 빼고─라고 했으니까. 엄연히 캠프의 일원인 그를 찾아오는 건 반칙이라고 생각했다. 설마 그 사이에 그의 얼굴을 캠프 바깥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으나. 어느 쪽이든 캠프가 정말 막을 내리기 이전에 그를 보고 인사하고 싶었다. 다시금 네 앞에 선 저는, 과거와 비교해 얼마나 달라지고 성장했을까?
“트레이너 캠프의 여정을 담는 리포트를 적는다면, 당신을 빼놓을 수가 없었거든요. 제가 캠프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어주었고 캠프가 시작한 뒤에는 벅차오르는 두근거림과 로망을 안겨주었어요. 캠프가 움직이는 내내 가장 앞에서 즐거워하는 당신의 모습이 좋았어요.”
그래서 저도 내내 즐거울 줄만 알았죠. 무역풍을 등에 업고 두둥실 움직이던 이 아가씨는 놀랍게도 이제껏 한 번도 실패하고 패배한 경험이 없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라고 하면 물론 실수하고 실패하고 넘어지고 일어나는 경험이 0에 수렴할 것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벽에 부딪친다는 감각은 없었다.
모든 것이 순풍이었다. 그것은 에셸에게── 모든 것이 다 제 뜻처럼 움직이는 듯한 기묘한 비현실감을 안겨주곤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3번의 체육관 도전을 모두 약간의 운이 따라 승리하면서 후와링에게 안겨 하늘을 나는 듯한 감각에 빠지기도 했었다.
그러다 처음으로 맞이한 벽이 너무 높았다. 연이은 패배를 경험하면서 에셸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민했다. 더 도전하는 게 미련한 일이 되진 않을까. 여기서 도전을 멈추고 다른 곳에 힘을 쏟는 게 생산적이고 합리적이진 않을까. 무엇이 더 영리한 선택일까. 그런 고민을 하다가…… 그럼에도 역시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이대로 돌아갔다간 마음이 후련하지 않을 것만 같아서 다시 한 번 도전자에 이름을 적었다. 그리고 결과는 멋지게, 노력 끝에 벽을 넘어서도록 했지.
“그동안에 가장 앞에서 응원해주고, 위로해주고, 격려해주고. 누구 하나 낙오되는 일 없도록 한 사람, 한 사람을 지켜봐주었죠. 파피루스 님의 인솔이 있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챔피언 리그에 들어와서 그가 해주었던 말을 하나하나 기억한다. 지금에 와서 곱씹으면 역시, 자신에게 도전해올 인재양성을 하고 싶었던 걸까 짓궂은 생각도 들지만, 그가 해준 말의 진심을 의심하진 않는다.
「난 에셸도 포켓몬 트레이너로서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계속 도전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네.」
「에셸은 더 강해져서 포켓몬들과 성장할 거야.」
기대와 확신은 언제나 에셸의 힘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온전히 스스로에게서만 나오지 않는다. 파피루스가 말해주었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다. 당신이 챔피언이어도 레인저여도 어떤 유명인사여도 그저 카레 괴인이어도, 저에게 당신을 가장 먼저 소개하라면── 캠프의 동료, 일 거예요.
“제 트레이너로서의 능력을 믿어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멋진 캠프를 열어주신 것도요.”
누림의 드넓은 평야와 언덕을 바라보던 눈은 이제 챔피언리그의 지붕 너머를 응시하고 있었다. 다음에는, 관중이 아니라 도전자로서 저기 서고 싶어요. 그 때에 당신이 기다리는 곳까지 오를 수 있을까요? 그 생각을 살짝 전하며 웃는다.
“그럼 당신에게 인사를 마쳤으니까 다음은 캠프 바깥에 감사 인사를 전하고 올게요.”
그리고 다음에는요. 더는 동경하는 먼 발치의 파피루스 님이 아니라 좋아하는 캠프의 일원 파피루스 씨에게 인사할게요.
다 써놓고 줄 타이밍 재는데 파피루스 챔피언인 게 밝혀져서 후다닥 조금 수정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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