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주노
살비마을 의뢰:: 바닷가의 해무기
“으응~…… 살비는 오늘도 날씨가 좋네요.”
택시에서 내리면 자연스럽게 한쪽 팔이 하늘을 향해 쭉 뻗었다. 구름까지 닿을 듯 기지개를 켠다. 크루즈의 분위기를 내기 위해 입었던 의상은 라이지방의 최남단에 위치한 살비마을에서도 위화감 없이 어울렸다. 따뜻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따라 치맛자락이 물결치듯 나풀거렸다. 걸음이 들뜬 탓일까? 밤이었다면 풍경에 녹아들었을지도 모를 치마가 쨍쨍한 햇살 아래에선 선명한 자색을 뽐내며 지느러미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복장에서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장갑을 끼지 않은 점이다. 손목에 리본 장식만 남아 있었다. 장갑채로는 손을 잡을 수 없는걸요. 굳이 이유를 말하진 않았으나 두 손이 그의 손 하나를 잡아서는 뒷걸음으로 앞장서 걸었다. 또각거리는 경쾌한 발소리에 에셸은 금세 인정했다. 들뜬 게 맞는 모양이다. 오늘도 캠프의 챌린저들은 챔피언 로드에 오를 준비도 심각하고 진지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텐데 여기서 저희만 농땡이를 피우는 것 같아서 더욱, 나쁜 짓이라도 하는 꼬마마냥 웃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잊지 못할 살비의 바다다. 로맨틱한 순간이 낮과 밤의 순서를 바꾸어 연속되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러리라고 기대해버리는 것도 어쩔 수 없는──까지 생각하다가 제 뺨을 챱챱 두드렸다. 오늘은, 일하러 온 거예요! 놀러 온 게 아니라, 아닌데…… 트레이너를 따라가던 위키링이 에효. 한숨을 쉰다. 왜 한숨이에요. 에셸은 시치미와 함께 화제를 돌렸다.
“의뢰는 브리더 씨에게 받아야 하죠? 그러고 보니 일일 보모 일도 하러 온다고 하고, 브리더에 관한 공부, 본격적으로 해보기로 했나요?”
“보, 보모 일… 해…보고, ……감을 잡을 수 있으면… 좋을 것 같고. …역시… 해, 보고… 싶어서요. 어울리는 일일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렇구나. 당신도 좋아하는 일을 계속 찾아가고 있구나. 이곳에 와서 포켓몬 배틀도, 야생포켓몬 탐색도, 육성까지도. 재미를 붙여가는 걸 옆에서 지켜보았다. 왜 미리 생각하지 못했을까 싶을 만큼 브리더는 그와 잘 어울렸다. 요리도 잘한다고 하고─에셸은 먹어본 적 없지만. 궁금해라.─포켓몬을 돌보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애정과 끈기가 그에겐 있다. 주노 자신은 꾸준함이나 끈기를 이야기할 때 스스로를 모르는 듯한 얼굴을 했지만 에셸이 보기에 그는 노력가였고, 쉽게 포기하지 않는 기질이 있었다. 달라진 걸까, 발전할 걸까. 적어도 에셸이 아는 한 주노는 도망친 적이 없었다.
“무척 어울리는걸요. 잘할 거예요.”
때문에 대답은 화창한 날씨만큼이나 망설임 없이 맑게 나왔다. 그래도 주노 씨의 허브티 카페도 궁금했는데~ 나중에 그쪽도 권해볼까? 상대를 두고 생각이 또 부풀어나간다.
브리더에게 커다란 바구니를 받아 바구니에 해무기를 차례차례 담아갔다. 멀리 던지는 것도 한 번 해보기는 했지만, 힘껏 던졌더니 저 얕은 바다에 퐁당, 소리를 내며 빠져서는 두세 번 왔다 갔다 한 사이에 그대로 모래밭에 굴러 돌아온 해무기와 재회해야만 했다. 그래도 전부 돌아오진 않던데~ 주노가 몰래 다시 던져준 건 꿈에도 모르고. 던져서 보내주길 포기하고 얌전히 처음 작전대로 먼 바다까지 헤엄쳐 거기 해무기를 방생해주기로 한다.
“주노 씨 쪽은 어떤가요?”
그는 얼마나 잘 던지려나. 바구니가 묵직해지면 후와링에게 부탁하고선 한참 구부렸던 허리를 쭉 폈다. 그리고는 오, 멋진 포물선에 박수를 쳐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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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물에 들어가기 전에 준비운동부터 할게요.”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볕 좋은 바닷가에 섰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걸 위해 에셸은 어제 바쁘게 여러 영상들을 찾아보았다. 물에 들어가기 전에 준비운동, 비상시의 안전사항, 수영하는 법……. 수영을 배운 건 너무 어릴 적이고 이제는 몸의 기억을 따라갈 뿐이다. 공부가 필요했다. 가르쳐준다고 먼저 말해놓고 허술하게 가르쳐줄 수도 없고, 준비운동부터 상당히 체계적인 과정이 있다는 걸 알게 되자 제법 다급해졌지. 미리 순서를 맞춰둔 영상을 따라서 상대에게 일러주는 모양새는, 누가 봐도 벼락치기로 공부한 티가 나는 엉성한 것이었으나.
“중요한 건 물의 흐름에 저항하지 않는 거라고 해요. 너무 긴장하지 말고 편안하게. 후후, 혹시 빠지더라도 멜로도 있고~ 프릴링이나 하가링도 있으니까요.”
정말 다급하면 카리도 구해주지 않으려나? 든든한 믿음과 함께 영상과 함께 이론 강의를 얼추 마무리 한다. 본격적으로 물에 들어갈 차례였다.
나란히 신발을 벗어두고 하얀 포말이 이는 모래밭 위로 발자국을 꾹꾹 남겨가며 걸었다. 한낮의 바닷가는 밤바다와는 또 전혀 다른 감상을 안겨주었다. 모든 것이 선명했고 그래서 무엇 하나 빠짐없이 또렷이 시야에 담겼다. 바다는 한없이 넓은데 둥근 수평선이 아주 가까운 것도 같았고 파도가 밀려들 때마다 그 아래 뽀글거리는 수많은 살아 숨 쉬는 생과 맞닿았다. 경이로웠고 순수한 감탄이 터졌다.
눈부신 햇살이 어깨를 따뜻하게 감싸고 지열을 따라 아직은 미지근한 바닷물에 살금살금 발부터 적셨다. 발가락 틈을 파고드는 물결에 잔웃음이 터졌다. 웃음을 따라 윤슬이 일렁였다. 천천히 들어가 보기로 해요. 막 걸음마를 떼는 것처럼 느긋하게, 이미 파도를 탈 준비가 만만인 포켓몬들에 조금은 의지해가면서 이윽고 발 닿지 않는 곳까지 헤엄쳐 나갔다.
이 다음은 본격적으로 자세를 잡아주고 가르쳐주어야 했으나 사실 에셸은 수영을 잘하느냐, 좋아하느냐 라고 물으면 그건 아니었다. 좋아하는 건 물속과, 물에 둥둥 떠서 느긋한 시간을 보내는 것. 파도를 가르고 헤엄치거나 100m 레일을 몇 바퀴나 오가거나 하는 것과는 달랐다. 이래서야 좋은 수영 선생님이 될 수 있을까? 차라리 멜로에게 배우는 게 더 효과적일지도.
그래도 처음에는 열심히 발장구 치는 법이나 팔을 움직이는 법이나, “여기. 팔꿈치를 이렇게 들고서요.” 자세를 교정해주며 성실히 일러주었으나 종국에는 가져온 킥판-에셸 것은 코산호 모양이다-에 매달린 채 둥둥 뜨는 것으로 만족하고 말았다. 옆으로는 해무기가 담긴 바구니가 같이 떠다니고 있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볼까요?”
다음 단계가 있어요? 같은 눈을 한 그에게 언제 준비한 건지 깜짝 놀래듯 물안경을 건네주었다. 해무기를 놓아주어야죠. 지금부터는 물속에 들어갈 거예요. 잘 썼는지 확인하며 젖은 머리를 넘겨준다. 너무 겁먹지 말고, 걱정하지 말고. 천천히 같이 내려가 봐요. 숨을 크게 마셨다. 가슴이 부풀었다. 그리고 천천히, 물 아래로 가라앉았다.
-살비의 바다는 따뜻해서 해저가 아주 아름답다고 하잖아요. 코산호나 맘복치나 사랑동이나, 진주몽부터 시작해 다양한 포켓몬들이 이 따뜻하고 풍요로운 곳에서 살아가고 있어요.
뽀글뽀글, 공기방울이 피어오르며 느릿하게 설명을 이었다. 물속 깊이 헤엄치는 두 사람을 프릴링과 멜로가 옆에서 도왔다. 두 포켓몬 모두 살비 출신이라 그런지 고향의 깊은 바다가 반가워보였다. 투명한 물살을 가르는 새하얀 쥬레곤의 지느러미가 아름다웠다. 둔치의 바다도 싫지 않았던 모양이지만 이 따뜻한 살비 바다가 더 좋은지, 탱탱겔 또한 프릴 같은 손발을 흔들거리며 즐거움을 뽐내고 있었다. 주노가 걱정하던 것에 비해 심해 8000m 스윗홈으로 당장 데려갈 것도 아닌 것 같았다─그야 프릴링은 어제 새 타깃을 찾았다─.
어디쯤 해무기를 놓아두면 안전하려나. 물론 완벽하게 안전한 곳이야 없겠지. 바다는 끊임없이 커다란 호흡을 이어나가니까. 우리가 아무리 꽁꽁 놓아둔다 해도 빠르냐 늦냐의 차이일 테지만, 그래도. 가장 좋은 자리를 찾아 돌을 움직이다가 크랩과 눈이 마주치기도 하고, 대포무노를 피해 도망치기도 하고, 아름다운 산호를 발견해 이리 와 봐요. 함께 사진으로는 남기지 못할 풍경을 구경하였다.
바구니 안의 해무기들을 다 마땅한 장소에 놓아준 뒤에는 다시 올라가는 일만 남게 되었다. 물결이 나른하게 몸을 감쌌다. 손발의 힘을 풀고 누우면 자연히 떠오를까? 물안경 너머로 그물처럼 퍼진 수면의 물그림자가 비쳤다. 일렁이는 빛을 따라 에셸의 눈색도 살비의 바다색으로 물들었다.
-저 사실, 혜성시티의 눈꽃호수도 그렇고~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막상 직접 가본 적은 없었거든요.
이제는 말 안 해도 알겠지만 온실 속 화초처럼 안전하게만 자라서. 로망으로 삼았던 대부분을 책이나 TV로 구경하던 것이었다.
-해보고 싶다고 생각만 해오던 걸 캠프에 와서 하나하나 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한 기분이에요.
그래서…… 더 욕심내기로 해놓고, 이미 충분히 행복해서 이럴 때면 가끔 여한이 없다고 생각해버릴 것만 같지 뭐예요. 이 추억을 안고 앞으로 50년 더 살아갈 수 있다고. 그는 에셸을 대단한 것처럼 평가해주는 듯 했지만 사실은 안주하기도 잘 하는 편이라고 꾸물꾸물 말하며 옆 사람에게 고개를 움직여 히, 웃고 말았다. 작은 볼우물이 팬다. 이 뒤에 무엇이 기다린다 하더라도──
-오늘 일, 잊지 않을게요. 어울려줘서 고마워요.
그럼 바닷물이 차가워지기 전에 슬슬 나가볼까요.
너무 사심 채우던 것 같다고 스스로 느끼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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