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주노
기억하고 있나요? 왜, 지난번에 그런 일이 있었잖아요. 당신에겐 너무나 당연하고 별 거 아닌 일이어서 잊어버렸을지도 모르지만 사냥꾼의 덫에 걸린 토끼를 놓아준 일이요. 사냥꾼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맘대로 덫을 풀어줘도 되는 걸까. 얼굴에 오만 고민을 담고서도 당신은 그 분홍색 토끼의 애처로운 시선을 외면하지 못하고 날카로운 쇳덩이의 입을 벌려 토끼를 구해주었죠. 토끼는 그런 당신에게 꼭 은혜를 갚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만약 은혜를 원수로 갚고 있었다면 어떨까요. 보통의 동화와는 다른 이야기죠? 왜냐하면 토끼는 사실 무시무시하고 사악한 마녀였고, 마녀는 선량하고 다정한 인간 청년에게 홀딱 반해버리고 말았거든요.
은혜를 갚는다고 해놓고 그의 주위를 빙빙 맴돌던 마녀는 생각했죠. 이 사람이 자신을 사랑해주면 좋겠다고.
사랑의 묘약을 만드는 법을 아나요? 그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지만 마녀는 그걸 해낼 수 있는 대단한 마녀였어요. 애당초 사랑의 묘약이 정말 존재하냐고요? 원론적인 질문이네요. 토끼가 사람으로 변하고, 그 사람이 자신을 마녀라고 소개하는 이 시점에서는 무의미한 질문이기도 하지만요. 아무리 마녀라고 해도 사람의 감정을 조종하는 일이 가능하냐고요? 자, 보시면 되죠.
우선 사랑의 묘약을 만들기 위한 재료를 알아보죠. 포도주, 마녀의 피 한 방울, 아카시아 꿀, 백리향과 샐비어, 백합 꽃송이, 자작나무 수액, 겨우살이 위에 쌓인 첫눈 한 스푼과 불순물 없는 은, 아무것도 비춘 적 없는 완벽하게 둥근 거울까지, 하나라도 빼놓으면 안 돼요. 잘 받아적으세요. 재료를 모았다면 달이 없는 밤을 틈타 만들어보도록 할게요. 대부분의 주술은 보름달 뜬 밤에 가장 효과가 좋다고 하지만 사랑의 묘약은 예외랍니다. 사랑은 무척이나 비밀스럽고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법이잖아요.
캄캄한 밤, 달도 별도 숨죽인 그 날 촛대 하나만 켜둔 채 마녀는 멋지게 사랑의 묘약을 만들어냈어요. 남은 건 이걸 100일에 걸쳐 마법을 걸 대상에게 먹이는 일뿐이었죠. 왜 한 번에 다 먹이면 안 되냐고요? 한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습관이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100일이라고 해요. 사랑의 묘약을 통해 첫눈에 반하게 된 그 사람이 나를 영원히 사랑해주기 위해, 우리는 풀리지 않을 저주를 거는 거예요.
사랑인데 저주냐고요? 그야 이건 주술이고 마법이고 억지에 가짜 감정이잖아요! 그걸 저주가 아닌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100일만 지나면, 전부 진실이 될 거예요. 딱 100일만 지나면요.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일이지만 마녀는 마음 깊이 바랐어요. 그와의 사랑이 이루어지길.
──그랬는데,
“……딱 한 방울, 부족해요.”
전부 순조로운 줄로만 알았는데. 설마 이런 계산 미스를 할 줄이야. 마지막 날이에요. 오늘만 지나면 드디어 저주가 완성되는 날이에요. 99일의 인고를 지나 100일째 되는 대망의 날이었어요. 그런데 물약이 바닥을 보이고 말았어요.
어째서죠? 레시피는 완벽했는데. 설마 첫날 너무 떨린 나머지 두 방울을 넣어버렸던가요. 아니면 정말 하루만에 효과를 보인 게 기뻐 이튿날에 신나서 두 방울 넣어버렸나요? 처음으로 입술을 겹친 다음 날, 멍하니 있다 역시 한 방울 더 떨어트린 건요? 짐작 가는 일은 너무 많고 남겨진 현실은 야박하기만 해요. 그를 사랑에 빠트릴 마지막 한 방울이 모자라요. 그와의 사랑을 완성할 단 한 방울이.
100일을 다 채우지 못한 사랑의 마법은 맥없이 풀려버리고 말 거예요. 그거야말로 저주처럼. 마법은 이런 점에서 가차 없죠. 월세를 내지 못해 쫓겨나는 가녀린 세입자 같다고 할까요. 언제 그랬냐는 듯 신기루처럼, 환상처럼 꿈에서 깨버리죠. 하지만 아무리 병 안쪽을 뚫어져라 쳐다봐도 바닥을 박박 긁어 봐도 없는 건 없는 거예요.
“에셸 씨?”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마녀는 울상이 되었어요. 빈 스푼을 든 손이 덜덜 떨렸죠. 이 시간이 지나고 마법이 풀리면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요. 저를 바라보던 다정한 눈빛도, 이름을 불러주던 목소리도, 부드럽게 맞잡던 손도, 전부 전부 잃고 마는 걸까요. 우리 99일 동안 좋았잖아요. 그런데 오늘이 지나면 낯선 눈을 할 그를 상상하는 게 얼마나 끔찍하던지.
이게 다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 한 잘못이에요.
“여기. 오늘도, 차예요…….”
“아……. 고, 고마워요.”
오늘따라 유독 표정이 안 좋은 모습에 신경 써주는 줄도 모르고 마녀는 그가 아무것도 들지 않은 차를 마시는 모습을 지켜보았어요. 그리고 기다렸죠. 묘약의 효력이 끝나는 순간을. 시간이 흘러가는 게 천근만 같았을 거예요. 떨리고, 두렵고, 누가 칼로 찌르기라도 한 것처럼 안색은 나빠질 뿐이었어요.
그런데──……,
“저……, 얼굴에 뭐라도 묻었, 어요?”
이상하죠. 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까요.
찻잔이 바닥을 보이고 시간은 손 틈새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하염없이 흘러만 가요. 달이 서편으로 기울어지는 소리마저 선명히 들릴 것만 같이 오감이 아찔하게 곤두선 그동안에도 눈앞의 청년은 얼굴색 하나 달라지는 일이 없었어요. 어째서요? 이해가 안 돼요.
“이해가 안 돼요.”
“네? 어떤 게……”
“이상한데…… 그럴 리가 없는데…….”
더듬더듬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철판이 우둘투둘 오그라든 오르골의 노랫소리만 같았어요. 아주 엉망이라는 뜻이죠. 뭐가 그럴 리 없냐고 제가 무언가 잘못이라도 한 걸까? 청년이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동안 마녀는 눈물이 터졌죠. 커다란 눈망울 가득 물기가 차오르다가 곧, 수도꼭지가 망가진 것마냥 후두둑, 또 줄줄, 멈출 줄을 몰랐어요.
인어가 흘리는 눈물은 진주가 된다던데 마녀가 흘리는 눈물은 무엇이 될까요. 달콤한 향과 함께 떨어지는 그것이 주술은 되지 못한 채 바닥에 보여 애끓는 동안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 청년은 그저 안절부절못한 채 뭔진 몰라도 제가 다 잘못했노라고 사과를 반복하고, 울지 말라는 그의 말에 울음이 더 커지기만 하는 12시를 알리는 괘종소리가 뎅, 데엥, 뎅……. 그 동안 마녀는 수십 가지 금기를 어기기도 했을 거예요. 자신이 마녀라는 정체를 밝혀선 안 되는 금기, 주술을 털어놓으면 안 되는 금기, 그 때 구해준 토끼가 저였어요.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투성이였겠죠.
“당신의 사랑은, 진짜가 아닌데……. 주노 씨가, 절 좋아하면, 안 되는데. 그런 건데…….”
이제껏 마녀로 살아온 긴 세월 동안 한 번도 자신의 주술을 돌이켜본 적 없던 마녀는 처음으로 속상하고 또 무서워졌어요. 그가 더는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슬퍼서 평생 토끼로 살아버릴래요.
“아, 아직 저 좋아해요? 아직도…… 제가 좋아요?”
마녀는 그렇게 인간의 형상을 하고도 또 토끼눈이 되어 빨갛게 청년을 바라만 보는데, 얼이 빠져 있던 청년은 그 질문 하나만은 간신히 대답을 할 수 있어서 네, 그럼요. 변함없는 답을 해주고 마네요.
“조…, 좋아한다고 말한 날부터 계속 좋아했는데요…….”
그 말에 마녀는 눈을 왕방울만하게 키웠다가 이윽고는 으레 동화의 엔딩이 그러하듯 청년에게 두 팔을 뻗어 꼬옥 안고는 부끄러움도 잊은 채 입 맞추고 말았대요. 뭇 동화에서 저주를 이겨낸 두 사람이 진실한 사랑을 맹세하듯 말이죠.
그러면 마지막 장을 남기고 다시 앞선 물음의 답을 해볼까요? 사랑의 묘약이 존재하느냐 물었죠? 물론 마법도 기적도 존재하는 이 세계에서 사랑의 묘약이란 달콤한 마법은 존재하고말고요. 사랑스러운 리본의 마녀가 묘약 만들기에 실패한 건 우리밖에 모르는 이야기지만요. 그렇다면 두 사람은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진심이라고 하는…… 마법보다 아름다운 기적의 이야기.
제목이 마음에 든 편.
'with.주노' 카테고리의 다른 글
06) Out Sequence (0) | 2022.05.03 |
---|---|
05) In the box Sequence (0) | 2022.05.03 |
03) 모닝키스 (0) | 2022.05.02 |
02) 청춘의 서두 (0) | 2022.05.02 |
01) 정직한 날 (0) | 2022.05.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