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주노
“저기…… 괘, 괜찮아요?”
어느 가을의 기억이다. 멈춰 있던 손앞으로 캔 하나가 내밀어졌다. 고개를 들자 아직도 사춘기 소년인 것만 같은 풋된 얼굴이 벌겋게 쭈뼛거리고 있었다. 누구더라. 소녀가 고민하는 사이 그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이거, 학생회에서 나눠준 건데. 못 받았으면. 바, 받았으면 제가 마실게요. 그……. ……지친 것 같아서.
첫 학생회, 첫 문화제 준비로 한창 들뜨고 바쁘던, 모든 풍경이 빠르게 지나가던 정취 속에서 건네진 말. 건네진 따뜻한 캔 음료, 상대를 이제야 떠올린다. 한 학년 위의 선배. 그러니까, 이름이 아마도──
“주노! 이쪽 좀 와줄 수 있어?”
“아, 지, 지금 갈게!”
주노. 본래 학생회는 아니라고 했다. 문화제로 일손이 부족하니까 잠깐 도와주러 왔다고 준비 기간 첫날 인사를 나누었지. 그 뒤로는 서로 담당이 달라 마주칠 일이 없었다. 햇빛 아래에서 유독 새하얀 소년은 그다지 눈에 띄는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눈부심 사이로 숨어버리길 더 잘하는 듯 했지.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걸까. 코앞으로 올 때까지 눈치 채지 못했다. 양손으로 꼭 쥔 캔의 온기를 누리며 소녀의 고개가 약하게 기운다. 한 모금 마신 음료는 무척이나 따뜻하고 또 달콤했으며, 제가 여태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채 움직이고 있던 걸 그제야 깨달았다. 어쩌면 피곤했던 모양이라고 겨우 알았다.
어떻게 저보다 먼저 알아주었을까.
정작 문화제가 끝날 때까지 약 열흘. 그 선배를 마주칠 일은 더 없었다. 제게 캔 음료를 준 일을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몇 번인가 우연히 발견할 때마다 그는 늘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이를테면 간판의 튀어나온 못이라든지─그 앞에 서서 한참 고민하는 얼굴을 하다가 망치를 가져와서는 두드리는 것도 보았다─, 사람 없는 구석진 자리에서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거나, 비비안느와 대화를 나누던 어느 날은 점점 작아지는 것처럼도 보였는데……. 나중에 슬쩍 물어봤다. “무슨 일 있었어요?” 에셸이 몹시 따르는 학생회장은 그 질문에 음, 생각하다가 곧 쾌활하게 웃으며 답했다. “나쁜 대화는 아니었어요.” 그렇다면 다행이지.
원래 그런 사람인 모양이다. 문화제를 무사히 마치고 뒤풀이를 할 때, 동갑 친구들 사이에서 물어보자 비슷한 일이 자기들도 있었다고 했다. 눈치가 기민하다고 할까. 주변을 잘 보고 있다고 할까. 정작 그 본인은 눈에 띄거나 나서는 일을 극도로 피해서 누가 알아주지 않는 일에만 부지런히 손을 뻗는 것 같았는데.
그게 조금 아쉽다고 생각했다. 좋은 사람인데. 좋은 사람은 알려져야 마땅한데.
그에 관련된 기억은 거기서 한 번 단절된다. 이윽고 문화제가 끝났다. 기말고사도 치렀다. 한바탕 눈이 내리던 날이 있었고 뒤이어 방학을 했다. 고교 데뷔 1년의 시간이 순식간에 흘렀다. 동아리, 학생회, 시험, 체육대회와 문화제, 너무 욕심 부렸던 건 아닐까 생각하면서도 즐겁고 눈부셨던 시간. 다시 돌아오지 않을 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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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느덧 겨우내 눈이 녹아 다시금 만물이 생장하는 봄이 찾아왔을 때, 어떤 로맨스 소설의 도입처럼 소녀는 문화제 이후 잊고 있던 선배와 재회하게 된다. 과연 봄바람은 무엇을 전해줄까.
“폐부 위기 동아리 조사서……, 어머. 저희 학교에 원예부가 있었네요.”
2학년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학생회 활동을 시작한 에셸은 동아리 목록을 보고 있었다. 목록의 제일 하단부에는 인원미달로 폐부위기에 처한 동아리들이 붉은 줄로 표시되어 있었다. 이쪽의 동아리들은 이번 연도에 새 부원을 모집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는데, 그 중 원예부 항목은 놀라울 정도였다.
“현재 동아리 부원은 1명 뿐……. 벤더 선생님께선 유일한 부원이 졸업하면 원예부를 없애도 좋다고 하셨다고.”
요즘 같은 시대에 원예란 너무 느린 취미라 하지요. 자애롭게 웃던 선생님에게선 언제나 청량한 풀과 허브향이 사라지지 않았다. 에셸도 그 냄새를 좋아했는데. 그 뿐만이 아니다. 원예부를 그냥 없애기엔, 그곳에서 하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학교 뒤편의 화단을 관리하는 건 물론이고 초등부와 연계사업인 토끼장이나 동물돌보미 일도 반별로 당번을 정해놓고 미흡하던 중 원예부에서 도와주었다고 들었다. 벤더 선생님은 환경부 일까지 맡고 계시면서. 정말 이 많은 걸, 선생님과 유일한 부원이 다 한 걸까?
의구심을 갖고 화단을 방문한 에셸은 겨우내 자란 잡초들이 전부 정리가 되어 한켠에 수북이 쌓인 더미와 그 옆에 발끝만 솟아오른 인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야 화들짝 놀라버렸지. 모르고 지나가다간 시체로 의심해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었다. 혹시 쓰러진 걸까? 열사병? 저 많은 잡초를 다 정리하느라? 허둥지둥 다가가 보니 다행히 그는 단순히 지쳐서 쉬는 듯 했다.
그 얼굴이 놀랍게도 낯설지 않았다. 작년 문화제, 에셸에게 캔 음료를 건네주었던 바로 그 선배다.
“주노, 선배?”
다시 한 번 확인한 명단에서 유일한 원예부원의 이름에 그가 적혀 있는 걸 발견하였다. 이번엔 또 어쩌다 원예부에 든 걸까. 좋아하는 걸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이 한적한 구석에서, 모두가 그냥 지나칠 화단을 고생해 단장하다니. 교복이 흙투성이가 되는 것도 아랑 곳 않고 땀을 식히며 눈 감은 그를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지켜보던 에셸은 얼른 다리를 움직였다.
조금 뒤 돌아왔을 때는 이온 음료 한 병이 손에 들려 있었다.
[고생 많으셨어요. 애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거 드세요.]
메모 한 장과 함께 병을 놓아두었다. 위기의 원예부에는 평가 보류의 스티커. 이대로 원예부가 사라지게 두고 싶지 않았다. 그 마음이 작은 씨앗처럼 병이 눌린 자국 아래 심어졌다.
아무도 몰라줄 리는 없는 법이다. 공들여 가꾼 땅, 그 아래 잠든 무수한 가능성. 봄바람에 움트고 눈부신 여름 햇살을 거쳐 비구름을 지나고 나면 금세 줄기가 자라고 꽃이 피어 멋진 정원이 되리란 걸 정말 모를 리 없었다.
누구라도 알아주었음 하는 법이다. 그렇지 않으면 제가 더 속상하다. 모든 시간은 크든 작든 결실을 맺기 마련이었고, 축복받아야 마땅하다. 그래서 더욱 지켜보고 응원하고 싶었다. 언젠가 그의 다정함이 빛 아래 꽃피울 날을 기대하였다.
──과연 로맨스 소설의 서두로서 나쁘지 않은 문장이 됐을까?
청춘AU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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