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주노

08) 전부를 당신에게

천가유 2022. 5. 21. 00:00

For.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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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딱똑딱. 머릿속의 시계 초침이 움직이는 동안 신중하게 스톱워치를 응시하던 에셸은 드디어 디지털시계가 참 멋없다던 할머니의 말을 이해했다. 빠르게 휙휙 올라가는 숫자를 따라가는 건 굉장히 마음이 쫓기는 일이었다. 눈보다 소리로 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래도 중요한 타이밍이니까요. 두근거림과 설렘을 안은 채 시계가 정확히 00분에 도달하자마자 초인종을 누른다.

-.

경쾌한 소리가 마음의 문까지도 노크하는 듯했다.

[……그래서 내일은, 어라? , 이런 시간에 누구지……?]

후후후. 누굴까요~?”

[? , , 잠시만──]

휴대폰 너머로 우당탕하는 소리가 이어지고 현관이 열릴 때까지 위키링과 바나링을 양옆에 대동한 채 에셸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 얼굴이 얼마나 장난스러우면서 또 기대에 차 있던지. 주노의 집에서 들키지 않을 위치에 일찍이 공중날기택시로 내려와 몰래 숨어 있던 보람과 이어진다. 파트너를 위해 은은한 빛으로 화력을 낮춰온 위키링은 그 옆에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별 걸 다하는 거 아니냐구.

하나, , .

문이 열림과 동시에 바나링과 동시에 폭죽을 당긴다. , 퍼펑, 색종이가 날리고 하늘하늘하게 허공을 가르고 길죽한 리본들이 부스스한 흰머리 위를 알록달록 장식했다. 오늘의 주인공은 여전히 영문을 모를 표정이었다. 그러면서도 뺨 한쪽이 씰룩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건, 곧 이어질 에셸의 말을 미래에서 보고 온 덕일까?

생일 축하해요, 주노 씨.”

가장 먼저 축하해주고 싶었어요. 들뜬 목소리와 함께 그의 두 손으로 분홍색으로 꽉찬 꽃다발을 안겨준다. 만달라 장미, 리시안셔스, 옥시와 유칼립투스, 조팝나무를 섞어 사랑스럽게 묶인 꽃다발은 커다랗진 않았으나 꽉 차 있어서 받아든 주노의 손을 거뜬히 채웠다. 꽃다발 잡은 손 위를 저의 손으로 덮으며 에셸은 이날을 위해 준비한 말을 한마디 더 꺼냈다.

하루종일 쭉 함께라고 했잖아요. 날짜가 바뀌는 그 순간부터 전부, 주노 씨를 위해 주고 싶었어요.”

생일 축하해요. 당신을 위해 준비한 하루예요. 오늘은 제가 당신을 기쁘게 해줄게요. 커다란 케이크, 소담한 꽃다발, 고민해 고른 선물, 주어진 24시간. , 이제 하루를 어떻게 채워볼까요?

자정이 넘은 시간, 선물과 꽃다발, 케이크 상자를 한아름 챙겨 연인의 집에 실례했다. 케이크를 지금 잘라도 되겠어요? 아침에 할까. 어떻게 할까. 하지만── 지금 잠이 올 것 같지 않아요. 그냥 지금, 열어버리면……. 좋아요. 제안을 따라 선뜻 케이크 상자를 연다. 주고받는 대화는 들뜸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언제는 안 그랬냐만은, 오늘의 에셸은 무엇이든 Yes. 그런 날이다.

냐미링이 들고 온 케이크 상자는 정말 커다랬다. 포켓몬들과 함께 축하하려고요. 포켓몬도 먹을 수 있도록 만들었어요. 그래서 모두가 모일 수 있도록 야외로 나가 테이블에 케이크를 올렸다. , 직접요? 그럼요. 뿌듯한 에셸의 목소리를 따라 저글링이 자기도 도왔다고 방울을 흔든다.

케이크 위에 해피버스데이 초를 꽂고 위키링이 불을 붙였다. 으스스한 보라색 불꽃 대신 평범한 오렌지색의 불꽃이 살랑살랑 타오르고 포켓몬들과 함께 축하 노래를 불렀다.

소원 비는 거 잊지 말아요~ 주노 씨의 소원이 꼭 이루어지길.”

눈을 질끈 감고 10개나 되는 초를 한 번에 다 끄면 이어서 커팅식이다. 주노가 빵칼을 쥔 사이 접시를 준비하던 에셸은, 왜 갑자기 그런 장난이 치고 싶어졌던지 모르겠다. 케이크를 자르던 그의 손가락에 묻은 크림을 보니 돌연 뺨에도 묻혀주고 싶다고 생각해버려서. 생각과 행동이 종종 함께 흘러가는 그의 장난스런 애인은 기어코 그 새하얀 걸 오늘의 주인공 뺨에 콕 찍어버렸다. 어안이 벙벙한 그에게 돌아온 건 시치미를 뚝 뗀 미소였다.

먹을 거 갖고 장난치면 안 돼요. 결국엔 누가 그런 말을 꺼냈더라그 사이 크림은 따뜻하게 닦았다. 케이크 분배를 마치고 돌아와 곁들일 차의 준비로 다시 손을 움직인다. 마시면 정말 못 잘지도 몰라요. 걱정을 담아 소곤소곤 속삭이면서도 컵 안쪽에 습한 물방울이 맺히도록 정성을 들였다. 얼그레이 메인의 블랜딩 홍차, 지난번에 선물해주었던 틴케이스가 어느새 꽤 줄어 있다. 그럼졸릴 때까지, 같이 얘기하면 되죠. , 안 돼요? 목소리의 떨림이 홍차 위로 잔잔한 파문을 그렸다. 내일을 걱정할 필요 없다는 건 이럴 때 참 좋다. 그럴 리가요. 그의 물음에 휘영청 눈꼬리를 휘고 소파가 움푹 들어가도록 깊이 몸을 누였다. 그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달콤한 케이크를 나눠 먹고 홍차로 입안을 씻어내고 소리를 끈 TV화면에 무성영화가 지나가는 동안 도란도란 대화가 이어졌다. 시작은 깜짝 방문에 대한 것부터. 새벽 물이 드는 작은 공간에 오롯이 두 사람분의 목소리만이 사각사각 차올랐다. 이야기는 끊길 줄 몰랐다. 어제도, 그제도, 얼굴을 보고 혹은 휴대폰의 통화음으로, 대화가 부족한 적은 없던 것 같은데 서로가 없던 20여년을 다 채울 때까지 끊지 않을 참일까? 그것도 나쁘지 않지.

그러다가도 대화가 잦아들면, 숨소리만 오가는 고요를 즐겼다. 침묵이 불편하지 않았다. 도리어 두근거리거나 편안하거나 했지. ──두근거릴 때는 어떤 시그널을 받은 듯 서로를 보았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눈을 감고 입술을 맞대고, 일련의 행동이 어느새 이렇게 자연스러워졌을까. 코끝을 스치는 달콤한 케이크와 홍차향, 피부 중 가장 부드러운 부분이 문질러지는 나른한 감각. 톡톡, 두드리듯 닿아오는 말캉한 것에 기꺼이 입술을 열면 기다렸다는 듯 그가 파고 들어와 입안이 케이크로 변해버리는 것만 같았다. 녹진녹진하게 녹아내렸다.

편안할 때는 깍지껴 맞잡은 손의 힘을 쥐락펴락, 손바닥을 간질이거나 어깨에 기대거나. 졸려요? 물어보면 그건 아니란 듯 도리도리 젓는 고개. 그럴 때마다 올려 묶은 머리카락의 경계부터 이어지는 가느다란 목선 위로 하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문질러졌다.

, 에셸 씨야말로 졸리지 않아요? 졸리면, 자도 되는데…….”

저는 의외로 새벽에 강하거든요.”

주노 씨 앞에선 까무룩 잠드는 모습만 보여버린 것 같지만요. 고스트 타입은 밤이 자신의 시간이나 다름없잖아요. 뒷말은 농담이었다. 그런데도 그 말이 아주 대단한 사실인 양 끄덕이는 모습에 웃음 짓고 말았다.

지난 생일날을 떠올렸다. 그날은 온종일 축하가 끊이지 않았다. 가족의 축하, 친구들의 축하, 직장동료들의 축하, 여기저기 오는 연락은 얼마나 많던지. 정신없이 기뻤지. 그중 가장 기대하는 시간이 있다면 단연 그가 기다리던 시간 아니었을까.

오늘 하루 잘 보냈어요? 다정한 물음에 활짝 웃었다. 당신을 기다리면서요. 전부 맡겨달라던 말에 맞춰 내민 손을 잡고 에스코트를 받았다. 같이 돌아보고 싶은 곳이 있어서. 우물쭈물 나온 목소리에 기대돼요. 속삭여 답하자 바다내음 나는 고향에서 눈 깜짝할 새 숲과 들이 파도치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가 지난 족적을 따라 걷는 시간이었다. 그렇구나, 당신은 이런 곳에서 자라 지금의 당신이 되었구나. 본 적 없는 어린 시절을 떠올리고 어린 그가 뛰어놀던 풍경을 겹쳐보았다. 어쩐지 그가 더 가까워진 것 같아 기뻤다. 저는 주노 씨와 함께 모르는 길을 걷고 싶어요. 당신은 혼자가 아닐 테고, 저는 그 낯선 풍경을 당신과 나눌 수 있고. 아주 멋진 일이잖아요.

그가 보내온 시간을 나눔으로써 제 안의 그가 더 커졌다.

멋진 아이디어는 생각나지 않았어요. ……그치만, 에셸 씨가 궁금하다고 해줘서. 같이 알고 싶다고 해줘서.

이 기쁨을 받은 만큼 돌려주고 싶었다. 그에게 최고의 생일을 선물해주려고 했다. 무얼 더 해줄까. 어떤 행복한 걸 더 나눌 수 있을까. 고민하고 생각했다.

그럼, 하루종일 같이 있기?

, 하루종일요? 정말요?

그건 해주고 싶은 여러 가지 것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랬지만── 떨리던 목소리, 기대에 찬 시선, 그럴 때면 또 생각한다. 이 시선에 약한 것 같아요, 당신의…… 저를 보는 시선에요. 거부할 수 없는 느낌 있잖아요. 하가링의 닻에 걸린 상대가 꼭 이런 기분이려나. , 하루종일요. 그날은 뭐든 주노 씨 마음대로 들어주고 싶어요. ‘더 잘해주고 싶다고 했잖아요.’ 사실은 더 좋은 걸 많이 주고 싶었는데, 이미 가장 기뻐 보이는 얼굴을 봐버려 그 이상의 것을 찾을 수 없었다.

그 이상 좋은 것을, 저도 줄 수 없었다. 이미 전부를 줘버렸으니.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흐른 걸까. 창 너머로 아침 해가 찬란히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한다. 두 사람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꾸벅꾸벅, 무거운 눈꺼풀을 들며 햇빛이 들어오지 않게 두꺼운 커튼을 친다. 이 시간에야 잘 생각이 들다니. 사실 그는 지금도 자는 것조차 아쉬워 보였다. 좁은 침대, 떨어지지 않도록 꼭 붙은 몸, 그보다 꼭 잡은 팔, 그 품안에서 꿈뻑이는 눈꺼풀을 살살 매만진다.

자고 일어나서도 있을 거예요. 해가 다 져도, 밤이 되어도.”

, 아는데요……. 그래도.”

이대로 잠에서 깨면 사라지기라도 할까. 그럴 리 없는데도, 도리어 저의 말이 자극이 된 듯 재차 손에 힘이 들어가 다시 웃음을 삼켰다. 사랑받는다는 기분일까. 그러니까더 많이 들려주세요. 그리고 들어주세요.

다시 한번, 생일 축하해요. 오늘이 끝날 때까지 쭉 축하할게요.”

자고 일어나면 더 멋진 하루 보내기로 해요.


처음 챙기는 애인의 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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