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주노
화기애애한 담화 소리, 잔을 부딪치거나 나이프가 달그락거리는 소리, 고소하고 따뜻한 음식 냄새, 마지막에는 함박웃음이 나올 만큼 공들인 디저트까지. 오랜만의 가족 저녁식사였다. 한 가지, 언제나와 다른 점이 있었다면 의자가 하나 늘어 있던 것. 하나뿐인 외동딸의 애인이 함께하는 식사자리였다.
두 사람이 사귄지도 어언 두 달. 어찌나 애지중지 알콩달콩하게 지내던지 누림에서 둔치까지, 라이지방 전역을 돌아 모르는 사람이 없더라고 과장할 수 있었다─적어도 누림과 둔치에서만큼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어쩌다 보니 라이지방의 첫 마을과 끝 마을이 다 알고 있으니 전역이라 해도 과장이 아닐지도─. 양가 어른들께서도 일찍이 알고 계셨으나 에셸이 독립하기 전에 집을 오가면서 인사를 드린 적이 몇 번 있을 뿐이던가. 정식으로 주노를 둔치의 본가에 초대한 적은 아직 없었다.
딸아이의 첫 애인을 가족들은 몹시 궁금해 했으나 섣불리 데려오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처음이니만큼 서로가 조심스러웠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벌써 두 달이다. 바로 며칠 전에는 둔치의 보석점에서 반지를 보고 갔다지 않던가. 이제 슬슬 불러 봐도 좋겠지. 가족협의가 끝나고 어머니의 명령이 떨어졌다. 에셸은 착실하게 주노에게 이야기를 전했고 ‘예비’를 포함한 가족 식사자리가 마련되었다.
「너무 긴장하지 말구요. 그냥, 평소처럼 하면 돼요.」
「펴, 평소처럼 말이죠. 넵.」
정말 괜찮으려나? 누가 봐도 긴장한 낯이 완연한데. 처음 가족식사 이야기를 꺼냈을 때부터 완전 얼어있어서 에셸의 본가에 들어갈 땐 왼발과 왼손이 같이 나가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까지 들었다. 부모님이 잡아먹으려는 것도 아니고. 웃으며 말했지만 긴장을 풀어주진 못한 것 같았다.
「분명 주노 씨를 마음에 들어 하실 거예요.」
그 말이 도리어 긴장을 부추기지는 않았나 모르겠다. 다행히 걱정보다 식사자리는 부드럽게 흘러갔다. 가끔 당황스러운 질문이 나오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예상한 범주였다. 대화를 이끌어나가는 건 주로 아버지였는데, 아버지는 딸이 데려온 연인에게 인간적인 흥미를 보였다. 요컨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내고 싶어 했다.
아버지의 질문들은 연륜과 경험이 묻어나는 것투성이였다. 두 사람의 질답을 들으며 에셸은 연인의 몰랐던 점을 또 새롭게 알아갔다. 그렇구나. 이런 질문을 할 수가 있구나. 그는 이렇게 답하는구나. 이런 생각을 안고 있구나. 쳐다보는 시선이 너무 달았을까? 어머니의 핀잔 섞인 눈초리를 받으며 얼른 고개를 돌리는 일도 있었더라.
“저는 퇴근하고 돌아온 아내의 발을 닦아주는 일을 사랑합니다. 결혼하고 스무 해가 넘도록 변치 않는 우리의 약속 중 하나죠.”
아버지의 목소리는 어느새 자신의 사랑으로 넘어가 있었다. 에셸도 어릴 때부터 당연하게 봐온 풍경에 관한 이야기였다. 따뜻한 물을 받아와서는 무릎을 굽히고, 어머니가 좋아하는 아로마 오일을 끼얹고 그 발을 두 손으로 감싸 마사지하고 닦아주던 모습은 에셸이 기억하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표현하는 사랑 중 하나였다.
“주노 씨도 생각해보면 어떻겠습니까. 부부 사이에 이런 사랑의 약속을 하나 정하는 일 말입니다.”
“아직 결혼할 애들도 아닌데, 당신 너무 일러.”
“하하하. 그렇지만……”
・
・
・
“아빠가 말씀하셨다고 해도, 이렇게 바로 해주지 않아도 되는데……”
“그, 그렇게 어려운 걸 말씀하신 것도 아니고. ……제가 해주고 싶어서 그래요.”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부모님과 식사를 하느라 긴장으로 진이 쏙 빠진 듯한 그를 혼자 보내고 싶지 않아 그의 집까지 따라왔다. 둔치에서 누림까지의 귀갓길, 제가 너무 바보 같은 말을 하진 않았는지, 안 좋은 인상을 남기진 않았는지 지레 걱정하길 멈추지 못하던 주노는 돌아오자마자 잠시만요, 그렇게 말하더니 따뜻한 물을 대야에 담아 훌쩍 돌아왔다. 혹시 아까 일을 신경 쓰느라 그러는 게 아닐까? 꼭 똑같이 해주라는 말은 아니었는데. 주노 씨, 무리해서 하지 않아도…… 그렇게 말하려고 했으나 마주한 표정에 너무 의욕이 차 있어서 더 말할 수 없었다.
“여기 앉아주세요. 오늘, 구두 신었었는데… 불편하진 않았어요?”
“익숙한걸요. 이 구두 신고 뛰기도 해요.”
물론 뛰고 나면 힘들지만요. 덧붙이며 웃었다. 따라 웃으며 그가 팔을 걷어붙였다. 무릎을 꿇었고 발을 감싸는 손길이 무척이나 신중했다. 발등으로 조심스럽게 물이 끼얹어졌다. 뜨겁진 않아요? 물 온도, 괜찮아요? 처음이라서……. 발끝에 시선을 집중한 채 들려오는 목소리에 응, 딱 좋아요. 따뜻하고 기분 좋아요. 눈을 반 접으며 답했다. 정말로 기분이 좋았다. 높은 굽을 버티고 서있던 발의 피로가 사르르 녹아 풀려갔다. 마사지를 해주는 손길도 알맞았다. 에셸이 좋아하는 감촉이었다. 그의 손을 좋아했다.
팽팽하게 힘줄이 당겨진 발목을 주무르고 발바닥을 지압해오는 손길에 긴장이 느슨해졌다. 발끝에서부터 번져가는 열, 온몸으로 도는 활력, 발에서 전해지는 감촉에 어깨 힘까지 풀려 노곤노곤한 기분에 잠겼다.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연인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어머니가 바라보시던 풍경이 연상되었다. 애정표현에 살가운 분이 아니셨으나 이때만큼은 유독 아버지에게 잘 웃어주셨더라고 기억한다. 그렇구나. 이런 느낌이었어.
나른하게 눈이 감겼다. 평범한 일상의 한 귀퉁이에서 음악이 들리고 백색 조명 위로 노란색의 따스한 조명이 덧씌워지는 것만 같았다. 찰박거리는 야트막한 물소리와 도란도란한 말소리가 모두 아름다웠다. 참 신기한 일이다. 로맨틱함이란 무엇일까. 낭만이란 어디에서 올까. 극적인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안온한 일상에서 낭만을 느낀다. 그에게서 깊은 사랑을 느꼈다. 우리만으로 가득한 공간, 이 사람과 사랑하고 있음을 순간순간에서 실감했다.
“이, 이제 다… 됐어요.”
“──주노 씨.”
보드라운 수건에 발이 감싸임과 동시에 그를 부르고 어리둥절한 시선에 제 시선을 맞추고, 다정함을 담아 눈을 휜다. 고마워요. 속삭였다. 그리고…… 다음으로 이어질 말은 식상하였지만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말이었다.
“사랑해요.”
화아악, 꽃봉오리에 물이 오르듯 뺨과 귀가 달아오르는 과정을 보았다. 제 온도로 그 또한 따뜻해짐에 뿌듯함을 느꼈다. 참지 못하고 그의 뺨에 촉촉함을 남긴다. 활짝 웃는다. 로맨틱함이란 무엇일까. 낭만은 어디에 있을까. 답을 찾았다.
어디에든. 당신과 내가 있음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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