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이아고
“달라?”
“……달라.”
굳이 정의하면──
‘인引’이라고 했다. 처음에 그 단어는 ‘중력Gravitation’과 같은 뜻으로 귀에 들어왔다. 그러나 최첨단의 통역기는 곧 라리사에게 다른 뜻을 제시했다. 하나는 ‘만조High tide’였고 하나는 ‘끌어당기다pull’였는데 두 개의 해석을 내밀던 통역기는 곧 그보다 인引이란 무엇인지 아시아 쉘터의 설명을 가져와 이해시켜주었다.
헵타곤의 공식 출범 후 제대까지 2년, 라리사는 29년 간 없었던 여유로운 시간을 누렸다. 바쁘기야 했다. 게이트가 열리지 않아도 쉘터의 컨트롤을 벗어난 감염자들은 많았고 그들 중 누군가는 어쩔 수 없이 하나가 되기도 했으니 수습을 위해 부랴부랴 달려갔다. 헵타곤의 안정을 위해 동원될 일도 많았고 언론이라는 것도 따라붙기 시작해서 어딜 가든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었다. 참 신기했다. ‘캐리어 라리사 소워비’라는 존재는 그대로인데 과거에는 투명인간이나 다름없다가 지금은 온 사람들이 나만 쳐다본다는 것이.
그러나 세상의 주목은 나의 세계가 넓어지는 것과 의미가 달랐다. 세계는 다른 방식으로 넓어진다. 제대까지 주어진 2년의 유예동안 그에게는 바느질을 배우고 누군가에게는 사진을, 테니스를, 하모니카를, 요리를, 학교에서나 배울법한 문제집의 풀이법도 배웠다. 모르는 것을 알게 될수록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더 선명하고 또렷하게.
그럴수록 세상이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럴수록 라리사의 경계는 뭍으로, 사람에게로 기울어졌다.
다시 한 번 ‘인引’이라는 글자로 돌아간다. 한자는 리화와 공부하면서 익숙해진 것이다. 인이라는 글자는 활시위를 당기는 것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활이란 인류가 수렵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함께 발달해온 대단히 유서 깊은 무기로 고대 중국에서 글자를 고안할 때 이것에 얼마나 많은 영감을 얻었을지도 익히 상상할 수 있었다. 인을 결합한 두 자를 나눠서 보면 활을 뜻하는 弓과 뚫다라는 丨가 보이는데 사실 이것은 후에 와서 변형된 것으로 본래 오른쪽 자리에는 大가 있었다고 한다.
즉, 인引은 활시위를 당기는 사람의 모습을 정직하게 표현해낸 글자로 아주 알기 쉽게도 ‘끌어당기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인간이 땅에 이끌리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였다.
「닻은… 아니지, 너희가.」
금속을 표방하는 것은 차고 무겁다. 심해에서 인간이 숨 쉬지 못하는 것과 닮은 심상이다. 네가 들려주는 심상을 들으며 생각한다. 서늘하고 갑갑한 무게, 의무와 같은 느낌. 그건 싫잖니? 그래, 나는 싫을 것 같아. 겨우 네가 거기서 벗어났으니까 돌아가게 두고 싶지 않아. 바다 밑까지 오지 않아도 되겠어. 나는 이미 거기 있지 않으니까.
이마를 툭 두드렸다가 떨어지는 손끝을 시선이 좇았다. 흉터투성이, 그마저도 네 살아온 생의 증거.
“……바다가 움직이는 건 우주의 기조력에 의한 것이라고 해. 물이 뭍을 향해 밀려들거나 밀려나거나, 당기는 힘이 강해지거나 약해지거나.”
나는 늘 경계 위를 걷는다고 생각했어. 뭍이 나를 더 당길 땐 이쪽으로 기울고 물이 나를 더 당길 땐 저쪽으로 기울고. 그런데 나중에서야 알게 된 건데 기조력에 척력이란 존재하지 않는대. 더 강하게 당기거나 덜 강하게 당길 뿐인 차이로 땅은 언제나 나를 당기고 있던 거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던 동안에도 미약한 힘이나마 나를 이 땅으로 당기는 힘은 언제나 존재했어. 끌림은 착각이 아니었어.
그래서…… 우리 모두 당연한 것처럼 생에 집착해왔던 것인지도 모르겠어.
“‘인’이라는 발음에는 이끌리다引도 있지만 사람人도 있잖아.”
아시아 쉘터의 글자는 재미있지. 결국 당기는 건 사람이어서, 너를 이끌 땅도 분명 텅 빈 곳이 아닐 거야. 네게 무게를 주고 네 무게를 나눠받고 기대를 안고 기다리는 사람과 사람, 그리고 사람으로 있겠지. 어때. 싫을까? 무거울 것 같아?
그것들이 모여서 매듭이라고 한다면, 매듭이라면── 차고 무겁지도 않고 압박감이 들지도 않도록 아주 얇고 가벼운 리본으로 해서. 당기는 것만으로 간단히 풀어버릴 수도 있지만 풀지 않기를 선택할 수도 있도록 네게 쥐어주고 싶어.
또 상자에 가두진 않아도 돼. 그때보다 나아졌는걸. 열린 상자는 하나하나 발 디딜 땅을 넓히고 발 닿는 곳의 이끌림을 안겨줄 거야. 살아가는 방식이란 여러 가지잖아. 그러니 나는 가만히 기다려. 이름을 찾아가는 너를, 네 인정을.
“하나 더 찾았네. 답.”
그리고 기뻐하는 거야. 생의 확장을.
한자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해석하기 좋아해요. 영어 어원은 제가 잘 몰라서.
네 발 디딜 땅이 온 세계가 되고 온 자유가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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