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올리버
#.0
불쑥 나타난 팔이 여자의 어깨를 돌리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새벽 공기의 쌀쌀함을 가르고 먼저 다정한 열기가 스며든 덕이었다. 익숙한 스킨, 희미한 이불 냄새와 열을 머금은 체취……, 향기가 형태를 그린다. 그가 그려졌다.
아니, 정말로 눈앞에 그가 있었다. 몰래 그를 생각하고 있던 것을 들켜버린 줄 알았다. 정작 달려온 남자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활짝 웃으며─,
“당신이 보고 싶어졌어요.”
고작 그런 충동 하나로 이 새벽 길을 달려왔노라고 말도 안 되는 고백을 해오는데 말이다. 여자가 어디에 있는 줄 알고 어떻게 만날 줄 알고 이 드넓은 런던 거리 한복판을 달려온 걸까. 만약 만나지 못했으면 어쩌려고ㅡ. 물어보면 또 한없이 낙천적인 얼굴로 답했을까.
[하지만 이렇게 만났잖아요.]
마치 운명인 것처럼, 사랑인 것처럼.
10년이 지나도록 변하지 않은 본성이다. 거짓말투성이 연예계에 어울리지 않는, 여전히 소년 같기만 한 남자의 순정이었다. 천진한 미소를 앞에 두고 여자의 마음은 꼭 와르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우습지. 정작 상대의 벽을 무너트리기 위해 애써온 것은 하나도 소용이 없이 저만 또 이렇게.
──당신은 어때요?
가로등 불빛 아래로 남자의 눈망울이 영롱하게 반짝였다. 피할 곳도 없고 피하고 싶지도 않은 애정 가득한 시선이 쏟아졌다. 한 때는 당연했고 한 때는 영영 얻지 못하리라 여겼던 시선이 여자에게로 다시 빛난다. 주위의 풍경이 태엽을 돌리듯 과거로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특별히 좋아하는 점이요? 그냥…… 당신의 시선이 날 두근거리게 했어요. 어딘지 필사적이고 뜨거워서….]
열망 어린 시선에 숨을 쉬지 못할 만큼 심장이 뛰었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낯선 고동 위로 가슴을 꾹 누르고 먹먹한 입술을 연다.
“나는……”
걸음 위에 걸음이 겹치고 다시 새로운 걸음이 겹치며 셀 수 없이 많은 발자국이 길 위에 떠오른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꿈도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꿈결을 따라 여자도 걸었다. 연어처럼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필름이 빠르게 감겼다.
#.1
이제껏 수많은 사람들의 동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여자가 사실은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 없다는 이야기란 지겨울 정도로 픽션에서 쓰인 소재다. 픽션과 현실에 차이가 있다면 픽션 속 주인공은 남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가 꼭 있고, 눈의 여왕의 거울 조각을 빼내듯 마법의 장미의 저주를 풀듯 반드시 그 명백한 이유가 해소되어 사랑에 빠지고 말지만 현실은 그렇지도 않다는 정도.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글쎄, 그럴만한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한 것뿐이겠지. 아니면 내가 무슨 사랑을 모르는 사이코패스라도 되게요? 좋아해 본 경험조차 없느냐 묻는다면 그에 대해서는 단호히 no다. 우상으로 삼아 동경하는 이가 있었고 존경하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가족을 사랑하였고─오빠는 가끔 가족이 아니어도 괜찮았으나─친구도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는 된다. 그저 뭇 대중들이 죽고 못 사는 로맨스, 연애, 이런 것과 인연이 멀 뿐이었다.
그러나 여자가 좋아하지 않아도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여자는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손길에 기꺼이 올라타 그 죽고 못 사는 감정이 무엇인지를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보았다. 그리고 배운 건 ‘연애라는 건 참 시시하구나.’라는 감상.
남자들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레퍼토리가 변할 줄 몰랐다. 처음엔 “나만 좋아해도 괜찮아.”, “내가 좋아하니까 괜찮아.” 눈물겨운 헌신. 조금 지나서는 “아직도 부족해?”, “언제쯤 좋아해줄래?” 억울함과 서운함. 이 다음부터는 양상이 조금 나뉘는데 “내가 뭐가 부족해서 너에게 매달리냐, 내가 찬다.” 하는 파와 “너는 분명 사랑을 모르는 마녀가 틀림없다.” 악담파, 제발 날 좀 사랑해달라고 다리를 붙잡고 울며불며 매달리는 신파가 소수. 그래봤자 결과만 놓고 보면 그게 그거였다.
몇 번의 연애 끝에 데이터를 모은 여자는 이제 그만하기로 했다. 멀쩡하던 남자들도 저와 만나면 정신이 이상해지는 모양이니 제가 마녀가 틀림없거나 그들이 사실 숨겨왔던 개의 후손이거나 한 걸 테지. 만나달래서 만나줬더니 순 내 탓만 하고 말야. 그래, 다 내 잘못이니 앞으로 연애는 하지 않는 걸로 하겠습니다. 선을 그었다.
그러던 중 만나게 된 ‘그 남자’는 조금 달랐다. 여자가 그은 선을 결코 먼저 넘지 않으면서 집요하게 응시해왔다. 본인은 순수한 팬심이네 동경이네 떠들었는데 그녀가 보기엔 꼭 날개를 숨긴 맹금류만 같았다. 퍽 온순한 척이었지. 정말 온순했을 뿐이라고? 그런 마음이 아니었다고? 원한다면 그렇게 표현해줄 수도 있지만, 과연.
중요한 건 날개나 발톱의 유무가 아니다. 끈질기게 곁을 돌던 남자에게 신디가 먼저 선을 끊고 넘어갔단 것이다. 저를 안다는 듯 말해오는 게 짜증이 났노라고 하지만 여자가 나빴다. 참았어야 했는데.
어긋난 채로 꿰매어진 단추는 뒤 순서까지 엉망으로 만든다. 누구보다 필사적이고 진지한 눈을 한 남자는 이제껏 지나온 뭇 사내들과 달랐지만 이번에도 여자는 그를 정말 좋아할 수 없었다. 그가 바라는 만큼 좋아해 줄 수 없었다. 그래서 아팠다.
[그 때 그러는 게 아니었는데.]
[후회해요?]
[무척이요.]
내가 당신을 망쳐놓은 것만 같아서, 몹시 후회해요. 기울어진 시소, 동상이몽의 관계는 스스로도 명확히 인지하지 못한 부채감을 안고 끝내 파탄이 난다. 겨울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남자와 헤어진 뒤 신디는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지 않았다. 그 대신 종종 남자를 떠올렸고 추억했다. 좋아한다는 건 뭘까 그에게 빗대 생각하기도 했다. 사랑을 연기할 때도 그랬다. 떠올린 것이 그가 표현해주던 사랑이었는지 그의 사랑을 받는 자신을 연기한 것인지는 지금도 불분명하다.
다만 그렇게 하면 사랑이 무엇인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제야 여자는 자신이 생각보다 그를 더 좋아했음을 깨달았다. 그가 주는 사랑을 받기에 급급해 알아차리지 못했던 마음이다.
그래서 후회하느냐 묻는다면 당신, 아직도 신디아 캐럴을 모르는군? 지독한 사람이라고 그가 또 질린듯한 표정을 짓더라도 별수 없다. 이렇게 느리고 굼뜬 자신의 감정에 맞춰달라는 말 같은 걸 할 리가 없었다. 그러니 후회도 하지 않는다.
여자의 10년은 그렇게 흘렀다. 떠나버린 남자를 추억하였고 간간이 들려오는 옛 연인의 소식을 기껍게 들었다. 그가 자신으로 인해 망가지지 않았음을 확인할 때마다 안도했고 활약이 눈부실 땐 괜히 뿌듯하기도 했다. 앞으로도 그와 연관될 생각일랑 없었지만 드물게 궁금해지던 건 하나 있었다.
‘당신은 지금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을까.’
그 사람에게도 내게 그랬듯 몰두하는 표정을 보일까.
그 얼굴이 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중, 낯선 도시에서 남자의 흔적을 발견했다. 한 연극 포스터다. 그가 머무는 도시를 찾아가게 되었을 때부터 가능성을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설마 인구 800만 명의 정말 그의 흔적을 발견할 줄은 몰랐다. 조금 더 신중히 읽었더라면 그게 남자가 주연을 맡은 게 아니라 감독을 맡은 작품이란 것쯤 금세 알았을 텐데 연극 제목이 너무 그다운 나머지 무대 위의 그를 만날 수 있으리라고 철석같이 믿으며 표를 구매했다.
그가 출연하지 않는다는 건 입장하고 난 뒤에야 알았는데 조금 아쉬웠지만 생각해보면 미국에 있을 때도 그의 무대는 본 적 없으면서 여기까지 와서 보는 것도 웃기다고 생각해 그냥 자리에 앉았다. 순수하게 연극을 즐길 생각뿐이었다.
“신디…?”
하필이면 관계자석의 그와 마주치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달칵, 끝나버린 줄 알았던 그와의 스토리가 새로운 필름으로 갈아 끼워져 돌아가기 시작한다.
#.2
10년 만에 마주친 옛 연인과의 재회라고 하면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기대할까. 눈물 겨운 포옹? 다시금 불붙는 사랑? 신디는 그저 당혹스러웠고 얼른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꼭 내가 당신에게 미련이라도 남아서 이런 데까지 찾아온 것만 같아서 오해라고 묻지도 않은 말을 떠들어버릴 것만 같았다.
정작 남자는 놀란 표정을 금세 가다듬고 “오랜만이에요. 연극 보러 온 거예요? 어땠어요?” 어깨의 힘을 푼 채 가볍게 대화의 물꼬를 트는데, 여기서 도망갔다간 10년의 세월이 무색했을 것이다. “네, 뭐. 좋았어요.” 애써 입꼬리를 당겨 올렸는데 이것도 발연기는 아니었겠지.
그날 신디는 얼결에 올리버와 번호를 교환했고 다음에 밥이라도 먹자는 인사치레에 그러라고 답했다. 지나가는 말인 줄 알았는데 정말 연락이 왔고 그가 자주 간다는 브런치 카페에서 루꼴라가 올라간 피자를 먹는 동안에도 이 모든 순간이 종영한 지 오래인 드라마의 후속 촬영만 같았다. 그만큼 현실감이 나지 않았단 뜻이다.
만나서는 별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서로 연락이 없던 사이 어떻게 지냈는지 인터뷰에는 실리지 않는 사적인 근황을 나누었고 그가 첫 감독을 맡은 작품의 감상을 주기도 했다. 칭찬을 해주면 좋아할 줄 알았는데 진심 어린 감탄에도 불구하고 마냥 기뻐하지만은 않는 얼굴을 보며 그에게도 많은 일이 있었겠구나 미루어 짐작했다.
함께였던 시간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서로간에 암묵적인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당시의 드라마 이야기나 동료 배우들 이야기는 나눌지언정 그들이 보낸 밤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 뚜껑을 덮어두고 열지 않았다. 이게 맞겠지. 신디 또한 납득했다.
그런데 왜, 마지막으로 헤어지려는 순간 그런 질문을 해버린 걸까.
“요즘은 어때요? 뭐 좋은 사람 있다거나…….”
만약 있다고 하면 어쩌려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향하는 필사적인 시선을 보고 싶었나. 무례한 질문이었다고 뒤늦게 떠올렸지만 올리버는 조금 놀란 듯 싶더니 어깨만 으쓱였다. 그게 다였다─심지어 그는 신디에게 되묻지도 않았다!─.
그와 헤어져 숙소로 돌아왔을 때 알 수 없는 허탈함이 가슴을 스쳤다. 조금 전의 이별이 마지막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실감했고 더는 그를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이 쓸쓸했다. 그와 만날 이유도 없고 구실도 없다. 행인처럼 서로 스쳐 지나고 나면 그것으로 끝, 그게 왜 이렇게 아쉬운 걸까. 처음으로 누군가가 보고 싶었다. 그가 보고 싶었다.
그로부터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여자는 느리게 그를 생각했다. 10년을 보내오는 동안 천천히 줄어들던 빈도수가 다시 급증해 어째서인지 밥을 먹을 때도 샤워를 할 때도 잠을 잘 때도 창밖을 볼 때도 그가 생각났다. 그에게서 또 연락이 오진 않을까 자꾸만 휴대폰을 들여다보다 그의 인스타 계정을 구경했고 여자와는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는 그의 모습에 안도와 침울함이 뒤섞여 화면을 껐다.
답답한 기분을 해소하지 못한 채로 영국에 온 목적을 달성했다. 돌아가기 전 마지막 날 밤, 잠이 오지 않던 그 밤에 라디오를 켰다.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썬데이 랑데부>, 올리버입니다. 오늘도 안개비가 촉촉한 가을이네요. 모두 좋은 한 주간 보냈어요? ……]
듣기 좋은 목소리를 들으며 남자를 떠올렸다. 기억 속의 그와 재회한 그, 라디오 너머의 그를 차례대로 과녁판에 세우고 상상 속에서 쓰러트렸다 세우기를 반복했다. 그가 보고 싶었다. 만나서 무얼 하고 싶은 것도 아니면서 그냥 얼굴이 보고 싶었다. 내일, 딱 한 번만 더 그를 만나러 갈까. 만나고 나면 만족할 수 있을까.
오밤중에 매니저에게 메일을 남겼다. [먼저 가. 나 하루만 더 있다 갈게.] 이 필름에는 대체 어떤 제목의 라벨이 붙게 될까. In the Fall. 노래가 흐른다.
#.3
──하루만 더가 42일로 불어나기까지는 금방이었다. 코트만 입고 거닐던 영국인들은 이제 목도리도 둘렀다. 그새 단골이 된 카페에서 허브티를 마시며 여자는 아무 상관 없이 스쳐 지나는 행인들을 구경했다. 손을 잡고 가는 연인, 팔짱을 낀 연인, 서로 눈을 바라보고 웃다가 가볍게 부딪치는 입술, 요즘은 순 그런 것만 보인다. 심경의 변화가 생긴 탓일까. 아, 그리고 당신이다. 막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자를 본다.
“기다렸어요?”
“나도 온 지 얼마 안 됐어요.”
“그래요? 커피가 아니네요.”
“음…, 의사가 카페인을 줄이라고 해서.”
하루 한 잔으로 참으려는데 힘드네요. 괜시리 투덜거리자 남자는 그럼 나도 커피 말고 다른 걸로 주문할게요. 제법 배려심 넘치는 답을 해주었다. 신디는 커피보다 술을 줄여야 할 것 같은데. 괜한 사족을 덧붙이는 건 여전했지만.
이걸로 몇 번째 만남이더라. 만나서 대단한 걸 하진 않았다. 어떨 땐 카페에서 떠들다 헤어졌고 어떨 땐 바에서 만나기도 했다. 연극이나 영화를 보거나 전시회도 다녀왔고 공원을 산책하다 끝나는 날도 있었다. 주에 1번이나 2번, 가끔은 신디만 그를 보고 오는 날도 있었다. 이런 관계를 뭐라고 하지. 친구? 친구면 되는 걸까. 호텔에서 남들 몰래 만나던 것보다야 훨씬 건전하다. 무엇보다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만나고 있는 걸 놀랍다고 해야지.
그에게 먼저 연락을 할 때만 하더라도 만나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던 여자였다. 하지만 고민한 시간이 무색하게 남자는 선선히 애프터 약속을 해주었고 한 번이 두 번으로, 두 번이 세 번으로 이어져 지금이 되었다.
이쯤에서 신디는 궁금해졌다. 당신은 날 왜 만나고 있어요? 오, 친구. 그래요. 빌어먹을 친구. 내가 괜한 질문을 했군요. 그럼 여자가 그를 만나는 이유는? 질문에 대한 답은 비행기 표의 예매를 취소하고 호텔의 숙박을 하루 늘리고 답지 않은 짓과 충동으로 가득한 행동을 취하던 그 다음 날에 있다.
딱 한 번만 더 그를 만나러 갈까. 만나고 나면 왜 자꾸 그가 생각이 나는지 보고 싶은지 이유를 알 수 있을까. 하지만 이유도 없이 만나자고 하기도 웃겨서 이유를 찾을 수 없어서, 그의 극장만 배회하던 끝에 대단히 ‘우연’처럼 그를 만났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묻는 그에게 글쎄, 지나가다가요. 말도 안 되는 답을 내놓았다. 빤히 보이는 핑계였는데 그는 아무런 의문도 제기하지 않았다. 그게 서운하다가도 직전까지 쌓여가던 모든 마이너스 에너지가 그의 얼굴을 본 것만으로 어쩐지 괜찮아져서 드디어 미쳐버린 줄 알았다.
인정해야만 했다. 아무래도 내가 당신에게 반한 모양이에요. 하느님 맙소사. 당신이 자꾸 보고 싶어요. 여기서부터는 여전히 연기라곤 엉성하기 짝이 없는 여자의 어설프고 서툰 독백이다. 반갑지 않은 스포트라이트가 머리 위에 켜졌다.
/어디를 가면 만날 수 있을지 고민하고 극장 앞에 도착해서는 당신을 찾아 서성이고, 보이지 않아 실망하고 기다리면 될까 갈등하고, 이 구차한 행동에 의미가 있는지 회의감에 빠져 발길을 돌릴까 망설였어요, 백 번도 더. 그럴수록 기분은 점점 시궁창으로 빠졌죠. 스스로가 한심하고 우스꽝스러워서 머리가 식었어요. 몸도 식어갈 즈음에는 역시 돌아가자고, 이대로 짐을 싸 영영 돌아가 버리자고 하던 차에 당신이 나타나더군요./
/그 순간, 내가 그저 당신이 보고 싶은데 보지 못해서 짜증이 났던 것뿐이란 걸 알았어요. 당신을 보자마자 그 모든 기분이 눈처럼 녹아내리는 거예요. 얼간이가 된 기분이었어요.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원래 이런 건가요? 하루에도 몇 번씩 바보가 되어버리도록? 그날은 내내 너무 웃지 않으려고 애써야 했죠./
/대체 어디에 반한 건지 왜 좋은 건지 이유도 알 수가 없어요. 그냥 당신을 조금 오래 생각했을 뿐인데 좋아져 버리다니 모든 게 '고작 그런 것'이 되어버린다고요. 그런데도 내가, 아무래도 당신을, 정말로 좋아하는 것만 같아서, 당신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 우울해졌어요. 그 신디가 우울증에 걸렸다고요!/
/정말 어쩌면 좋을까요. 이런 건 하나도 나답지 않잖아요. 그런데도 난, 당신이 더 보고 싶어서……. 모든 게 엉망진창이에요./
우울증과 슬럼프를 핑계로 영국 체류와 휴가가 허락된 건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그날부터 신데렐라는 장르를 바꿔 인어공주가 되었다.
#.4
인어공주를 자처하기엔 스스로 생각해도 양심이 없었다. 하물며 목소리를 빼앗긴 것도 아닌데. 물론 목소리가 나온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좋아한단 말 하나 하지 못하는 주제니까.
좋아한다는 건 뭘까. 그에게 빗대 생각한다. 최근 여자는 그를 만나거나 만나지 않거나 그를 생각하면서 자신을 좋아하던 그와 좋아하지 않는 그 사이에서 기억을 교차점검했다. 아, 그 행동은 나를 정말 좋아한다는 뜻이었구나. 그때 그는 그 말이 듣고 싶었던 걸지도 몰라. 그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10년 전의 그에게 닿지 않을 사과를 전했고, 그는 지금 어떤 기분일까. 무슨 생각 중일까. 나를 좋아할 리는 없겠지. 봐, 좋아하는 눈이 아니야. 현재의 그의 눈빛을 독심술사라도 된 것처럼 읽어내려고 애썼다.
눈치가 없지 않았다. 오히려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지.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멍청한 눈빛은 질리도록 보았다. 그중 과거의 그도 있었다. 현재의 그는? 즉, 아니다. 필사적으로 여자를 응시하던 남자는 더 이상 없다. 그 점을 아쉬워하는 건 아니었다. 설마, 제가 차 놓고서. 정직하게 말해서 신디가 반한 건 지금의 올리버이기도 하다.
그저 결론을 하나만 내자면 「내가 만약 올리버라면 나 같은 여자를 좋아할 리가 없어.」 일 뿐이다.
“나라면 그렇게 매몰차고 정 없이 군 여자, 다시는 얼굴도 보고 싶지 않을걸.”
그 남자는 참 속도 좋아. 정말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걸까? 나랑 친구 같은 걸 해서 뭐 하려고. 생각이 데굴데굴, 한 번 불어나기 시작하자 눈덩이처럼 나쁜 방향으로 굴렀다. 장기투숙객이 되면서 거진 미국 집과 다를 게 없어진 호텔 방 소파에 척추가 안 좋은 자세로 누운 채 눈덩이 대신 아이스크림을 퍼먹으며 하는 말치고는 뻔뻔해 보였지만.
“어차피 잘 될 리가 없잖아. 또 싸우고 헤어질 뿐이야. 우리 정말 지독하게 서로 안 맞던걸.”
애초에 다시 어떻게 해보는 것부터 무리라니까? 지금도 봐, 그는 나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아. 내게 관심도 없어. 그 생각은 유난히 자존감을 깎아 먹기도 했다. 생각이 더 더 나쁜 방향으로 가속한다. 사실은 내가 연락하는 것부터 귀찮지는 않을까? 그는 먼저 연락도 해 오지 않잖아! 이대로 미국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신경도 쓰지 않을 거야. 나를 금방 잊어버리겠지. 그렇다고 내가 그 남자를 유혹할 수나 있겠어? 대체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좋아하게 만드는 건 어떻게 하는 거지?
고백한다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어딘가의 순정남은 ‘나를 받아주지 않아도 좋아. 내 마음을 전할 수만 있다면.’이라며 수줍게 고백할지도 모르지만 신디와는 맞지 않는 이야기다. 발화는 곧 대가를 필요로 한다. 고백을 해서 얻는 메리트가 없었다.
리스크만 짊어지잖아. 그 남자가 고백을 듣고 어처구니 없어 하지나 않겠어? ‘이제 와서’라면서. 나라면 질릴걸. 더 정이 떨어지고 말 거야. 그래, 고백이야말로 최악의 수야. 그와 잘 될 거라 생각하지 마! 허공을 향해 섀도복싱이 슉슉 날아간다.
있지잖아.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남자의 애칭을 신 포도로 정해주는 사람 어때?
당사자에게 실례가 된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은 채─실례면 어쩔 거야. 생각은 자유잖아─멋대로 짝사랑하는 상대를 신 포도로 규정했다. 우리가 연애한다고 해봐야 최악이기만 할 거야. 나는 그럴 생각도 없다니까? 스스로를 납득시키기만 몇 번째였다. 그렇다면 여자는 대체 무얼 바라고 42일 하고도 하루째 그의 주변을 맴돌며 그라는 별의 위성이라도 된 것처럼 구는 걸까. 명확히 답이 나온다면 사랑일 리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생각할 뿐이었다. 내일은 돌아가고 말겠다고.
지잉, 알림음에 반사적으로 휴대폰을 본다. 보낸 이 ‘신 포도’, 메시지를 읽는 순간 입꼬리가 미묘하게 씰룩였다.
[저번에 궁금하다고 한 카페, 곧 재 오픈이래요. 가볼래요?]
일단 하루만 더 미뤄보고 생각하자. 귀국이 아직 요원했다.
#.5
그러나 주어진 유예는 길지 않았다. 매니저에게 얻은 휴가가 곧 끝난다. 신데렐라는 인어공주의 꿈을 꾸는가? 단검 대신 비행기 티켓을 손에 쥔 채로. 지금이라면 인어공주 역도 잘 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얼마든지 왕자를 포기해주지.
이상한 각오였지만 어쩌겠는가. 끝내 고백하지 못하고 물거품이 되는 삶이라도 괜찮았다. 그릇이 작은 여자는 그 안을 물거품으로 채워 족했다. 애당초 우리 관계에 무엇을 바라느냐 묻는다면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노라고 답하는 여자다. 이대로 돌아서면 그야 보고 싶겠지. 그립겠지. 하지만 살 수 있겠지. 진실로 말하건대 여자는 첫사랑을 자각한 순간부터 그와 잘 되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다. 상상력이 빈곤해 미안해요. 그런데 가당키나 해요? 한편으론 그냥 당신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즣은데 어떡하냐고 묻는다. 여기서 뭘 더 바라야 할지 모르겠다니까요?
시작해본 적도 없는 사랑에 마침표를 찍는 법을 알 리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내일을 기대하는 이 마음을 단호히 잘라내고 그에게서 등 돌릴 수 있는 걸까. 차라리 그가 옛날의 저처럼 못되게라도 굴어주지. 10년 전의 못돼먹은 여자애는 왜 그렇게 빨리 남자를 밀어내려 했던 건지 지금도 알 듯 말 듯 하다.
여기까지 따라온 관객이라면 답답해 외치겠지. “그래서 결국 둘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여자는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아요!” 필름이 지리멸렬하게 감겼다. 오늘도 퍽 편집할 구석이라곤 없는 시시한 컷뿐이다.
[<썬데이 랑데부> 올리버입니다! 오늘은 제가 좋아하는 영화의 대사로 시작할게요.]
또다시 찾아온 긴 밤,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어머니께서는 항상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다 하셨죠. 고르기 전에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거라고.” ……그러니까, 그저 소중히 해보자고요. 만남이 있는 달콤한 일요일 저녁이에요. 초콜릿을 기꺼이 삼켜볼까요.]
“바보 올리버. 오늘은 이미 월요일이에요.”
어떤 상자라도 괜찮아요. 그게 당신 것이라면 그냥 소중히 하도록 해요. 유독 달콤하게 들려오던 목소리를 몇 번이나 반복해 들었다. 목소리를 따라 혀끝으로 초콜릿을 녹였다. 곧장 따라 나오는 노래는 또 얼마나 끈적거리고 달짝지근하던지. ‘Know I probably look like I’m losing my mind♪’ 아아, 그래. 안다고, 알아. 나도 완전히 그래요. 딱 그거예요! 하지만요.
그가 있는 벽을 향해 닿지 않을 대답을 했다. 상자를 열어볼 용기조차 없다면 어쩌죠? 초콜릿 상자가 내 품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한다면요. 슈뢰딩거도 말했잖아요. 열어보기 전엔 모른다고. 안에 무엇이 있든 괜찮아요. 영영 모른 척할래요. 차라리 나를 이 상자 안에 가둬주세요.
“당신을 만나지 못하게 된다면 쓸쓸할 거예요.”
많이 보고 싶을 거예요. 그래도 괜찮았으면 좋겠어요. 그런 내가 괜찮았으면 좋겠어요…. 속삭이며 웅크렸다. 이대로 상자에 갇혀 바다 아래로 잠기고 싶었다. 아니면 망망대해를 흘러가거나.
─신디 씨는 꿈이 뭐예요?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주지 않아도 좋은 거요.
그가 나오는 꿈을 꾸었다. 좋아해주지 않아도 좋다고 해놓고 결심을 흔드는 꿈이었다. 울고 있는 건 누구였을까. 10년 전에는 타인의 감정에서 도망치던 여자가 10년 후에는 자신의 감정에서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무거운 건 싫어, 어느 쪽이든. 끝내 솔직해지지는 못했다.
무릎 아래로 내려온 치마가 스텝을 따라 가볍게 부풀다 가라앉는다. 걸음이 사뿐했다. 작은 그릇은 기로에 서 있었다. 이대로 한 발짝 더 기울어지는 순간 꽉 찬 그릇이 쏟아지고 여자는 다시 가벼워질 수 있었다. 필름은 거기서 끝나고 기대할 것 없는 시시한 여자의 러브스토리도 함께 끝난다.
그 순간 시시한 여자의 작품에 손 하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필름이 부욱 찢어졌다. 누가 말했더라. 『금을 만들어라. 빛은 바로 거기로 들어온다.』
#.6
기억 속의 그는 손깍지 끼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연인 사이에 손깍지 정도야 이상할 것도 없지만 유달리 그 기억이 마음에 남았다. 손깍지를 껴오던 순간마다 특별했기 때문일까. 틈 하나 없이 맞물릴 듯 집요하게 옥죄다가 조금 느슨해지면 틈새로 바람이 간질거렸다. 그럴 땐 반대로 여자가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손깍지에는 늘 시선이 동반했다. 간절히 붙잡아 와서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진득하게 쳐다보거나 끝내 말을 삼키거나, 기다리게 한 끝에 애가 탈 것 같은 말을 하거나 아무튼 마음을 전하거나. 여하튼 발음이 좋은 남자였다. 목소리도 좋았다. 그런 남자의 떨림 섞인 목소리는 무엇보다 듣기 좋았다.
어쩌면 여자도 좋아했던 것이라고 나중에야 떠올렸다. 때때로 당연하게 갈라져 있는 손 틈새가 허전하게 느껴지던 건 필히 그 때문이다.
그는 또 자각도 없이 여자의 손을 틈 없이 옭아매 쥐고 있었다. 이러지 않으면 도망이라도 간다는 것처럼 간절하게, 또 뜨겁게. 여자는 이제야 겨울이 왔음을 실감했다. 그가 주는 온도가 뜨거워 반대로 어깨가 시려왔다. 못된 사람, 날 이렇게 만들다니.
"당신은 어때요?"
대답해주세요. 그가 주는 시선이 뜨거워 아직도 꿈을 꾸는 줄 알았다. 바보 같은 착각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고작 그 정도로, 유난히 가득 찼던 그릇이 끝내 넘쳐흐른다. 넘쳐흘러 입술을 촉촉이 적셨다. 재투성이만 걸린다는 솔직해지는 마법이다.
더는 도망칠 곳이 없었다. 상자를 연 이상 책임을 져야 했다. 자정을 넘겨 신데렐라도 인어공주도 아니게 된 한 명의 여자가 입을 연다.
한 명의 신디아 캐럴이 말했다.
“잠에서 깨어난 순간부터 쭉 당신 생각을 했어요. 어쩌면… 잠들기 전부터 계속.”
“당신이, 좋아서요. 그래서……”
두근, 두근하고 선명한 맥박을 느꼈다. 누구의 것인지 구분가지 않아 그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잡았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똑바로 보고 말할 수가 없어서 결국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뺨이 따끔거렸다. 표정이 미묘하게 구겨진 채 주저하며 잡은 손을 당겼다.
“그러니까…… 일단 좀, 안아…줄래요?”
개미 소리만한 목소리였다. 수줍은 건지 민망한 건지. 그래도 처음이었다. 그에게 가진 것 이상의 욕심이 들었다.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좋다고 생각했는데 가끔은 안 보여도 좋을 수 있나 보다. 그가 안아주는 품이 좋았다. 깍지 낀 손이 좋았다. 여자보다 높은 체온, 맞닿은 곳에서 전해지는 고동, 귀를 간질이는 숨소리, 웃음소리, 여상히 지나치던 모든 것이 ‘좋다’는 이름으로 탈바꿈했다. 욕심 없는 그릇을 빠듯하게 채웠다. 그의 두 팔이 그녀를 꽉 채운다.
가득 찬 그릇 위로 쏟아지는 물줄기, 앞으로 채워갈 초콜릿 상자의 리본은 노랑, 필름이 찢어진 자리에서부터 시작되는 논픽션 로맨스.
스포트라이트에서 벗어나고도 우리의 이야기는 계속될 수 있을까?
해답은 필름 너머 세계에.
#. Credit Cookie
겨우 포옹 좀 했다고 거기서부터 입술이 미끄러져 내려오는 남자가 있었다. 너무 자연스러워 머리 위로 미꾸라지가 떨어진 줄 알았다. 멍하니 그의 입맞춤을 받던 여자는 지금 이 순간이 꼭 로맨스 영화의 한 장면만 같아서 소름이 끼치는 동시에, 방금 막 필름을 벗어난 주제에 다시 가공의 장면으로 빨려 들어온 듯 고루한 대사를 내뱉었다.
“──키스가 늘었네요?”
뱉고 나서 화들짝 놀란 건 덤이다. 뭐야, 이…… 누가 봐도 과거가 신경 쓰이는 것 같은 대사는? 누가 시킨 거야? 만약 올리버가 답을 2초만 더 늦게 했어도 지금 한 말은 취소라고 그의 입을 막았을 텐데. 애석하게도 남자가 빨랐다. 하필 이런 때만.
“음, 그런 게 궁금해요?”
쪽쪽, 쪽쪽쪽. 무죄를 주장하듯 순진하게 눈을 뜨고 어제까지의 담백하던 태도는 어디 갔는지 입술이 닳도록 부벼 온다. 능청맞은 태도에 순간 부아가 치밀어 여자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외쳤다.
“궁금해서 물어봤겠냐고요, 바보 올리버!”
・
・
・
픽션보다 더 재미있는 픽션 같은 로맨스, 절찬리 극장 밖 진행 중!
그래서 9월 1일자로 사귄답니다.
'with.주노' 카테고리의 다른 글
37) LA LA LAND MAKE FILM (3) | 2023.11.26 |
---|---|
36)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0) | 2023.09.10 |
34) 고작 그런 것 (0) | 2023.09.02 |
33) 500 챌린지 (0) | 2023.08.10 |
32) 언해피데이 (0) | 2023.08.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