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켓몬스터 : 피치럼블

010) 09.30. 유구무언

천가유 2023. 12. 26.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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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포켓몬 마스터가 될 거야!”

──?”

……은 농담, 으하핫. 그래도 한 번쯤 말해보고 싶었어.”

첫 배지라고 너무 기고만장해진 거 아니냐니깐. 바보 수.”

좀 좋아할 수도 있지. 그러는 란아, ? 이번엔 잘 안 됐지만……

──금세 따라올 거지?

금세’, 지금 바로. 今時에가 줄어든 말로 금방이나 대번이라고도 한다. 그러면 4년쯤 지난 시간은 금세라고 할 수 있을까? 없다면, 능란의 자격은 어쩌면 일찍이 박탈된 지 오래인지도 모른다.

울창한 죽림 너머로는 포켓몬 배틀의 열기가 뜨거웠다. 쌀쌀해지는 가을 밤바람이 순식간에 익어버릴 정도다. 근성과 기백이 가득하다. 사람들의 환호와 탄식이 번갈아 나올 때마다 능란은 저도 모르게 목을 길게 빼다가 되돌렸다. 저 역시 자리에 앉아 응원해주고 싶었는데, 이따 돌아갈 자리가 있을지나 모르겠다.

모두를 실망시키고 말았으니까.

, 처음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으니 실망할 것도 없다거나 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상처다. 어느 쪽이든 섬세한 마음이란 뜻이다.

몇 년 만에 깊숙이 들어온 차롱숲은 기억과 다르지 않았다. 대나무의 향기가 황홀할 정도로 반겨주었다. 혹시 헤어진 포켓몬과 마주치기라도 할까 봐 들어오지 못하던 곳이었는데 더는 그 아이가 이곳에 없다는 걸 알았으니 거리낄 이유가 사라졌다.

어디로 갔을까, 치치는.”

있을 땐 찾지도 않더니 사라진 뒤에야 차롱숲 곳곳을 들쑤시며 찾아다닌다니 청개구리도 아니고 뭐 하는 짓인지. 이러다 정말 없는 줄 알았던 그 아이가 나타나면 어쩌려고, 그런 가정 따위 하지도 않은 채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야생 포켓몬을 피해 도망치기도 수 번, 지쳐버린 능란은 널찍한 바위 위로 길게 누워버렸다.

차가운 바위가 땀에 젖은 몸을 순식간에 식혀준다. 이대로 있다간 감기에 걸릴 게 뻔했다. 그러자 우르가 붙어 왔다. 우르를 품에 안고 빠모까지 한데 모여 둥글게 뭉치자 불 하나 피우지 않아도 충분하도록 따뜻해졌다. 이대로 잠들어버릴 것만 같았다.

정말 캠프에 돌아가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되긴 뭘, 그냥 볼 낯이 좀 없고 말겠지. 워낙 착한 사람들이 많아서 누군가는 찾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들이라고 평생은 아니다. 얼마 못 가 실망하고 포기하고, 그다음엔 떠날 것이다.

모두가 떠나고 난 다음에는 처음의 각오 같은 건 잘 구겨 버린 채 이제껏 그래왔듯이 변하지 않은 일상으로 돌아가면 그만인 것이다. 당분간 배달 주문 감소, 당장 이 종이부터 떼어버리고.

──라니, 나잇값도 못 하고 도망치면 쓰나.”

~”

알지, 알아. 돌아갈 거야.”

그래도 마음의 준비가 될 때까지 조금만 더 봐주라. 잔뜩 웅크려 눈을 감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대잎 부딪치는 소리가 파도치듯 쏴아아휩쓸었다. 가슴이 뻥 뚫릴 것만 같은 소리에 파묻히며 여자의 기억이 연어처럼 거슬러 올랐다.

뱃속에서부터 함께한 쌍둥이, 알에서부터 같이 지낸 파트너. 여행길이 혼자가 아니라는 건 무척이나 든든한 일이다. 사이가 좋기로 유명한 능가의 쌍둥이는 여느 10대 아이들이 그랬듯 때가 되면 떠나는 모험조차도 둘이 함께 나섰다. 능가가 자식 농사 하나는 잘 지었지. 저것 좀 봐, 사이가 참 좋아 보여.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며 걱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참 공교로운 일이다. 공부면 공부, 무술이면 무술, 누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할 것 없이 서로가 서로의 좋은 자극제로서 함께 성장해오던 쌍둥이가 포켓몬 배틀에 있어서 만큼은 하늘과 땅만큼의 격차를 보였다. 쌍둥이의 오빠는 태풍을 뚫고 거침없이 창공을 나는 파이어로, 동생 쪽은 땅을 달리는 판짱. 형제가 모험 동안 파죽지세의 기세로 멈춰 서는 일 없이 6개의 배지를 모으는 동안 능란은 늘봄을 넘지 못했다.

함께 할 줄 알았던 여행은 기다려주던 오빠를 먼저 보내면서 어긋났고 태어나 처음으로 서로 떨어져 지내는 사이 란은 하루가 다르게 늪에 빠진 듯 암담함만을 느꼈다. 이상하지, 무슨 수를 써서도 이길 수 없었다. 왜 너는 해내고 나는 해내지 못한 걸까.

지켜보던 누구나가 이렇게까지 걸릴 줄 몰랐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모두가 응원해주었다. 조금 서툴 수도 있지, 괜찮아. 곧 해낼 거야. 그러나 응원도 한두 번이다. 도전이 두 손가락을 넘어가 어언 세기도 어려워지고부터는 차차 애매한 시선으로 바뀌었다. 재능이 없나?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안쓰럽네, 저렇게 노력하는데. 동정과 의문, 어쩌면…… 하는 의심. 마침내 한 해가 지나고 두 해가 지나 그런 시선마저 떨어지고 나면 실망밖에 남지 않았다. 기다리던 이마저 지친 것이다.

언제까지 계속하려는 걸까?’

언제까지 계속해야만 하지?’

누군가는 그만 포기하라고 말해줘야 했다. 그러나 누구도 말하지 못한 채 하등 의미 없는 시간이 흘렀다. 감정이라는 것은 이럴 때 부조리했다. 능란 자신은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데, 변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소용이 없어서 그를 두고 흘러간 시간에 반비례하여 감정은 뒷걸음질 쳤고 퇴색해 빛바래져 갔다.

처음엔 달래 씨를 존경했는데 말이지. 좋아하기도 했고.”

이 정도로 재능이 없으면 상대해주는 쪽도 지겨울 만한데, 한 번도 그런 기색 없이 매번 한결같이 상대해주었다. 봐준 적도 없었다. 온전히 능란의 힘으로 자신이라는 벽을 넘도록 굳건하기만 했다. 그야 능란도 사람이라 이기지 못하는 일이 계속되자 진달래를 원망하는 일도 있었다. 이쯤 했으면 모른 척 배지 하나쯤 줘도 되잖아. 그것만 있으면, 나도 만족하고 도전을 멈출 수 있을 텐데.

언제쯤 진화하는 거야, 치치?

진심이라는 말이 가장 우스워지던 시기였다. 겨울을 앞에 두고 가장 추웠던 계절이다. 애꿎은 타인에게 뿔이 난 마음은 다스리는 데만도 시간이 걸렸다. 겨우겨우 타인을 향한 원망을 접자 이번에는 화살이 자신에게 향해 있었다. 그래도 스스로를 원망하는 건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누구에게도 죄책감 같은 건 가질 필요가 없어서, 모든 가시가 저를 찌르도록 두었다.

그러다 보면 원망도 분함도 집착도 욕심도 모든 것이 사라져서 입안이 텁텁하도록 아무 맛도 나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지는 게 분하지도 않게 됐다면 실망일 텐데.

네 실망 같은 건 무섭지도 않아. 내게 가장 실망하고 있는 사람은 나라서 말이지.

능란께서 저를 실망하게 하는 건,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만.

모두가 그렇게 이미 실망했거든. 괜찮아, 각오하고 있어.

쏴와아──, 한 번 더 바람이 파도쳤다. 기분이 울렁거려 능란은 반대로 돌아누웠다. 그래서 결국 문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일찍 포기하지 못한 것뿐이라고 답할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저거였나. 기대할 필요도 없었군.

그래도 역시, 누군가를 실망시키는 순간은 무뎌질 대로 무뎌진 감각 위로 새로운 아픔을 새겼다.

……-, 친구 실격이라고 하면 어쩌지.”

그 자리마저도 포기해야 하려나. 바라는지 바라지 않는지, 진심은 스스로마저 속인 채 차롱숲 가장 깊숙한 안쪽, 길쭉길쭉한 대림에 가려진 캄캄한 그늘 아래, 찾고 싶은 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여자는 그곳에 잠겨 있었다.

 


아니정말나는친구다잃는줄알았어

매도당해서 짜릿하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