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켓몬스터 : 피치럼블

011) 10.02. 감사

천가유 2023. 12. 26. 23:36

ㅡ툰 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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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롱숲을 벗어나 숙소로, 숙소에서 다시 꽃가람숲을 가로질러 걸었다. 늘봄 한켠에 다소곳하게 자리 잡은 대나무숲도 부란다를 필두로 한 판짱과 다양한 포켓몬들의 생태가 풍부하게 펼쳐져 있었지만 다님길의 다수 면적을 차지한 꽃가람숲은 규모부터가 달랐다. 는개까지 향하는 길의 주변으로 울창하게 자란 숲은 인도가 닦인 인근은 온순하고 위협적이지 않은 포켓몬이 주로 다녔으나 조금만 민가를 벗어나도 부란다가 우스운 다양한 타입의 포켓몬들을 만날 수 있었다. 막 여행을 떠나는 트레이너에게는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가졌다고 하겠다.

이름도 어여쁜 꽃가람숲의 이명이 괜히 미아의 숲인 것은 아니었다. 그 길을, 심지어는 사람들이 왕래하는 도로도 아닌 산길로 걸으려니 얼마나 힘이 들었겠는가. 걷는 내내 능란은 몇 번이나 툰이 뒤처지진 않는지, 쓰러지진 않는지 주의를 기울였다그야 미니 냉장고 같은 것까지 챙길 정도니. 툰의 적재량은 무사한가?.

그래도 캠프 2주 사이에 소년은 몰라보게 쑥쑥 자란 모양이었다. 인솔자의 무시무시한 길 안내 덕분에 우여곡절은 많았으나 낙오되는 일 없이 아름다운 호수를 배경으로 한 새 야영지까지 무사히 도착하기에 이르렀다.

한 차례의 일정이 끝난 뒤 자유시간을 맞아 어쩌다 보니 나란히 대화하게 된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소년이 슈퍼 울트라 겁쟁이에 사람과 어울리길 굉장히 꺼리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대화하기 좋아한다는 걸 이미 캠프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툰 소년은 알을 받을 생각은 있어? 라든지, 달래 씨의 레벨업에 툰 소년의 대응책은? 따위, 아예 화랑에 머물러도 좋을 텐데~ 같은 능청까지 도란도란한 대화가 호수 위로 퐁당퐁당 떨어지는 바위처럼 잔잔히 지났다.

, 툰 군도 물수제비 던질 줄 알아?

물수제비?

이렇게 말야. 에잇~ (퐁 퐁 퐁 퐁) ……헬멧 낀 채로는 잘 안 보이지 않나?

어쭙잖은 수작을 부리기도 했다. 잘 통하진 않았다.

……넌 이번에도 도전 안 할 거지?”

그러다가 덜컥 나온 화제에, 전처럼 돌을 삼킨 듯 갑갑한 기분이 들지 않은 건 스스로 느끼기에도 신기했다. 능란은 조심스럽게 제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것도 다 툰이 전심전력으로 저를 찾아오고 말을 걸어주었기 때문이겠지.

아까는 금빛으로 물들었던 호수가 지금은 달빛을 받아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어딘가 바위나 금속의 차가운 빛이 연상되었으나 그래서 더 아름답게 벼려져 있는 듯 하기도 했다.

아까 말했잖아. 다음엔 기권하지 말고 더 부딪쳐보는 게 어떠냐고. 분명 그런 모습을 보이면 네 말처럼 사람들의 기분이 조금은 풀리겠지.”

사람들이 왜 제 태도를 두고 분노하고 모욕적이라 느꼈는지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이게 제 최선이었다면 어쩔 것인가.

그렇지만 역시…… 나는 거기 서는 것조차 버거운 기분이라는 거야. 달래 씨를 보는 순간 이미 머릿속에는 패배해버리는 이미지밖에 들지 않아. 무슨 수를 써도 이기지 못하는 높다란 산을 앞에 둔 것만 같아서, 울렁거려. 차라리 누군가 도전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기만을 바라는 기분이야.”

그런 한편으로는 도전하지 않아 개운하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또 그렇지만은 않아서 정말이지 스스로가 성가시다고 생각하던 참이다. 무릎을 모은 채 그 위에 기대어 피식 웃었다. 그간 그의 앞에서 폼 잡아온 게 꼭 물거품처럼 녹아내렸다 싶었다.

그런데 이건 어디까지나 내 얘기라는 말이지이. 이몸의 이야기를 툰 군에게 대입시킬 순 없잖아.”

능란의 경험이 툰과 같지 않듯이, 툰의 경험이 능란과 같을 수도 없었다.

나는 타인의 온기가 버거웠어. 선의가 무거웠어. 그들이 주는 무구한 믿음이 나를 자꾸만 깎아내렸고 보답하지 못하는 호의에 완전히 무너질 것만 같았어. 그래서 너희가 주는 믿음이 더 쌓이기 전에 차라리 그걸 빨리 무너트리고 싶었어.”

그런데 너는, 그게 아닌 것 같더라고. 우리 참 반대에 있는 겁쟁이더라. 모로 기운 시선이 다정하게 향했다. 이만큼이나 평소의 자신을 회복할 수 있던 건 너희의 덕이었다. 여전히 능란은 사람이 주는 선의와 호의를 의심하지 않았다.

캠프가 주는 온기가 네 장점을 눈덩이처럼 불려줄지도 몰라.」 ……그 말은 지금도 변함없이 생각하고 있어. 지금만 봐도 너는 그새 다른 사람의 손을 먼저 잡을 수 있게 되고, 그렇게 두렵고 벌벌 떨면서도 체육관 관장 앞에 섰고, 패배했다고 해서 마음이 꺾이는 일도 없고,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한단 말이지.”

너는 강해. 네가 강하다는 건 즉 네가 어떤 말을 하든, 어떤 태도를 취하든 상관없이 강한 존재로서 네 정의가 변하지 않는 거야. 고집을 부리든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든 타인의 온정을 기꺼워 하든 애정표현 하나가 부끄러워 도망가든 그 모든 것이 너를 평가하는 다른 잣대가 되진 않는단 뜻이야.

과거와 같은 고통을 겪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어떻게 모르겠어. 그런데도 이번에는 배신당할 일 없는 사람이라는 믿음을 주고 싶다는 거야. 어라, 이몸 욕심이 제법 큰가.”

호수에 비친 달은 보름달보다 조금 홀쭉해져 있었다. 한 차례 만월이 지났으니 다음은 차차 기우는 일뿐이다. 네 마음에서 기울어갈 것은 무엇일까. 공포와 믿음 중. 흔들리던 그의 안광을 기억하며 지금의 그를 응시했다. 저의 말이 너를 또 뒤흔들지는 않았으면 했다.

지금 당장 말해달라고는 하지 않겠지만…… 툰 소년은 이몸의 비밀스런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버렸지 않겠어? 그러니까, 너도 네 두려움이 주체할 수 없이 쏟아질 것 같을 때에... 쏟아버릴 곳이 필요할 때에, 한번쯤은 친구인 나를 떠올려줘.”

이게 네게 전하는 내 감사야.

 


내 헬멧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