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켓몬스터 : 피치럼블

012) 10.03. 매듭, 자격, 증명

천가유 2023. 12. 26. 23:38

ㅡ이치이 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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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감사함다. 4대째명가원조할머니손맛 만파식적입니다!

4대 전에는 뭘 하고 있었는데?

글쎄, 봉술 도장이 아니었을까 싶단 말이지.

그럼 이 다음 5대째는 너야?

그건…… 또 모를 일!

 

물론 도화무늬 기와집과 백산흑수 가문을 납작하게 치환시킬 수야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능성이란 게 그렇다, 어디로든 열어두어야지 않겠어? 적어도 이곳 캠프에서는 그랬다. 도전하고자 한다면 무엇이든 해도 좋았다.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일촉즉발을 겪고 있었다.

소년, 백산흑수회의 사람인가.”

그전까지도 내내 험상궂게 짓던 표정이 순식간에 더 구겨지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조차 잠깐이었다. 호흡 한 번이 지나간 뒤로 그는 도리어 이제껏 덮어쓴 모든 꺼풀을 집어던지고 덤덤하게 가라앉은 표정을 내보였다.

──그래, 백산흑수의 5, 이치이다.”

드디어 보인 맨얼굴을 마주하며 능란은 그가 정말 20살밖에 되지 않았음을 인식했다. 고작해 20살이고 벌써 20살이다. 갓 성인이라고 하지만 한없이 어리고 미숙하여 채 다 여물지 못한 열매의 빛깔이 가을을 맞이하기에 이른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이토록 감정적이고 한편으론 순진한가.

자신이 몸담은 곳을 말하는 순간의 목소리는 저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처럼 잔잔하게 짙었다. 푸릇한 열매 안이 제 사람들을 향한 애정으로 가득했다. 바깥에서는 어떻게 비치든 간에 블레이범도 제 새끼는 함함하듯 여느 보편적인 것과 다르지 않은 감정이다. 누가 저를 사랑해준 이를 두고 나쁘다 악하다 오직 세상의 잣대만이 진실인 양 말하겠는가. 그렇다 한들 받은 사랑은 거짓이 아닌데.

제 가족을 허물까지 함함하는 이가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서 가시를 세운다. 맹화가 무섭게 타올랐다.

그렇게 쉽게 말한다면 어디 네가 한 번 말해보지 그래?”

방법보다 자격을 묻는군, 소년.”

어깨가 홧홧했다. 피할 수 있었음에도 굳이 피하지 않은 건 그가 찾는 자격에 대한 답이었다. 배트 끝에 손가락을 얹었다. 밀어내는 대신 그것을 단단히 쥐고 도망가지 못하게 잡는다. 정말 궁금하다면, 묻겠다면 내놓을 답까지 듣고 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내빼게 둘 수 없다.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는다고 하잖아.”

안타깝게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함이 치부가 되기에 능란은 이미 스스로를 부끄러이 여기고 있었다. 부끄러움 위에 부끄러움이 얹어져 봐야 무게는 그대로다. 그가 꼭 싫어하는 느물느물한 미소를 입에 걸고 세치 혀를 움직인다.

내가 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듯, 네가 네 문제를 어찌 해결하지 못하는데 조언을 주는 사람이 누구인지가 중요한가. 그저 네 들을 준비와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느냐 물어야지.”

이야기는 다시 도돌이표였다. 그가 들을 준비나 되었는지 알지 못한 채 아마도 듣고 싶지 않을만한 입바른 소리를 떠들었다. 이미 안 듣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방법들을 다 알고 있잖아, 이치이 군. 이름을 바꾸고 안 좋은 소문들을 하나하나 지워나가고 봉사활동도 좀 다니고, 겁내는 사람들에게 먼저 가서 웃고 인사하고 상납금 같은 건 없애고 위아래 없는 관계를 세운다면 말이야. 안 먹힐 이유가 어디 있지?”

그야 알면서도 하지 않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뻔한 나머지 지긋지긋한 이야기일 테지. 한 번 더 나무배트가 날아오는 건 원치 않는 일이었기에 그것을 더 단단히 쥐었다. 그래, 배트 하나로 긴밀히 연결된 지금 이 순간만큼은 운명공동체라 해도 좋다. 유수와 같은 말은 멈추지 않았다.

당장 오늘 좋아지진 않겠지만 내일 한 번 더 하면 좀 달라질 수 있지. 한 사람에게 구애를 하는데도 100일이 걸린다는데 첫술에 배부를 생각이진 않을 것 아니겠어? 그런데도 시작조차 하지 못한 채 언제까지그 거대한 업보를 끌어안고만 살 생각이야? 백날 혼자서 그래도 나는 이런 우리를 사랑해.’ 애처롭게 여기고 연민하며 자위한다고 무엇이 달라지냐는 거야.”

그것 또한 안일함이 아니고 뭐겠어. 들은 말을 그대로 돌려준다. 미러코트에 당한 상대의 눈빛은 지금 당장 사람 하나를 죽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흉흉하고 살벌하기만 했다. 그러나 링곰을 앞에 두고 등을 보이는 건 어리석은 짓임을 안다. 능란은 목숨이 아까워서라도 물러설 수 없었다.

이렇게 대립하고 있지만 그가 스스로를,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집단을 연민하거나 말거나 능란은 굳이 백산흑수회에 감정이 없었다. 말처럼 거기에 자릿세 하나 갖다 바친 적도 없으니 그야말로 은도 원도 없는 깨끗한 관계다. 모순되게도 그래서 더욱 사정을 모르는 자의 멋대로가 가능한지도 몰랐다.

문득, 여자의 눈이 그의 새 동료에게로 닿았다. 이브이, ‘진화 포켓몬’. 저 아이가 그에게 가게 된 것은 또 어떤 인연의 장난일까.

알고 있어, 이치이 군?”

──처음 이브이라는 종이 발견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것이 진화할 수 있는 종류가 셋뿐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해가 갈수록 이브이의 발견은 새로워졌다. 진화에 진화를 거듭한 것일까, 우리가 다만 그의 가능성을 몰라본 것뿐일까. 무엇으로도 변할 수 있는 녀석에게 자유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정작 그의 주인은 제 땅 위에 말뚝 박은 채 움직이지 못하고 있진 않은가.

스스로를 5대라고 소개한 군에게 물어보지. 다음 대의 백산흑수회의 주인이 너라면, 너는 그곳에서 무엇을 하고 싶지? ‘이치이로서의 너는 또 무엇이 하고 싶어? 너 역시 이곳에서 시험하고 싶은 것이, 증명하고 싶은 것이 있으니 온 게 아니야?”

가문을 사랑한 나머지 타고난 기질을 부정하지 못한 채 시대에 뒤처진 신간으로 이름을 남기고 말 것인가, 손안에 들어온 변화의 기회를 틀어쥐고 5대이면서 1대로 새 역사를 쓸 것인가. 그의 가슴에 대고 물었다.

굴러들어온 기회도 걷어차 버리는 나 같은 걸 한심하다고 논평하겠다면, 너는 나와 다르단 걸 어디 한 번 보여주고 큰소리 치라는 거야.”

여기까지 하라는 경고가 들어먹을 사람이었으면 처음부터 남자가 그은 선 안에 흙발을 집어넣지 않았을 것이다. 잃을 것도 없으니 겁낼 것도 없다고 순 배짱으로 장사를 하는 여자는 명절을 지난 잔소리를 마치고 나무 배트를 툭 놓았다.


이치이랑은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수미상관이 아름다운 관계가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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