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슈가 귀하
현실성 없는 낭만과 현실성 없는 허세에는 얼마만큼의 차이가 있을까. 여자는 허풍이 심했다. 어떨 땐 모두가 깜빡 속아 넘어가도록 그럴듯한 허풍을 보였고 어떨 땐 듣자마자 ‘누가 거기에 속겠냐.’고 핀잔을 들을만한 소리를 했는데, 그렇게 핀잔이 날아오면 으핫, 웃으며 어수룩하게 상대에게 자신을 낮춰주는 게 요령이었다. 언제부터 이런 요령이 늘기 시작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제 앞의 소녀가 속삭이는,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낭만과는 아무래도 다르기만 했다.
“응. 그러니까……”
꽃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한 차례 가을비가 지나고 기온이 뚝 떨어지거든 새벽 서리를 견디지 못하고 얼어 툭, 툭 부서질지도 모를 나약한 생명들, 그것들이 올해의 마지막 향기를 내뿜으며 한낮의 태양 아래서 아름다운 위용을 보였다. 그러면 인간들은 꽃의 수명이 오늘인지 내일인지도 모르는 채 서리보다 먼저 그 목을 뚝, 뚝 꺾어 화관을 삼았다. 머리 위에서 생명력이 춤을 춘다.
풀물이 든 손가락이 여자의 손을 감싸 쥐었다. 작고 섬세한 형태가 꼭 인형만 같다. 그래봤자 2년, 24개월, 700일을 넘거나 아니면 조금 덜한 정도. 살아온 햇수가 대단히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니면서 아이는 어딘지 모르게 어렸고 때 묻지 않은 순수가 있었다. 때론 그 순수가 위로가 되고 휴식이 되기도 한다.
“힘들면 혼자 걷는 게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 손을 잡기도 하고, 고개를 들어서 한숨 돌리고 주변을 돌아보면- 전혀 다른 게 보일지도 몰라요. 길이 보이지 않는 험난한 산속 길이고, 키보다 높은 바다의 파도 속이어도-”
뜻밖의 멋진 풍경을 발견할 수도 있어서, 그러다 보면 길을 잃은 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니어서 모두와 함께 의외의 낭만을 마주할 수 있노라고, 낭만과 희망을 입에 담는 소녀는 몹시도 사랑스러웠다.
한 마디, 한 마디 오렌지빛 찻물에 설탕을 쏟아붓듯 달콤한 온기가 피어오른다. 찻물을 삼키며 여자는 마냥 웃을 수밖에 없었다.
허풍쟁이라면 이렇게 말했겠지. “슈가 씨가 잡아주기만 하면 하나도 무섭고 막막할 게 없겠어. 갑자기 천하무적이 될 것만 같아.” 하지만 여기서 허풍은 무용지물이었다.
“이런 경험이 별로 없다는 건 축복일 거야. 앞으로도 슈가 씨가 다른 사람에게 손 내미는 걸 주저하지 않는 사람으로 자라면 좋겠어.”
다정한 진심으로 차버린 빈 수레는 요란하지조차 못하다. 대신 그 안에 깔려 있던 또 다른 진심이 숨이 막힌다는 듯 튀어나왔다. 나는 말이지, 하고 운을 떼며 맞닿았던 이마를 떼고 풀밭으로 크게 드러누웠다.
낯선 숲은 화랑지방이라면 어디든 방방곡곡 다닌다던 말조차 허풍이 되도록 만든 곳이 아름다웠다. 하늘은 또 어찌나 높고 넓은지. 아이의 말처럼 잃어버린 다음에 새롭게 채워지는 것들이란 이런 걸까. 아무것도 쥐지 않은 손이 허공을 향했다.
“한때는 그런 걸 다 잃어버렸던 사람이라서─ 잡을 손도, 가야 할 길도. 그런 것들이 주변에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결단 같은 건 내리지 못하고 하나둘 사라져가는 걸 보기만 했었어.”
응원해주던 사람들, 선의와 호의, 다정한 기대, 파트너, 소중히 해야 할 것들을 지키지 못하는 건 순전히 제 탓이었다. 지키는 법조차 몰라 시간만 야속하게 흘려보냈다. 때를 놓친 결단의 결과는 저번날에 설탕 소녀도 보았을 것이다. 차라리 모두 나를 매도하라며 내놓아버린 자신이다. 가엾게도 여자는 자신을 초라하게 만드는 표현밖에 할 줄 몰랐다.
그런데 사람이란 참 이상해서 그렇게 비어버린 자리로 자꾸만 무언가가 채워지려 한다는 것이겠지. 이제 여자는 초라해지려 할 때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꾸만 가로막히는 경험을 새롭게 하고 있었다. 그게 참 이상해서 때론 버겁기도 했다.
내게 그런 귀중한 걸 낭비하지 말았으면 했다. 그런 것도 무한하진 않거든. 너 또한 너를 지켜야지. 허공을 더듬던 손이 아이의 머리를 토닥토닥 쓰다듬는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도로 찾진 못하겠지만.”
아, 찾을 생각도 없었어. 그건 잃어버렸다기보다 나를 놓고 가버린 거라서. 찾을만한 게 아니지. 중얼거리며 영차, 몸을 일으켰다. 멍하니 응시하는 시야로는 아이가 이끌어준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지금 내게 주어진 것은……
“한심한 모습은 그만 보여야겠다 싶어. 다시 노력해야지. 슈가 씨나, 다른 사람들을 또 실망시키지 않도록.”
아름다운 것은 그 자체로 쓸모가 있다. 설탕 한 스푼 넣은 차는 당장에 지친 이의 무릎에 힘을 주었다. 대가 없는 호의가 아직은 좀 버거운 이는 그럼에도 이 부담마저 제가 감내해야 할 것이라며 바춰 오는 낭만 앞에 웃었다.
“고마워, 슈가 씨.”
뭔가 친구가 노력해주는 건 알겠는데 저때는 그걸 받아들이는 걸 자캐가 버거워해서 하지만 그걸 상대에게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대신 고맙단 한마디만 하고 말았죠.
이 당시의 자캐는 참 (오너가 롤플하기에)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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