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녹새 귀하
차가운 공기를 맞으며 여자는 아침부터 도원림 깊숙한 곳을 산책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어떤 포켓몬이 있는지도 주로 도감을 통해 확인했던가. 여기까지 올라오는 일도 쉽지 않을 텐데 이참에 구경 좀 해야지 싶었다.
포포, 봐봐. 여기는 정말 강한 포켓몬들이 많아. 모아마을 오아시스의 일짱을 담당하던 조그마한 하느라기에게 속삭이다가 목적지 도착이다. 도원림 안쪽의 대숲이었다.
“오랜만에 솜씨 좀 발휘해 볼까.”
죽통밥이 먹고 싶다는 귀여운 부탁에 의욕이 났다. 맛있게 먹어주는 얼굴은 볼 때마다 뿌듯한 게 그렇게 크지도 않았던 직업의식을 키워주는 보람이 되는데다, 리그에 오르기로 결심한 이후부터는 내내 리그란 무엇이고 제 두려움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올라도 되는 것인지 가서 잘 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형태 없는 걱정으로 짓눌려 온 긴 시간을 환기시키기에 적절하기도 하였다.
죽통밥 대접의 시작은 리그의 허락을 구하여 도원림의 대나무를 직접 자르는 일부터였다─기실, 늘봄에서도 이렇게 대나무 자르기부터 만파식적은 운영이 된다─. 나나의 리프 블레이드가 날카롭게 대나무를 자르고 태태의 불꽃이 표면의 잔가지와 잎을 깨끗하게 태운다. 다시 위위가 에어슬래시를 이용해 적당한 크기로 토막내고 나면 다음으로 음식 그릇으로 쓰기 위해 섬세하게 손질하는 공정을 거친다.
은장도를 이용해 사각사각하게 죽통의 표면을 깎다보면 여러 상념이 들었다. 하루만에 도전자 자리에서 내려오고 말았지만, 그래도 배지 6개를 다 모아 도원림에 오르고 말았다는 감회다. 캠프 첫 체육관에선 한심한 기권이나 해버렸던 저가 대견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할 때면 늘 냐스퍼처럼 귀를 바싹 세우고 노려보던 소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배짱 좋은 녀석인 줄 알았는데, 완~전 잘못 봤어!」
빈손으로 코트에 올라가서 빈손으로 내려온 날, 그날은 참 많은 사람을 실망시켰지만 그중에서도 제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제가 더 분한 듯 화를 내던 소년이 유독 기억에 남았다. 이유는 한가지였는데,
「난세출의 스케이터, 구름시티의 쿨키드! 하지만… 오늘은 포켓몬 트레이너로서 네게 배틀을 신청하는 바! 아스팔트 길에서 구르던 저력을 보여주마!!」
─이쪽은 필사적이라서 말야!
소년과 저 사이에는 코트에 오르는 무게부터 다른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었다. 책임이라든지 의무라든지 사명이라든지 하는 그런 이름이다. 그때부터였다. 그의 경기를 유독 유심히 지켜보았다.
건방지고 기분파에다가 가끔은 대책 없이 실수도 하고 솔직하지 못해 귀여운 구석이라곤 없다. 말려들면 유치해지는데 무시하기엔 열받게 굴고 그런 주제에 저는 친구 같은 건 필요하지 않다고 그게 얼마나 cool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야말로 ‘망할 꼬맹이’ 소리가 절로 나오는 녀석이었지만,
필사적인 사람의 얼굴에는 마음을 움직이는 굉장한 힘이 있었다. 앞뒤 가리지 않고 부딪치는 그 모습에 절로 응원이 하고 싶어질 만큼.
마음 한편에서는 저렇게 필사적인 사람도 있는데 역시 나 같은 어중간한 마음으로는 안 된다고 무대에 오르기를 거부하려다가도, 나도 한번쯤은 저렇게 필사적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임감에 짓눌려 필사적이다가도 그 순간에 몰입해 즐거움을 느끼는 표정까지 있으니 그야 이끌리지 않을 수도 없었다.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건 그야말로 타고난 재능인 듯했다.
“이 몸이 생각하기로는 녹새 군의 재능이라는 건 그 배짱이랑 더불어서 몰입과 즐거움이라는 것 같다.”
필사적인 건 그의 본모습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형을 위해서라고 했던가? 그래서 가끔은 다른 생각에 빠지기도 하고, 즐겁지 않은 표정을 짓기도 하고 대충 알만 하다. 가운데 이야기는 쏙 빼놓고 들었지만 결론적으로 형제가 화해한 것 같으니 다행이었다.
갑자기 무슨 말이냐고 영문을 모르고 응시해오는 상대에게 도시락이나 마저 먹으라고 콧잔등을 튕겼다. 성질을 부리다가도 군소리 없이 먹는 게 3개월간 음식으로 잘 길들인 성과다.
‘역시 하나로 가자.’ 꿋꿋하고 귀여운 녀석. 망할 꼬맹이가 귀여워 보이는 걸 보니 저도 어지간히 정이 들긴 했지. 그래서, 더 아쉬웠다.
제대로 된 시합이라고 부르기엔 민망한 얼레벌레 배틀에서 이기고 도망쳤다. 다음번엔 이겨주겠다는 소년에게 아~ 질 것 같으니까 또 배틀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만약 리그에 올라가서 맞붙는다면 그땐 또 이겨주지, 큰소리 좀 쳤더랬다. 럼블 배틀에선 영영 마주치지 않은 채 끝났으니 남은 기회라곤 리그뿐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올라간 리그, 이쪽의 결과는 1차전도 돌파하지 못하고 짐을 싸고 말았지. 아쉬운 점을 말하라면 끝없이 나올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아쉬운 건,
“녹새 군이랑 역시 전력 배틀 한번 해보고 싶었다니까.”
3달 사이에 쑥 커서 그새 16세가 17세 같아진 그를 보며 씩 웃었다. 내밀어진 건 대나무를 매끄럽게 깎은 나무패였다.
죽통을 만들고 남은 대나무를 활용해 손바닥 크기의 막대를 깎았다. 표면에는 음각으로 새겨진 질풍신뢰(疾風迅雷)의 네 글자와 날개 문양. 위에 칠은 한두 번 더 하는 편이 튼튼하고 좋다. 푸른 실과 노란 실을 교차해 엮어 막대의 구멍 사이를 통과시키자 패나 갈피 같은 형태를 하고 있었다. 뒷면에는 만파식적의 도장과 란이란 이름.
“지명패야. 나중에 주문할 때 그거 들고 오면 알아봐 줄게.”
녹새 군 전용의 패니까 뭐어, 배틀패스처럼 능란패스란 거다. 제법 거창하게도 말했다. 연봉 7억의 수퍼스타로 돌아와서 고용해주기 전까지 네 전용의 요리사처럼 따라 하나지방을 가진 못하겠지만, 이걸 내밀어오면 어디든 방방곡곡 배달하러 가주겠다고.
“그야말로 찾아주면 어디든 가는 만파식적 되시겠다. 자 그러니까, 내가 따라갈 걱정은 말고 군은 앞으로 남은 시합들 좀 더 마음껏 활개를 펴고 와.”
응원하고 있을게, 미래의 사장님.
러닝 중에 원래 더 로그를 많이 주는 사람인데 마스토돈은 글자수가 길어서 글로그 대신 멘션으로 풀기도 하거니와 + 바빠서! 진짜! 슬픔!
아무튼 꼭 한 번 로그로 정리하고 싶은 친구였는데 줘서 만족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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