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켓몬스터 : 피치럼블

061) 12.11. 자유自由

천가유 2023. 12. 30. 02:04

ㅡ이치이 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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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늘봄에 다녀온 능란은 여전히 한자리에 웅크린 채 꼼짝 않는 이브이를 품에 안아 들었다. 녀석, 고집하고는. 밥은 먹은 거야? 이브이의 입에 포록을 물려주고 제 발로는 걷지 않는 포켓몬을 데리고 텐트를 옮겼다.

이치가 돌아올 때까지 잘 보이는 곳에서 기다리자. 속삭임에도 포켓몬은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능란의 품을 벗어나 도망치려는 것도 아니었다. 너도 역시 이치이의 포켓몬이구나. 도망가는 법이 없어. 기특하게 여기며 그 머리를 문지르곤 남의 텐트 앞에 쪼그린다. 해는 이미 저문 지 오래지만 도원림의 서산 너머는 여전히 오묘한 푸른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렇구만. 밤이라고 해서 다 캄캄한 빛이 아니긴 해. 인공의 불빛이 잘 닿지 않는 곳이니까, 여긴. 평소엔 보이지 않는 색까지 다 보이겠어. 네 눈엔 어떤 색이 비쳐, 지유? 나지막한 목소리를 따라 주인이 늘상 두르고 다니는 검은색을 파헤쳐 그 안의 다른 색을 찾았다. 새로운 발견이다. 어둠 속의 가능성이다.

지유, 네 이름의 뜻은 너도 알고 있지.”

自由. 어쩌면 남자가 간절히 원하는 것, 하지만 얻을 수 없는 것. 자유의 반대편 저울에 자신이 챙겨야만 하는 많은 책임이 있을 터다. 그러니 저는 섣불리 욕심내지 못할 것을 포켓몬의 이름으로 붙였겠지.

처음 그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다른 어떤 녀석보다도 트레이너의 욕심과 바람이 가득 담긴 녀석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니까 사실은, 너는 좀 더 그 녀석을 원망해도 되고 탓해도 되고 따져도 된다는 거야.”

왜 내게 이런 이름을 붙이고서, 너는 얼마나 자유롭냐 말이지.

──능란은, 이 제 포켓몬도 아닌 것에게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아이러니하지. 가장 자유로울 녀석에게 가장 많은 책임이 묶여 있다는 게. 그것이 자유의 본질인 걸까?

나중에 같이 가라르에 가자. 거기서 무엇으로도 진화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너로 최강의 이브이를 하자. 바뀌지 않고도 변할 수 있어. 거대해질 수 있어. 속살거릴 때만 해도 제법 무책임했었는데. 슬슬 그 말을 회수해야 할 때인 모양이었다.

너는 강한 포켓몬이고, 이치가 어려운 싸움에 임할 때 훌륭한 도움을 주었어. 네 덕분에 그 녀석은 나한테 없는 배지가 있잖아. 지유, 넌 정말 대단해. 하지만……

히노테도, 텟코우도, 코타로도, 요쿠보도, 시즈쿠도, 소라타도 모두, 각자가 각자의 역할을 가지고 강해. 네가 너 혼자만 강하다고 오기를 부리는 녀석이 아니란 걸 알아서, 포켓몬 배틀이란 건 혼자서만 강해서 되는 게 아니란 걸 알아서 하는 말이야. 너희 일곱의 자리가 모두 귀하고 중요할 거야.

그렇다 보면 말이야. 어떨 땐 정원을 제한하기도 해. 한도 끝도 없이 강한 녀석들을 모아놔 버리면 결국 무엇 때문에 모였는지 본질이 흐려지기도 하니까. 그렇게 하다 보면 말이야. 누가 더 강하거나 강하지 않거나, 쓸모가 있거나 없거나,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거나의 잣대가 아니라 좀 더 건조하고 삭막한 잣대를 들이밀어야 하는 순간이 와버리는 거야.”

그래, 건조하고 삭막하고 정 없고, 그래서 누군가에겐 미안하기만 한 것. 여기까지 설명했으면 이 총명한 이브이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겠지. 제 트레이너의 고민과 선택에 어떤 무게가 실려 있고, 그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든간에 저가 되든 다른 누가 되든 의외로 다정한 트레이너는 미안해할 것이란 걸.

여기까지 해도 충분할 수 있었지만, 능란은 결국 돌아오지 않는 트레이너를 찾아 걸음을 옮기며 말을 계속했다.

그 녀석 나에게 그러더라고. 하느라기를 끝내 만날지 말지는 내 선택이라고. 그거, 내가 늘봄에서 100번도 넘게 졌을 때 듣던 말이랑 비슷해서 화가 나더라니까. 포기할지 포기하지 않을지를 놓고 본인의 선택이라고 하는 건, 그 당사자에게 너무 많은 책임을, 당사자의 탓을 하는 말이라고.”

하느라기가 안 나오는 게 어디 내 선택 여하로 결정되냐니까.

그래서 나는 지유, 너에게…… 여기서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아직 되지 않은, 네 작은 가능성이라고 하는 것 대신 다른 것이 되길 선택해버린다면, 그걸로 네가 만족하고 이치이와 계속해 달릴 수 있다면 그것을 응원하면서도…… 꼭 그렇게 무엇인가를 결정해버리는 것만이 답은 아니란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네가 이 말을 다 이해할진 모르겠다. 살랑거리는 꼬리를 잘 말아 품에 안은 채 능란은 슬슬 하루 온종일 맡아둔 포켓몬을 반납하러 남자의 그림자를 꿰맸다.

가끔은, 지금 당장 조급하게 답을 내지 않더라도 당장에 어떤 결과를 받지 않더라도, 회피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시간을 한 고비 두었을 때…… 자연히 너에게 찾아오는 결과가 있을 테니까.”

저 녀석도 그런 걸 바라진 않을걸. 네가, 스스로 소중히 여기던 무엇인가를 포기해버리는 것은 말이야.

그러니까, 지유. 저 녀석에게 결정을 맡기지 말고 네 스스로 결정하도록 해. 여기서 달라져 버려도 좋아. 그게 네 바람이라면. 달라지지 않아도 괜찮아. 잘못된 결정이란 없을 거야. 그렇게 무엇을 고르든간에 네 트레이너가 너를 전부 받아줄 것을 믿어.”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녀석이 제일 좋아하는 건 너니까. 이치.”

그야말로 지유의 일등()이구만.


지유 귀여워 지유야 평생 이브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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