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리그 입성 로그
바람이 불 때마다 대나무잎 나부끼는 소리가 들리는 늘봄의 어느 코트 위, 짐리더 대 챌린저의 위치를 넘어서 그저 한 사람의 트레이너로서 마주했다.
“조언을 들려줘. 인생의 스승님!”
“……하! 인생의 스승이라니, 낯간지런 소릴 다 듣겠군 그래!”
낯간지러운 말이라고 답하면서도 진달래는 썩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제게 지겹게 도전하고 깨지고, 종국에는 코트 위에 올라서서 무책임하게 기권이나 선언하던 녀석이 리그에 오르도록 성장하는 것에 그도 감회가 깊어진 것일까.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이미 거기까지 도달했다면 네가 가장 잘 알 거라고 생각하는데. ──오로지 한 가지! 심플하게 생각하자고. ‘이왕 시작한 거, 최고가 되자!’”
“그야말로 달래 씨다운 말이로구만. 그런 대답일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도 직접 들으니까 좀 더 의지가 솟는다. 고마워!”
이몸, 챔피언이라도 된다면 꼭 진달래 씨의 이름을 인터뷰에서 언급하도록 할게! 으하핫. ──마지막이라고 배짱 좋은 말이나 하면서 체육관을 나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렸다. 그게 조금, 능란을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다님길에서 챔피언이 나오길 기대하겠어!”
“챔피언 되기 전까진 돌아올 생각일랑 말라고!”
“왜 애한테 그런 말을 하고 그래요. 그저 네 할 수 있는 만큼 잘하고 오렴.”
“수리 박사라면 또 모를까, 참마라니. 인정할 수가 없어. 진정한 챔피언이 누구인지 보여주라고.”
“나는 수가 챔피언이 될 줄 알았는데. 란아, 이제 믿을 건 너뿐이란다.”
쏟아지는 목소리들에 능란은 실실 웃기만 했다. 3개월 전이었다면 그야, 이런 기대를 받지도 않았겠지만 사람들의 기대가 부담스러워 금세 자폭하는 말이나 했겠지. “엥? 이몸, 리그는 관광이 목적이란 거야. 기념품이나 사올게.”라든지, “나참. 뭘 기대하는 거야. 1회전이나 제대로 오르겠어?”처럼. 스스로의 가치를 낮추는 말을 통해 상대를 실망시키고 기대를 거두어간다. 그렇게 아무런 기대도 받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숨통이 트이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이라고 아주 다르지도 않지만. 그럴 때면 아무 기대도 걸지 않을 테니 편하게 하라던 청년이 떠올랐다. 으아, 오라버니. 역시 나 혼자서는 무서우니까 같이 올라가 줘.
어느새 사람들은 능란을 세워둔 채 멋대로 열이 올라 참마에게 챔피언 자격이 있는지, 이번 리그 입성자 중에 챔피언이 나올지, 그래서 누가 올라간대? 트레이너 캠프?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다들 관심 없어진 틈새를 포착해 몰래 자리를 빠져나왔다. 마지막까지 그 사람들에게 무어라 항변은 하지 못했다.
뒤이어 찾아간 곳은 빈 몬스터볼만 남은 도화무늬 기와집의 뒤편이었다.
모모와 배배를 빼곤 전부, 여긴 처음 오는 거지? 여기가 우리집이야. 포켓몬들에게 읊조리며 그사이 새로 사귄 친구, 조그마한 프릴병아리 하느라기를 포함해 포켓몬들도 모조리 꺼냈다. 태태를 꺼내기엔 아슬아슬했지만 거대지네는 자신의 몸을 어떻게 해야 효율적으로 수납할 수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겨울이 되어 잎사귀가 모두 진 나무기둥을 여러 개 휘감아가며 태태가 주위를 한 바퀴 에워싸자 곧 그곳이 봄처럼 따스해졌다.
온화한 기후에 망토를 벗어놓고 능란은 볼 앞에 쪼그려 앉았다.
“안녕, 치치. 아니, 그래봐야 여기 없는 애한테 무슨 인사람.”
벅벅, 머리를 긁적이다 대신 허리춤의 배지 케이스를 볼 곁에 두었다. 자랑하고 싶었다. 축하받고 싶기도 했다. 5년 전에는 해내지 못했던 일. 한 번은 완전히 포기했던 것. 그랬던 자리가 순식간에 전부 채워져 영롱한 빛이다. 같이 축하하고 싶은 포켓몬은 이제 자리에 없었으니 대신 그 자리에 죽통주를 한 병 쏟……다가 멈춘다.
“무슨 제사 지내는 것도 아니고.”
어딘가의 치치가 날 죽일 셈이냐 성낼 일이었다. 남은 술은 탐을 내는 태태에게 나눠주고 인사는 마쳤으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부터 도원림까지 두 발로 돌아가려면 서둘러야 했다.
* * *
오랜만에 돌아온 방에서 가방을 다시 싸고 매무새를 다듬고, 모든 준비를 마친 능란은 푸실을 나서기 위한 출발선에 섰다. 허리를 곧게 펴고 태양이 난 자리를 본다.
「목표는 소박하게 아마추어 배지 하나.」
──그렇게 말하면서 실은 배지 6개를 모조리 채우고자 욕심을 냈었지.
「6개 다 채우면 예쁘고 좋잖아. 기념이야, 기념.」
배지를 모두 채우는 것으로 오랜 숙원을 이룬다고 생각했다. 리그는 상상도 안 했다. 그러다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별 대단치 않은 바람이었다.
「가야지. 그럴 자격이 생겼는데 안 가면 아쉽잖아.」
배지를 모았더니 자격이 생겼다. 자격이 생겼는데 안 갈 이유가 있을까? 오히려 말야, 굳이 안 갈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면…… 안 가는 게 손해지!
그야 누군가는 그곳이 오랜 동경이자 꿈이었고 누군가는 좋아하는 것을 인정받기 위한 증명의 장이었고 누군가는 스스로의 자격을 시험하기 위함이고, 다들 거창한 마음을 안고 있는데 고작해야 이런 결심으로 괜찮은 걸까? 스스로에게 묻기도 몇 번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정직했다.
“설란 씨가 말해주었지. 6번째 배지를 앞에 두고는 더 이상 누구에게 평가받거나 시험대에 오를 게 아니라고. 남은 것은 그저 전력을 다해 부딪치는 일뿐.”
리그에 오르기로 결심했다면 어떤 마음가짐인지는 이 6개의 배지가 증명해줄 거야. 나는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아.
「너희의 도전과 여정을 너무 가볍게 여기진 않아도 될 것 같다 생각해!」
그 말이 또 한 번 등을 밀어주기도 했다.
한때는 뒤처지는 게 두려웠고 남겨지고 싶지 않았다. 성과를 내지 못해 걱정스러울 때, 스스로가 한심할 때 우리는 우리의 페이스대로 나가자고 말해준 친구가 있었기에 마음 꺾이지 않고 나아갈 수 있었다. 그 친구와 아직 멈추잔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도전’이라고 하는 두 글자만으로 능란에게 리그는 임할 가치는 차고 넘쳤다.
다만 한 가지, 쉽사리 리그에 출사표를 내지 못한 이유가 있다면…… 도전 옆에 함께 저울질 되는 『기대』라는 가치다. 늘봄을 지날 때는 일부러 앞만 보고 달렸다.
「진달래 씨 앞에 서던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사람들을 실망시키기라도 할까봐 겁이 나서 말야.」
「평소에 체육관 도전에 임하던 것처럼 진지하게 임한다면 결과가 어떻다 하더라도 실망할 사람들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글쎄, 이상만 높은 거야~ 주제에 맞지 않게.」
타인이 거는 기대, 나 자신에게 거는 기대. 실망시키기 두려운 마음, ‘이기고 싶다’보다 앞서는 ‘지고 싶지 않다’는 욕망. 콧대 높은 이상을 관철시키기엔 한 끗발 부족한 의지. 그야 나는 ‘열혈 캐릭터’에는 맞지 않으니까.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다가도 이런 스스로에게 실망한다. 제멋대로다.
“인간이란 정말 성가셔. 그래, 내 주제는 이러니까~ 하고 주제에 맞는 삶을 살든지 주제넘은 욕심을 내고 싶다면 그만한 노력이라도 하든지 이도 저도 아니면서 스스로의 마음에 고통받기만 하잖아.”
나를 또 글러먹은 여자라고 비난할 거야? 이런 때조차 꼭 한발 앞서간 등을 떠올린다. 지독하게 안 맞는 것 같다가도 어떤 점은 소름 돋게 닮아있는 친구다.
그 녀석 기어코 말했지. 리그에서 보자고. 아아, 그래. 쫄보 1이 먼저 오르기로 했으니 이쪽도 도망갈 수 없다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그림자를 꿰매고 문어발로 굳히는 게 나쁘지 않은 악우이기도 했다. 기다려라, 뛰어넘어 주지.
그리고 또, 건방지게 요리사로 고용해준다는 녀석에게도 한 번 더 패배의 쓴맛도 알려줘야 하고 즐거운 배틀은 어떤 리듬인지 겪어보기도 해야 하고, 생각하다 보면 쓰잘머리 없는 걱정과 자기비하가 밀려나고 도전하는 두근거림만이 가슴을 채웠다. 좋은 고동이었다.
벅차오르는 기분을 안고 도원림의 무수히 많은 계단을 올랐다. 고산탑과는 또 다른 아득한 천상의 영역이다. 오를수록 숨이 가빠왔지만 괴롭지는 않았다. 호흡이 뜨거워질수록 몸속의 활기가 돌았다.
역시 제게는 이게 맞다.
“있잖아, 태태. 나는 또 한 번 흥이 오르면 기세 좋게 성급한 지시를 내릴지도 몰라.”
하지만 그만큼 너는 강하지. 과감하게 장해물을 무너뜨리는 힘이 있어.
“그러다가도 샤샤. 너처럼 금세 겁이 나 사람들의 기대 앞에서 숨어버릴 수도 있지.”
한 번 물러나고 나면 우리에게 태세를 정비할 기회가 생기기도 하지만.
“위위처럼 실패하고 빗나가도 풀 죽지 않고 도전하는 과감함을 본받고 싶어.”
그래도 너는 가끔 신중해야 할 때가 있어. 좀 더 집중해야지.
“아니면 한 번, 한 번에 신중한 나나를 본받아 옳은 선택만을 할 수 있거나.”
대신 네게는 과감함이 부족하지. 가끔은 네 힘을 믿고 달려들어봐.
“무엇이 되었든 제일 중요한 건 나의 페이스로, 평정심을 잃지 않는 것. 그렇지, 배배?”
그리고 네 페이스를 최고로 끌어올리는 게 바로 트레이너인 내 역할.
“그러니까── 모모, 나쁜 가정 같은 건 잠시 접어두고 우리 함께, 여력이 없는 최고의 펀치를 날리고 오자.”
여한이 아니라 여력이야. 어떤 순간에도 후회는 남고야 말겠지만, 그 후회마저도 도망치지 말고 온 힘을 다하고 오자.
마침내 긴 여정의 끝, 하지만 진짜 끝은 아닌 또 하나의 과정에, 새 궤도에 능란은 발을 올렸다.
“푸실마을의 능란, 리그 입성을 선언합니다.”
도화는 만란하고 태산은 조용하기만 한 어느 날의 이야기였다.
시간 내에 다 못 쓰는 줄...(연말너무바빠)
포트커 3번째에 리그 입성도 하고 성과적으로도 서사적으로도 뿌듯하네요.
제목은 人心齊 太山移 사람의 마음이 모이면 태산도 옮길 수 있다, 에서 따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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