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이치이 귀하
─이치이 귀하
01.
시작점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그곳에는 위기회피도 되지 못한 도망태세의 닮은꼴이 둘 있었다.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도망치는 게 어디 우리만의 특성일까. 회피란 인간 본능의 자기방어기제나 같다. 그러니까 분명 우리만 도망가는 게 아닐 거라는 저열한 변명을 하는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 서로가 꽁지를 말고 내빼는 도망을 봐버리고 말았으니 그때부터 닮은꼴의 도망태세라고 인식해버린 것도 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여자가 조금 억울하다고 그래도 내가 너보다는 낫지 않냐고 항변하는 데에는 정확히 이쪽에서 그의 도망을 목격한 것이 한두 번도 아니었거니와 심지어 맨 첫 순간의 그는 자기 생명이 위험할 때나 발동하는 꼬시레의 특성도 아니고 아프든 간지럽든 상관없이 발동하는 탈출팩에 가까운 회피를 보여 황당할 뿐이었더라는 후담이 있는데 그게 어떤 순간이었냐면 “소년, 백산흑수회의 사람인가?”라는 질문이었다고 한다.
그의 입장문을 듣자면 분명 그쪽에서도 구구절절하게 당연한 반응이었노라고 항변해올 테지만 이 지면을 빌어 서술할 건 아니었다. 오롯하게 편향된 시점에서 서술하자면 도둑이 제 발 저린 것도 아니고 가벼운 질문 하나에 불고슴도치가 가시를 화르륵 세우듯이 분화해버리니 이쪽은 풍선이 터져 추락하고 마는 게 아니겠는가.
이것이 첫인사를 나쁘지 않게 해놓고서도 거하게 어긋난 단추를 맞추게 된 시작점이다. 그렇게 세달이라는 시간이 둘 사이에 놓인다.
02.
동갑내기에 비슷한 점이 많은 옆동네 이웃. 그런데도 키도 인간관계도 정신적 성숙까지도 캠프의 많은 풍파와 성장통을 거쳐가는 남자에 비해 여자가 키는 안 되도 다른 부분에선 한 뼘 정도 크다고 뽐낼 수 있던 것은 순전히 사람을 대해본 경험의 차이였다.
백산흑수라는 좁은 울타리 안에서 무조건적인 호의와 막대한 기대를 받은 도련님과 아이 한 명은 마을 전체가 키운다는 지론처럼 푸실과 늘봄을 오가며 두 마을을 섭렵해 장사를 하던 배달기사의 차이다.
그야 장사라는 건 눈치가 없으면 할 수가 없다니까. 손가락을 딱딱 흔들어 으스댄다. “너에게 화풀이를 하고 싶은 게 아니었는데….” 그 말도 잘 들었다. 아는 녀석이 그러냐. 누님에게 어리광 부리고 싶었던 거라고 통 크게 넘어가주지. 그가 저에게서 뭘 찾는지 대충은 알 것 같았으니 말이다.
‘동질감’이라는 것이었겠지. 멋대로 타인의 인생을 짐작해보자면 가문 안에서 이러면 안 된다, 저래야 한다, 집안 어른들이 짜낸 틀에 자신이 맞는지 맞지 않는지도 모르는 채 무작정 따르던 소년에게 캠프 사람들의 다양한 면면은 그야말로 자신을 알아가는 뷔페나 다름없었으리라. 저와 닮은 점을 하나하나 발견하며 친근감을 느꼈을 수도 있고 집안에서 얻지 못한 허락과 인정을 구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게 소년은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가졌다. 패배 한 번에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고 그럼에도 지는 건 싫구나 자각했다. 함부로 타인의 영역을 욕심내지 못하는 성정이라는 걸 깨닫고 그렇다면 어떤 입장을 취해야 맞을지 서툴지만 조심스럽게 알아갔을 것이다.
스무살, 갓 성인과 소년의 경계에서 성장한다. 한껏 더 자란다.
그래. 그건 좋다 이거다. 그래도 너, 점점 나에게 찾는 게 많아지지 않냐? 동질감을 갖고 나에게 널 비추는 것도 적당히 해야지 내가 무슨 네 아바타도 아니고.
“군은 자꾸 내게 희망이나 가능성 같은 걸 건단 말이지. 총대장 앞에서 내가 무슨 돌격대장이야 뭐야.”
적당히 좀 걸어라. 핀잔을 주자 녀석이 또 무슨 소리냐는 듯 발뺌을 해왔다. 모르긴 뭘 몰라.
그래, 모르긴 몰라도 아마 남자와 제 관계에 다음 진보가 찾아온다면 거기서부터겠지. 닮은 곳은 실컷 찾았으니 다름을 인정하는 것. 상대에게서 나를 비추는 게 아니라 온전히 상대를 보는 것.
──제대로 날 보고 있어, 이치?
03.
“너랑 한참 지내오다 보니까 알게 된 게 있는데 말이지.”
이 여자가 또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나. 더는 술도 아니고 깨끗한 맨 정신으로 차를 홀짝이며 수상쩍게 응시해오는 시선에 태연히 웃었다.
“우리가 지지리도 안 맞는 건지 아니면 네가 그냥 청개구리 심보인 건지 모르겠지만.”
“왜 또 악담이냐. 시비야?”
본론을 꺼내기도 전부터 입을 막으려는 흉포한 심보를 모른 척하고 능란은 하던 말을 이었다.
“너는 예나 지금이나 내가 바라는 걸 줄 양반은 못 되는 것 같단 거야.”
네가 어려운 걸 요구하는 건 아니고? 한 번을 순순히 인정하지 않겠다고 돌아오는 답에 에엥, 글쎄에. 다정해 보라는 게 그렇게 어려웠나. 귀를 후볐다. 남자의 얼굴에 대체 그놈의 다정이 뭐라고! 그 네 마디가 전광판처럼 지나간다. 그러게. 대체 그놈의 다정이 뭐길래.
“그래도 뭐 어쩌겠어. 네가 주기 싫어서 안 주는 건 아니라고 이제 알았으니까 쿵짝이 안 맞는 친구에게 이몸이 맞춰줘야지.”
나는 나대로 알아서 받아 갈 테니까 너는 그러면 빼지 말고 주라는 거야.
뭘 달라고 할 건데. 남자의 눈이 빚쟁이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수상쩍게 향했다. 글쎄, 지금 당장은 아직 생각해본 게 없는데 그게 다정이든 애정이든 관심이든 호의든, 네가 주는 것들은 알기가 어려우니까 내가 잘 받아 갈 방법을 고민해보겠어.
“이치도 기껏 다정하게도 굴어보고 잘해주려고도 했는데 내쪽에서 '뭔데?'란 반응이 오면 서운할 거 아냐.”
남자가 뽑은 여자의 자랑 1위가 철면피라기에 자신 있고 당당하게 굴었다. 그러니까 우리, 서로 방법을 고민해보자. 어렵다든지 못하겠다든지 하지 말고 너도 내게 더 잘해봐. 나는 너랑 잘 지내고 싶으니까. 이런 것도 해봐. 할 수 있을 거야.
네가 공을 들이고 다정하게 구는 만큼 나 역시 네게 아끼지 않고 돌려줄게. 관계란 그렇게 굴러가는 거야. 눈뭉치를 키워나가듯 천천히.
04.
왜 그렇게 구느냐는 바보 같은 질문은 설마 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도 혹시 궁금할까 봐 이유를 말해주자면 이야기는 거슬러 올라가 처음으로 친구네 마네 하던 때가 된다.
나는 정말 단순하게 너와 친해지고 싶었을 뿐인데, 너는 하나하나 의미 부여가 깊어.
틀렸다거나 잘못했단 건 아니다. 다만 강약 조절이라는 걸 해보자는 제안을 건넨다. 어떤 것에 깊은 의미를 부여할까. 어떤 것을 가볍게 할까. 세상 모든 게 검은돌인지 흰돌인지, 이분법으로 구분되진 않잖아. 적이냐 아군이냐고 판가름할 게 아니잖아.
호의를 베푼다. 선의를 건넨다. 애정을 나눈다. 다정하게 굴어보자. 시작은 작은 눈뭉치처럼 가볍게 무게감 없다. 이것이 금세 흩어져 사라질지 더 단단하게 뭉쳐져 계속해 굴러갈지는 내게 미래예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모를 노릇이다. 그래서 시작도 하지 않을 거야? 이 뒤에 네게 무엇이 기다릴 줄 알고.
도망치지 말라고. 그게 널 더 좋게 만들 수도 있어.
속삭임이 하얀 입김으로 번지고 시야에 들이차는 백색白色에 기억이 새하얀 설경으로 이동했다.
겨울이 와도 시드는 일 없는 뾰족뾰족한 침엽수림 위로 수북히 쌓인 눈의 무게가 한 송이, 한 송이 어깨를 무겁게 만든 애정의 무게처럼 보이기도 했다. 무거운 나머지 꺾일 것인가, 제 양분으로 삼아 더 크게 자랄 것인가.
“어딜 보고 있는 거야, 이치.”
이상한 데 이입하고 있는 건 아니지? 눈쓰개에 한눈을 파는 벗의 시선을 이쪽으로 되돌린다. 그 당시엔 독심술사도 아니어서 그가 혼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을 하지 못했다. 그래도 한 가지는 뚜렷하게 알았다. 물어봐달라고 했는데 묻지도 않고, 너 서운하구나?
“흑단을 넘어서 제대로 네 사람들을 빛 비추는 곳으로 이끌기 위해서, 백산흑수의 차기 대표자로서 너는 앞으로도 그 책임과 무게에 이끌려 다니겠지.”
그래서 묻지 않은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왜 먼저 말을 꺼내느냐고 세모눈으로 쳐다보기라도 했을까. 모른 척 웃는다. 이게 앞서 말한 너에게 맞추는 방법이다.
“네 사람들이 소중하고 네 고향이 소중하고, 무거운 책임을 떠안아놓고도 당당하게 어깨를 펴는 게 네 총대장으로서의 본질이니까 그걸로 좋을 거야. 그렇게 는개항구의 닻이 되고 백산흑수의 누름돌을 하면 돼.”
반대로 나는 바람에 날리는 솜솜코의 씨앗처럼 만개해 흐드러지는 꽃보라처럼 떠다닐 테고. 우리 이런 점이 참 다르다. 달라서, 더 재밌지?
“그런데, 그렇다고 평생을 거기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건 아니잖아. 생불이라도 될 거야 뭐야. 그러니까─ 이치.”
“나중에 같이 가라르에 가자.”
무슨 거창한 말이라고 아껴두겠어. 숨길 것 없이 말해보았다.
05.
두드리다 보면 기회를 잡기도 하다니, 누가 누구에게 뻔뻔하다고 하는지 모르겠네. 이런 것도 친구끼리 닮는 거야? 아무튼 바카치는 타이밍을 참 못 잡아. 다음엔 좀 더 빨리 오라구.
있는 대로 핀잔을 주고 차에 곁들일 다과로 찹쌀떡을 내왔다. 안에는 크림이 든 녀석이었는데 요즘 말로 ‘퓨-전’이라는 것이다. 주먹밥 노릇노릇하게 익어가는 냄새와 김이 오르는 차향, 찹쌀떡을 우물거리며 말을 고르는 상대를 차분하게 기다렸다.
“는개에 트레이너 스쿨을 창립할 거다.”
트레이너 스쿨이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다른 곳도 아니고 백산흑수에서 스쿨을 연다고 한다면, 비관적인 발상부터 하는 눈앞의 벗이 얼마나 밤잠을 설쳐가며 선언 뒤에 따라올 후폭풍을 고민했을지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그래서 이쪽은 아무런 걱정할 것 없다는 듯 쾌활히 웃어주었다.
“그거 멋진걸. 좋은 계획이야.”
일부러 여상한 목소리를 흘렸다. 하면 되지. 잘 될 거야. 연이은 도우미에 미세하게 굳어 있던 상대의 어깨가 누그러진다.
한번 말을 꺼내고 보니 긴장이 풀렸는지 장고 끝에 세웠을 계획이 이어졌다. 말 하나하나에 3개월의 여정 동안 그가 보고 듣고 겪으며 생각한 것들이 가득해 그와 함께 지난날을 되짚어보기도 했다.
사람은 변할 수 있는 존재인가. 한 번 더 기회를 줘도 될 것인가. 내일에 기대를 걸어도 될까? 희망은 존재하는가. 그 질문에 얼굴을 찌푸리기만 했던 남자가 다른 답을 내놓았다. 희망은 거기에서부터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당장 내일 좋아지진 않겠지만 내일 한 번 더 하면 좀 달라진 모습이겠지.”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구만.”
다음 대 백산흑수회의 주인으로서 넌 무엇을 하고 싶지? 5대째의 신간을 낼 것이냐 1대의 새 역사를 쓸 것이냐. 먼 길 돌아온 반가운 답장을 열고 여자는 샐쭉, 눈을 휘었다. 그래, 네 답이 기뻐.
“네 용기와 희망, 잘 들었어. 분명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응원할게, 이치.”
06.
응원으로 충분한 걸까. 하지만 제가 뭐 실질적인 도움을 줄 것도 없기야 하다. 사업안에 대한 이야기라면 리드나 노트와 할 테지. 나중에 전단지라도 돌려달라고 하면 기꺼이 도울 의향이 있었지만 애당초 그런 것을 기대하고 꺼낸 말이 아닌 걸 알았다.
그러니 해줄 말이라곤 낙관과 응원이다. 그래, 분명 잘 될 거야. 아직은 근거 같은 거 없지만 듣는 것만으로 기분 좋아지는 말. 그런데 실컷 청자역을 하고 끝날 줄 알았더니 상대가 자세를 바꾼다. 딱히 숨겨놓은 것도 없는데 뭘 듣겠다는 건지. 민망한 듯 뺨을 긁적였지만 그래, 이렇게까지 터놓은 상대에게 뺄 것도 아니었다.
“나는 아직도 거창한 꿈이 있지는 않아.”
나린의 벚꽃다발숲을 연상케 하는 향긋한 차향에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상대와 차를 사이에 두고 이런 온화한 대화를 나눈다는 것부터 격세지감이 느껴졌지만 그새 또 익숙해지기도 해, 민망함이나 쑥스러움은 덜어 있었다. 말하자면 편안하고 좋다.
“리그에 도전한 것도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 것도 대단한 야망이나 이타심으로 움직인 것도 아니고 단순히 나를 위한 욕망일 뿐이야.”
도전은 피를 뜨겁게 하고 이기면 기분이 좋고, 여행이란 즐거운 것이고 낯선 곳을 내 발로 걸어본다는 건 얼마나 설레. 거기서 조금 더 의미를 부여하고 이름을 붙인다면 그 모든 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어서 더 좋은 것이고, 발길 멈추지 않고 걷는 내 바람이 수많은 장소와 사람을 스쳐 많은 이야기를 옮겨 다녔으면 하는 거지.
“내 의미라는 것은 말야 결국에는, 길 위의 노래야. 내 입을 통해 이야기들이 널리널리 퍼지는 것이야말로 보람이고 기쁨이며 그렇게 세상에 내 흔적을 남기겠다는 거지.”
리치 씨는 그렇게 하면 정작 ‘나’는 어디에도 없지 않냐고 쓸쓸하다고도 하던데, 그걸로 충분할 것 같단 말이지. 책을 쓴다든지 사진을 찍는다든지 어떤 형태로 남기거나 하는 건 맞지 않아. 떠다니는 걸로 족하거든. 그렇게 나는 모든 이야기들을 줍고 이야기들을 퍼트리고, 이야기꾼이 되어 방랑하는 거야. 제법 낭만적이지?
“그런 걸 일평생 할 생각은 없어. 다니다가 또 새로운 꿈이 생기면 그 꿈을 따라 방향을 바꿀지도 모르지. 그거면 된 거야. 앞으로 몇 번이든 무엇이든 될 수 있노라고 희망을 가진 채, 자유롭게.”
어때, 지유. 너를 꾀어내기에도 좋은 이야기지? 장난스레 눈을 휜다. 찻잔이 비워지자 때마침 생각난 것처럼 가방에서 얼후를 꺼냈다. 하랑마을에서 받은 뒤 그대로 들고 다니던 것이다. 활을 잡고 2개뿐인 줄을 지그시 누르며 낭랑한 선율을 켠다.
“이걸로 널 응원할 수도 있어. 여러 지방을 떠돌다가 말하는 거지. ‘화랑의 는개마을을 알아? 그곳에 멋진 트레이너 스쿨이 있어. 너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을 때, 구제불능에게도 재기의 기회가 필요할 때 그곳을 찾아가 봐.’ 어때, 괜찮은 풍문이지.”
는개에 닻을 내린 널 대신해 저 넓은 세상의 발이 되어줄 테니까 이용할 수 있는 건 이용해. 그러다가 가끔, 너도 기지개가 켜고 싶어지면 따라 나서기도 하고 말야.
07.
이야기의 방향을 조금 튼다. 말 나온 김에다. 지난번에는 어영부영 지나간 화제의 첨언이기도 했다.
“만파식적의 능란이 있고 푸실마을의 능란이 있고 도화만란의 능란이 있고, 그런 것처럼 너도 백산흑수의 이치이만 있는 게 아니잖아.”
각자무치의 총대장만이 너를 이루는 조각은 아닐 거야. 네 안에도 여러 네가 있잖아. 주어진 것의 의미를 무겁게 곱씹을 벗을 두드려 그가 짊어진 것들을 쪼갠다. 리플렉터든 빛의장막이든 깨트리고 조각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내가 떠난다고 서운해하지만도 말고, 너랑 다르게 책임이란 것 없이 자유롭게 다니는 날 부러워하지만도 말고, 그러니까 외롭고 아쉽다고 기껏 건넨 제안을 싫다고 차 내지도 말고 내게 다른 너를 보여줘.”
성탄절 밤에 하랑을 방문하는 것도 가라르로 가서 같이 거다이맥스를 하자는 것도 너랑 해보고 싶어서 한 말이 틀림없잖아. 친구가 몇이든 ‘너’에게 건넨 제안이었다고, 떠나서 뒤돌아보지 않을 것 같으면 뒤에 남지 말고 옆으로 오란 거야.
“네가 뭘 겁내고 주저하는지 모르겠지만 내딛기를 무서워 거절하지는 마. 그러면 발자국조차 남지 않잖아.”
“──뭐어, 진짜 싫은 거면 어쩔 수 없지만…….”
물러날 때를 알아야 아름답다는 말을 새기며 인간관계에 있어 유독 겁이 많은 친구에게 이 다음은 유턴을 쓴다. 디리링, 태연하게 시선을 얼후로 옮겼다.
“그런 의미에서 멋진 이명 하나 지어줘 볼까나.”
지난번의 귀요미도 진심이었지만 말이야.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하는 수 없지. 활대 끝이 바닥에 한자를 적었다. 화망일신火望一薪.
“본래는 화득신이치火得薪而熾라는 고사성어야. 불꽃이라는 건 땔나무를 얻어야 비로소 활활 타오른다.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요즘 말로 할 수 있는데, 이치에 맞게 좀 바꿨지.”
얻을 득得보다 바랄 망望을, 그리고 네 이름 ‘이치’를 따라 ‘一’로. 바라 원해서, 얻어내 최고의 불꽃을 피워내라는 뜻이야. 네가 가진 불꽃에 적절한 장작만 얻어낸다면 그야말로 일등이 되고 말 거라고. 벗에게 건네는 축복 가득한 언령이었다.
08.
어느덧 캠프의 마지막 밤이었다. 그러나 캠프가 끝난다고 영원한 이별 같은 것은 아니었다. 못다한 말이 있다면 기약 없이 다음 페이지로. 다만 한 송이 꽃을 책갈피로 남겨두고 꽃향 가득한 차를 새로이 우린다.
“캠프에 오길 잘한 것 같아. 너도, 나도. 쉽지 않은 일들이 여럿 있었지만 그래도 즐거웠어. 그래서……, 어라. 이제 뭐라고 끝맺으면 되냐.”
아무튼 그런 거야. 마지막까지 어설픈 마무리는 어쩌지 못한 채 여자가 낼름 웃었다.
저쪽에서 먼저 장문의 로그를 줘서, 근데 써도 써도 끝나질 않아서 힘들었어요. 촉박하게 마무리 지음.(엔딩 코앞이라)
(유성애적 의미 x) 제법 많이 꼬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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