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이치이
여름숲합작 <연리지>에 참가했습니다~
우기를 앞둔 숲의 날씨는 변덕스러웠다. 맑은 것 같다가도 먹구름이 모이기까지 수 분 걸리지 않았다. 이럴 때 과학이라든지 문명이라든지가 발달하는 대가로 자연의 감을 잃어버린 인간들은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모르는 거다. 곧 자연이 물폭탄을 떨어트릴 것을.
도리어 기민한 건 포켓몬 쪽이다. 코로, 더듬이로 먼저 대기 중의 습도가 올라가는 걸 눈치챈 포켓몬들이 트레이너를 잡거나 밀거나 해야 겨우 트레이너도 “왜 그래?” 한 마디 남기며 포켓몬의 인도를 따랐다. 그렇게 몇 걸음, 막 잎사귀 무성한 나무 그늘에 닿자마자 천둥이 쳤다. 산울림이 가시기도 전에 눈앞이 번쩍했고 그 뒤를 빗줄기가 쏜살같이 쫓아왔다.
쏴아아─, 시원한 소낙비였다.
“아이쿠. 모모, 이리 와. 와앗, 정전기 일으키진 말고!”
“시즈쿠는 그냥 맞겠다는군.”
“저 방울 더 커지기도 해?”
“글쎄다.”
비가 싫지 않은 모크나이퍼가 트레이너의 머리 위, 두꺼운 나무줄기에 올라앉아 제 날개를 펼친다. 잎사귀 틈틈으로 날개깃이 끼어들어 견고한 가림막이 되어주었다. 외에 대부분의 포켓몬들은 알아서 볼에 들어갔는데 그걸 보고 “좋겠다. 나도 볼에 넣어주라.” 같은 농담 좀 했다가 한심한 시선을 받은 것은 덤이었다.
비는 빠르게 쏟아졌다. 그만큼 오래 갈 것 같진 않았다. 조금 전까지 절차탁마하게 대련을 하던 두 사람은 그사이 땀을 식혔다.
“봐, 이치. 금방 개겠다.”
“왜 맑은 하늘에 비가 내리는 거냐.”
“신령님들이 결혼하는 경사스러운 날에 미물은 고개를 들지 말라는 뜻이란다.”
“그게 뭐야.”
지역별로 조금씩 구전이 다르다고 했다. 어디는 호랑이 장가가는 날, 어디는 여우가 시집가는 날. 그러면 호랑이와 여우의 혼인인가? 아무렴 함부로 고개를 들었다간 날벼락이 떨어질지 모르니 얌전히 시선을 내리깐다.
때마침 졸졸 흐르는 시내가 두 사람을 불분명하게 비췄다. 동시에 문득 기시감이 지났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한참 옛날에──
강산이 한 번 바뀔 만큼 기억이 물살을 거슬러 오른다. 그러니까 대략 10년쯤 전일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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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란의 곁에는 더 이상 싸울 수 있는 포켓몬이 없다.》
《능란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변덕스러운 소나기가 오다가다 하는 어느 여름이었다. 전날 내린 비가 아직 다 마르지 않아 촉촉하고 싱그러운 피톤치드를 뽐내는 숲을 한 소녀가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요 근래 자꾸만 내리는 비 덕분에 지반은 약하고 강물은 세찼지만 눈 감고도 걸어 다닐 앞마당이었다. 힘 빠진 걸음걸이를 하면서도 능수능란한 발재간이 걱정할 것 없었다.
본인의 걸음만은 말이다. 그런데 왜 포켓몬 배틀은 그렇지 못할까. 심사가 꼬인 트레이너처럼 판짱도 신경질을 부리며 소녀의 품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곤 시내로 달려가 몸을 털고 제 털결을 고르는 게 깍쟁이가 따로 없었다. 저럴 때마다 가족들은 ‘그래, 포켓몬은 트레이너를 닮는다더라.’하는데 내가?
판짱을 냇가에 둔 채 소녀는 나무둥치로 사이에 쪼그려 앉았다. 이 자리는 소녀의 비밀장소였다. 아주 최근에 생긴. 그야 그랬다. 마을로 내려가면 도저히 혼자 있을 수 없었다. 어딜 걷든지 간에 “여어, 란아. 그래서 오늘은 어땠니?” 물어오는 사람이 아주 한 트럭. 응원하러 와준 친구들을 성과 없이 돌려보낸 게 달력 한 장째다.
마을 사람들 보기엔 부끄럽고 그렇다고 집에 틀어박혔다간 당장 가게에 나오라는 말이나 들을 테니 결국 궁여지책으로 사람 오지 않는 곳까지 숲을 걷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도착한 요 아늑하게 어린아이 한 명쯤 쪼그릴 수 있는 공간이 소녀의 비밀장소가 되었단 말이다.
“치치, 오늘은 또 뭐가 부족했을까.”
“판?”
트레이너의 고충을 판짱은 전혀 알지 못하는 듯했다. 넌 맨날 지기만 해서 분하지도 않아? 퉁명스럽게 물어도 다시 갸웃, 이럴 때 포켓몬과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게 얼마나 답답한지 몰랐다. 동시에 무슨 뜻인지 몰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건 조금 비겁했을까.
약한 모습 보이면 안 돼. 소녀가 제 두 뺨을 짝 때린다. 어머니가 그랬다. 판짱의 트레이너는 만만해 보여선 안 된다고. 언제 판짱이 트레이너를 버릴지 모른다고. 파트너에게 버려질 수는 없었다. 멋진 트레이너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어떻게 하는 걸까. 남들은 쉽게만 하던데. 교감이 부족한 걸까. 아직 우리 완전히 통하지 않아서.
──누군가와 이어져 있다는 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숨죽은 산나물처럼 시들어가는 트레이너에게 판짱이 총총 다가왔다. 다가오려 했다.
판짱의 뒤통수로 날아온 몬스터볼만 아니었어도 말이다.
퐁!
이미 소녀의 볼에 식별된 개체는 남의 볼에 들어가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강 건너편에선 포기를 못한 것처럼 퐁, 퐁퐁, 몇 개나 되는 몬스터볼이 자꾸 날아왔다. 맞추기는 또 얼마나 정확하게 맞추던지. 볼 모양의 혹이 동그랗게 올라온 채 판짱이 성내기 시작했다. 포켓몬을 얼른 품에 안은 소녀가 강 건너편을 노려보았다.
“남의 포켓몬에게 뭐 하는 짓이야, 거기 소년.”
“…남의 포켓몬?”
“그래, 남의 포켓몬. 이 녀석은 내 파트너라고.”
이상한 녀석이었다. 남의 포켓몬이라고 했는데도 납득하지 못한 것처럼 건너편의 소년은 숨소리를 낮췄다. 당장에라도 덮쳐올 것처럼, 그리고 빼앗을 것처럼. 야생동물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포켓몬을 빼앗다니. 하지만 시선이 그랬다. 눈은 마음을 비치는 창이라고 하지. 비에 젖은 잎사귀 사이로 비취색의 눈동자가 형형하게 번뜩였다. 주위의 습기를 말려버릴 듯 푸르게 타오르는 불꽃이 제 것을 탐내고 있었다.
경계하는 소녀와 다르게 소녀의 삿갓 위로 기어 올라간 판짱이 건너편의 상대를 도발했다. 그러자 강 너머의 소년이 막무가내처럼 첨벙첨벙, 물 위를 건너오는 것이 아닌가. 이거 도망쳐야 하나, 기다려야 하나. 말이 통하는 상대일까 아닐까. 그보다 발목 정도밖에 오지 않는 시내라고 해도 막 비 온 뒤에 저렇게 건너면 위험한데…. 고민은 더 이어질 것도 없었다.
소년의 바로 뒤에서 튀어나온 야생 부란다 덕분이다.
못해도 두 사람을 합친 것보다 거대한 야생 곰이 소년을 정확히 노리고 공격했다. 평소에도 난폭하긴 하나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 덮치다니. 이상하다고 생각할 새도 없이 소녀가 삿갓을 던졌다.
“치치, 로킥이야!”
부란다의 주먹 크기만 한 판짱이 삿갓 위에서 점프한다. 그 틈에 소녀는 소년의 손을─어이, 잠깐. 왜 야구 배트는 다시 고쳐 쥐는 거야. 싸울 거야? 지금 사람 대 포켓몬으로 싸우려는 거야? 배트 하나 갖고?
“말이 되는 소리를… 바보야!”
소년의 어깨를 잡아당김과 동시에 비에 젖은 축축한 발밑이 죽 미끄러졌다. 아, 차라리 다행이었을지 모른다. 구르는 게 달리는 것보다 빠르지 않겠는가. 그대로 두 사람 한데 뒤엉켜 데굴데굴, 데굴데굴, 주먹밥을 굴리듯 나무 뒤편 아래까지 엉망이 되어 굴러떨어졌다. 온몸이 진흙투성이가 되는 건 당연지사다.
그렇게 어딘지 모를 곳까지 굴러와서는 소녀가 먼저 벌떡 일어났다.
“너 바보냐? 아니면 목숨이 여러 개야?”
“네가 방해만 안 했어도 내가 이길 수 있었어, 겁쟁이.”
“하아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너 같은 쪼끄만 녀석은 부란다 한주먹거리도 안 되거든?”
“그런 건 해보기 전에 모른다고.”
“모르긴 뭘 몰라~!”
말이 안 통하는 녀석이라고 단번에 깨달았다. 아으으, 상대하는 쪽이 더 골이 아파 머리를 쥐는 사이 판짱이 무사히 돌아왔다. 치치! 이 기특하고 대단한 녀석. 흙 묻은 주먹밥을 털어내고 판짱에게 떼어주며 소녀는 여전히 입을 비죽 내민 채 불만스러워 보이는 상대에게 손가락질했다.
“겁도 없냐!”
그 한마디가 상대의 버튼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말이다. 소년이 벌떡 일어나 허물어진 언덕을 향했다. 거길 오르면 예의 부란다가 아직 주변을 돌고 있을지 몰랐다. 제 발로 사지로 가는 애를 가만둘 순 없는 일이다. 어깨를 붙잡자 소년의 야구 배트가 위협적으로 날아왔다. 피하지 않은 건, 소년도 끝까지 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덕이었다.
그 행동에 도리어 놀라 주춤한 건 소년 쪽이었다. 당연히 겁먹고 피할 줄 알았는데. 겁이 없는 건 누군지. 기싸움에서 밀렸다는 걸 깨달은 소년이 낯을 붉혔다. 젠장! 아이답지 않은 말투와 함께 가려는 걸 다시 소녀가 살살 달랬다.
“자, 자. 동생 그러지 말고 일단 진정해보라니까. 12살에 부란다를 잡은 아랫집 맥가이버 군을 따라 하지 않아도 된다니깐.”
“맥가이버가 누군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난 네 동생이 아니다.”
“그것도 아냐!”
만담과도 같은 대화였다. 다행인 건 이 바보 같은 대화가 상대의 맥을 풀어버렸다는 정도. 아니면 허물어진 언덕을 다시 오를 수 없어 포기했거나. 다시 바닥에 풀썩 주저앉는 소년은 인제 보니 진흙 이전부터 여기저기 생채기가 보였다. 뭘 하다 온 거람.
이리 와 보라고 소년을 당기며 조금 전 시내의 하류로 향했다.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물에 적시고 소년의 진흙부터 닦아주자 이번엔 또 신기할 만큼 얌전했다. 남이 시중들어주는 게 익숙하기라도 한 것처럼. 기묘한 녀석이다.
“이 근처 사람은 아닌 것 같고, 저 윗마을에서 왔어? 이름이 뭐야?”
“나는…, ……네가 알 필요 없잖아.”
진짜 별난 녀석이었다. 이름이 뭐라고. 푸흥, 코웃음을 치며 소녀는 가슴을 쭉 내밀고 일어났다. 상대 꼬마보다 한 뼘쯤 크다는 으스댐이 있었다.
“난 능란. 방방곡곡 어디로든 배달해드립니다, 4대째 백반명가 만파식적의 란이다. 설마 이 동네 살면서 우리 가게도 모르진 않지?”
“만… 뭐? 그게 뭐냐?”
그리고 여기서 한 번 자신이 믿었던 세계가 부서지는 경험을 한다. 뭐? 우리 가게를 모른다고? 너 대체 어느 시골에서 온 거냐. 목소리가 커지는 소녀를 앞에 두고 배달 음식은 몸에 나쁘대. 어디의 도련님 같은 소리를 하는 소년의 첫 만남이었다.
누군가와 이어져 있다는 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서로 마음이 통했음은. 같은 걸 보고 같은 걸 느끼고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무엇으로 알고 확신할 수 있을까.
개울물에 진흙을 닦아낸 보람도 없게 소낙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요즘은 일기예보가 순 의미가 없다지만 조금 전까지 맑았는데, 그새 나란히 젖어버린 소년소녀는 하는 수 없이 세찬 비를 피해 또 다른 나무둥치 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다행히 두 사람이 2배로 있어도 다 감지 못할 기둥을 가진 거대한 나무는 좋은 비막이가 되어주었다.
“네 포켓몬은?”
“아직 없어. 그래서 잡으려는 거다.”
“아무리 그래도 포켓몬을 맨손으로 잡는 건 몇백 년 전의 이야기라구. 같이 잡아줄 사람은 없어?”
“…….”
거 말 참 아끼는 동생이네. 이럴 땐 깊이 묻지 않는 게 배려심 있는 어른이라고 했다. 더 캐묻는 대신 대나무통을 열자 다행히 그렇게 구르고도 점심 도시락은 무사했다. 이래야지. 만파식적이 자랑하는 대나무향 그윽한 죽순주먹밥이다. 자, 이거 먹어. 자기 점심을 반이나 나눠주는 모습에서 스스로의 그릇의 크기에 능란은 몰래 캬, 감탄하기도 했다.
정작 소년의 반응은 이번에도 그간 능란이 믿어왔던 상식을 무너트렸지만. 무려 음식을 나눠준 거다. 그런데 촌스런 수건이나 묶은 소년은 그것을 수상쩍은 눈으로 보는 것도 모자라 냄새를 맡더니 제가 먼저 먹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닌가. 고맙단 말도 없이. 하아? 내가 독이라도 탔냐? 열받은 능란이 그럴 거면 먹지 말라고 뺏으려 들자 그건 또 싫다는 듯 손을 피하기까지 했다. 뭐냐고, 진짜!
“소년은 밥을 같이 먹는다는 행위가 뭔지도 몰라?”
“몰라. 뭔데, 그게.”
“식사를 한다는 건 잠을 자는 것 다음으로 무방비해지는 순간이라고. 그런 순간을 공유한다는 건 다시 말해서 ‘믿는다’는 의미다. 우리 여기서 서로의 이름도 모르지만─아니, 나만 일방적으로 모르지만─이 순간만큼은 ‘느낌적’으로 이어져 있음을 느끼잔 거야."
순 궤변이었다. 얼버무리고 뭉뚱그려 아마 자기가 뱉어놓고 무슨 말인지도 다 모르겠지. 그래도 가슴을 펴고 자신만만하게 떠드는 그 언변은 잘 모르고 들으면 그럴듯하게 들렸다. 이때부터 이미 싹수가 보인 것이다.
집안 바깥의 사람과 잘 대화할 일 없던 소년조차 그럴듯한 화술에 조금 넘어가, 약간이나마 마음의 틈을 허락하고 주먹밥을 입에 넣을 만했다. 성공적인 영업이었다. 나란히 뺨에 밥풀이나 묻히고 주먹밥을 다 먹어 치운 뒤에야 소년이 먼저 자기 이야기를 꺼냈다.
-부란다를 잡으려고 했어.
그제야 왜 야생의 부란다가 소년을 노리고 쫓아왔는지 알았다. 설마 야구 배트와 몬스터볼만 가지고? 소년이 흥, 고개를 돌린다. 왜 정말 주변 도움은 안 구한 거야. 설마 소년……. 집이 없나. 건드리면 안 될 상처에 닿기라도 한 것처럼 능란의 반응이 무거워지자 까까머리 소년 쪽에서 그거 아니거든! 황급히 부정이 튀어나왔다.
“증명할 게 있었어.”
“뭘 증명해. 소년의 무모함?”
아니라고! 발길질이 나오려고 하자 낄낄 웃으며 가벼운 몸이 점프했다. 너 잡히면 가만 안 둔다. 목에 핏대 선 소년과 잡을 수 있으면 말이지. 능청스런 소녀가 빗줄기 사이를 쏜살같이 빠져나왔다.
부드러운 풀밭 위를 작은 발들이 앞뒤를 다퉈 밟았다. 고인 물이 찰박거리고 튀어 종아리를 적시고 그러다 누구 한 명 죽 미끄러져도 비웃을 뿐 일으켜주지도 않았다. 그럼 금세 씩씩하게 일어나 다시 또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발을 멈추지 않았고 빗줄기 사이로 땀이 주륵 흘렀다. 들이마시는 숨에 젖은 숲의 향기가 폐부까지 들어오고 내뱉는 숨은 달짝지근해 달리기를 멈추고 싶지 않았다.
달리다가 눈이 마주치거든 직감이 말했다. 이 녀석은 멈추지 않을 거라고. 그러면 자존심이 걸렸다. 상대보다 먼저 멈추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더는 달리지 못할 때까지 언덕을 오르고 나무줄기를 뛰어넘어 수풀을 헤치고 뛰고 뛰고 또 뛴다. 가쁘게 차오른 숨이 내 것인지 상대의 것인지도 구분가지 않은 채 머리가 몽롱해질 때까지 달리다가 먼저 발을 멈춘 건 누구였을까.
“네가 졌어, 바보야.”
“너거든, 멍청아.”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호흡을 토해내면서 절대 지지 않았다. 지지 않겠다고 서로 팽팽하게 당기는 밧줄이 두 사람을 이어주었다. 이런 것도 유대라고 볼 수 있을까. 하지만 지금 분명히, 이어져 있어서─… 누군가와 이어져 있음을 확신하면 우린 두렵지 않게 되는 걸까? 어쩐지 아무것도 무섭지 않았다.
집안의 기대, 부응하지 못하는 응원, 하고 싶은 것, 할 수 없는 것, 지금처럼 뛰고 싶은 만큼 뛰게만 해준다면 무엇이든 해낼 것만 같은데. 젖은 풀밭에 드러누운 채 풋내 나는 서로의 얼굴을 응시했다. 분명 무언가 비슷한 것을 느꼈지만 서로 입은 열지 않았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을 섣불리 설명하려는 순간 흩어져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다. 대신 주먹을 맞댔다. 그래, 각자의 자리에서 싸우는 서로를 위해서.
결국 그날은 헤어질 때까지 소년의 이름 같은 건 듣지 못했다. 숲의 위쪽 길로 향하는 것을 보고 ‘역시 윗마을 녀석이었군.’ 하고 짐작에 확신이 서렸을 뿐이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만남은 지나간 인연으로 기억의 저편에 묻혔다. 지금 기적처럼 떠올린 것도 아니다. 과거의 인연은 과거의 것, 지금은 지금. 잠시 떠오르던 기시감은 빗방울 튀기는 소리에 날아갔다. 다만 누군지도 모르던 서로를 응원했던 아이들의 마음이 지금은 결과만이 남아 두 사람을 위한 좋은 밑거름이 되었다. 보라, 훌륭히 자랐다.
빗소리가 차츰 잦아들었다. 사위에 옅은 안개가 깔렸다. 이것도 제법 풍류지? 입만 산 여자가 신발을 벗고 젖은 발을 천으로 닦았다. 기껏 권해줘도 남자는 손을 저을 뿐이었다.
맞닿은 등은 여름 소나기로 씻겨낼 수 없는 열이 아직도 뜨겁게 전해지고 있었다. 이치, 체온이 높잖아. 기댄 등을 꾹 눌렀다. 어린 시절과는 역전된 너른 등이 너는 안 더운 줄 아냐. 반대로 짓눌러 왔다.
인간의 평균 체온 36.5도. 피부가 닿는 것만으로 더워지는 계절에 서로 기대고 앉은 온도가 불쾌하거나 싫지 않다는 건 신기한 일이었다. 첫 만남─기억하는 범위 내에서─만 하더라도 상대와 이토록 가까워질 줄은 몰랐는데.
이 녀석이랑은 정말 맞지 않아. 헤어지면 다신 만나지 말아야지. 그런 결심이나 했었다. 불협화음이었고 오합지졸이었다.
그런데 알아버린 것이다. 사실은 서로 많이 닮았다는 것을.
겁쟁이였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 허세나 부리는 녀석이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비죽비죽 솟아난 가시가 남을 다치게 해도 사과 한마디 제대로 못한 채 도망치기나 했다. 볼썽사나운 기질이었지만 못 고칠 줄 알았다. 이런 나를 누가 좋아하겠어. 누가 친해지고 싶겠어. 그렇게 방어적이 되기나 해…… 그런데 어라, 우리 어떻게 친해졌더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지금은 서로가 좋은 벗이었다.
가을의 끝 무렵에 만나서 발목까지 쌓인 눈을 헤치고 우수수 떨어지는 벚꽃잎을 지나 어느덧 계절은 여름, 한 해를 다 돌아보는 셈이다. 그 사이 둘이서 보내는 시간도 익숙해졌다. 대단한 말 같은 거 하지 않아도 함께 있는 것으로 외로움이 충족되었다.
혼자 있으면 외롭고 누군가와 같이 있고 싶어 한다고? 저 부끄럼쟁이에 솔직하지 못한 녀석이 고독을 순순히 인정할지 모르겠지만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왜, 너도 분명 위로받고 있잖아. 이 시간에.
호우好雨에 호우好友가 함께했다. 좋은 친구는 물에서도 주향을 맡을 만큼 향기로웠다. 여름이 물씬 내렸다. 두 사람의 1년의 마지막 계절이 최절정을 달리고 있었다.
“오, 무지개 떴다.”
“칠색조가 지나갔나.”
이런, 못 봐버렸잖냐. 아쉬운 듯 기지개를 쭉 펴 누르자 상대의 등이 둥글게 굽는다. 그게 우리 눈에 보일 리가 있냐, 멍청아. 잘 받쳐주는가 싶더니 청년이 먼저 몸을 뺐다. 어이쿠, 쓰러지려던 차 그가 손을 뻗어주었다. 비 그쳤다. 가자.
내밀어진 손을 맞잡고 두 다리 스프링처럼 튀어 올랐다. 얌전히 좀 일어나라. 핀잔에 이거 하나 못 버티냐. 받아치는 건 이제 그저 일상이었다. 단단히 쥔 손은 굳이 풀 이유가 없어 내내 잡고 있었다. 내내 이어진 채였다.
손 내밀 용기를 얻었고 거절당하지 않을 믿음을 키웠다. 관계를 겁내던 소년소녀가 어느덧 부쩍 자라 숲을 뒤로했다.
숲만이 기억해 두 사람의 재회를 축하한다. 우리는 이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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