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이 귀하
序章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산길을 걷다 보면 호랑이가 튀어나와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떠들던 그 시절, 인간은 생태계의 최강자 위치를 차지하지 못한 채 호환마마와 요괴, 전쟁, 여러 무서운 것들 사이에서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었다. 그 당시의 인간은 호랑이든 요괴든 인간이 아닌 것들이 자꾸 인간을 괴롭힌다고 원성을 높였지만 사실 누구보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은 아직 모르는 듯 했다. 어리석기도 하지. 그러니 인간이다.
피비린내 한복판에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를 한 여자가 사뿐히 나타났다. 반투명하게 짠 옷감이 날개처럼 살랑거렸고 높이 묶은 머리카락은 나이 들어 희게 샌 것과는 다른 생생한 옥색 도는 백발로, 옷자락과 함께 나풀거리니 배경을 떼어놓고 보면 제 앞마당으로 마실이라도 나온 줄 착각할 지경이었다. 땅이 미처 흡수하지 못한다는 피 웅덩이 하나 밟지 않는 걸음이 선녀처럼 가뿐했다. 발끝이 향한 곳은 뒤집어쓴 피가 끈적하게 눌어붙은 머리 검은 짐승, 아니 소년 앞이다.
“요오, 소년. 맛있어 보이는 얼굴인걸.”
기가 찬 첫 만남, 첫 인사였다.
인간은 동물을 잡아먹고 동물은 인간을 잡아먹는다. 그런데 요괴는 인간을 잡아먹지만 인간은 요괴를 잡아먹지 않는다.
“왜냐면 인간은 너무너무 약해서 요괴에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걸랑. 그러니까 정확히는 ‘잡아먹지 않는’ 게 아니라 ‘잡아먹지 못한’ 거란 말씀. 으핫, 뭐 인간만이 아니니까 너무 억울해 하지는 말어. 사람이든 소든 토끼든 할 것 없이 요괴에게 먹히고야 마는 건 그만큼 우리가 먹이사슬의 제일 위에 있다는 뜻이니까.”
그러니까 소년도, 소년의 가족도 요괴에게 잡아먹히고 만 것은 소년이 길을 걷다가 주렁주렁 열린 사과나무 가운데 하나 골라 따먹은 거랑 그렇게 다르지도 않단 뜻이야. 어때, 갑자기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
듣는 사람 입장에선 궤변이 짝이 없는 말을 혀에 기름칠이나 한 것처럼 떠들던 여자가 입을 길게 찢었다. 하얗게 번뜩이는 이, 희게 나부끼는 머리칼, 구불거리는 두 갈래의 머리칼이 바람결을 따라 허공에서 춤추는 광경은 바람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이런 풍경일까 싶었다. 나쁘지 않았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볼 풍경으로. 아니, 제법 아름다웠다.
태어나서 이토록 하얀 것은 그다지 본 적 없었다. 겨울이면 눈이 허리까지 쌓이곤 했지만 그 흰 것은 굶주림의 상징이었다. 눈밭을 파헤치고 파헤쳐 다 말라비틀어진 무의 밑동이나마 건져낼 때까지 손발을 얼리는 저주스러운 것이기도 했다. 흰 것은 소년을 배고프게 하거나, 혹은 고귀한 나머지 손도 대지 못하던 것이었는데 이렇게 눈앞에 가까이 있다니. 무심코 덜 자란 손이 뻗어져 머리칼을 쥐었다. 여자가 놀란 눈을 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채로도 소년은 ‘요괴도 거짓말을 하는구나.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긴. 이렇게 까딱했는데.’ 상대에게 한 방 먹여주었다는 얄팍한 희열을 느꼈다. 이제 죽어도 좋을 것 같았다.
─다음에 이어지는 여자의 말만 아니었어도 말이다.
“웩, 맛없어.”
맛없어?
“이몸, 요괴로 적잖은 세월을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나 맛없는 인간은 처음이라니까. 소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그걸 나한테 물어봐도.
“오, 하지만 이건 이거대로 제법…… 그렇지. 그런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 맛없는 인간을 100년 잘 숙성시키면 어디서도 먹어본 적 없는 극상의 맛이 된다고.”
애초에 인간은 100년이나 살지 못해, 멍청아.
“결정했다. 소년, 이몸과 100년을 하자!”
이런 식으로 살려달란 게 아니었다. 그러나 생사의 결정권은 이미 소년의 손아귀를 빠져나갔다. 삶도 죽음도 스스로 정하지 못한 채 소년은 그렇게 이상한 여자에게 주워졌다.
하는 김에 이것도
https://www.tistory.com/event/write-challenge-2024
합작 떨어진 김에 끄적끄적. 어디로 보나 인간 시점으로 진행될만한 글의 전개다 보니까 애매해졌어요. 남의 캐 조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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