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의 서막
전하고 싶은 이야기
: 루 모겐스
*모바일이나 창을 줄여서 보는 편이 읽기 편할 거예요:)
#. 어느 밤이었어,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일상의
「잘 지내.」
「응, 또 만나.」
머나먼 기억이다. 겨울이 거듭되는 그곳에서 겪은 이별, 이별 후에 있을 재회의 약속.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설고 가슴 벅차오르던 시간 속에서 이상하게 그 때만은 무언가 다르다고 느꼈다.
많고 많은 일들 가운데 딱 한 순간, 그 순간 특별하게 울리던 심장 박동. 멀어져가는 그의 마차를 보면서 느낀 두근거림과 쓸쓸함, 그리고 애틋함. 스스로도 깨닫지 못했던 첫 자각이 아니었을까.
“루, 별을 보러 가지 않을래?”
조금씩 쌀쌀해지던 어느 날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보내던 많고 많은 날 중 하루였다. 어둑해진 하늘을 창밖으로 올려다보던 에슬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여상스러운 어조로 위를 가리켰다. 그래, 하고 답하는 그와 함께 따뜻한 잔을 하나씩 들고 지붕에 올랐다. 높은 곳에 올라앉아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언제든 레기르로 돌아가 버린 듯한 기분이 든다. 하늘이 높아졌어. 손을 쭉 뻗어 손바닥으로 별이 빛나는 곳을 가리는 시늉을 하다가 돌아보면 늘 그랬던 것처럼 그가 있었다.
그렇지, 그가 웃고 있었다. 그 미소. 에슬리는 문득 제 얼굴을 만져보았다. 의식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그녀 또한 그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 듯 했다. 의식하지 않을 만큼 당연하게도, 그만큼 쌓인 두 사람의 시간이었다. 뺨을 만지작거리다 손을 내리고 에슬리는 그의 눈을 찾았다. 이제는 가리는 일 없이 드러낸, 색이 다른 두 개의 눈동자. 마치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는 것 같아 어느 쪽의 색도 나는 좋아해, 그렇게 생각했다. 때문에 말할 생각이 든 게 아니었을까.
“있지, 루. 당신은 나를 언제나 특별하고 소중한 친구라고 말해줘.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는 루에게 제대로 전해준 적이 없는 것 같아. 이상하지. 내게도 루는 더없이 소중하고 유일한 상대인데, 말을 아끼다니. 그러니까, 내게 루가 어떤 존재인지. 오늘은 그 얘기를 해보려고 해.”
당신이라면 내 말을 기꺼이 들어주겠지. 그런 믿음과 함께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에슬리는 가볍게 걸터앉은 아래로 발을 휘저었다.
#. 내가 살려고 생각한 이유는
“조금 옛날 얘기부터 들어가 볼까.”
이트바테르 안에서도 주택단지가 주로 모인 이곳은 밤이 되면 제법 조용한 편이다. 그러나 지붕 위에 올라와 시선을 멀리 하면 저 너머로 밤이기에 더욱 화려한 붉은 등이 줄지어 있는 게 보였다. 그가 이곳을 거주지로 정하고 처음에는 붉은 등이 있는 쪽을 일부러 보지 않곤 했었지. 이제 다 괜찮다고 말은 했지만 몸에 밴 습관이란 쉽게 지워지는 게 아니어서 종종 움칠했다.
“예전에 루가 내게 치열하게 살아온 것 같다고 말해준 적이 있는데 기억나? 그 전까지 아무도 내게 해준 적이 없던 말이야. 나는 그렇게 사는 게 당연한 줄로만 알았어. 언제나 외줄 위에 올라탄 것처럼 아슬아슬한 것도 사람들의 적의를 상대하는 것도 숨 쉬는 것조차 남의 눈치를 보면서 한시도 긴장을 풀지 못하고 의지할 상대 한 명 없는 하루하루가 내게 주어진 유일한 것이었어.”
이렇게 살길 바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외길이었던 그녀에게 다른 선택지란 남들에겐 다 주어져도 나만은 주어지지 않는 그런 것이었다. 부모의 손을 잡고 가는 아이를 보며 허전한 제 손을 바라본다거나 당연하다는 듯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이웃 사이에 제 자리가 없다거나 모두가 즐겨야 마땅한 축제를 그저 멀찍이서 지켜만 보던 삶.
따뜻하고 평화롭고 행복한 웃음이 가득한 세계. 그녀에게는 그야말로 동화속의 이야기. 그리고 제 역할은 책장을 넘기는 것이 전부. 한 때나마 속해있었지만 지금은 쫓겨나고 만. 그래서 더욱 갈증을 느꼈고 제가 갈증을 느낀다고 내비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숨기던.
“깊이 절망하고 좌절하기도 하고, 이대로 주어진 운명에 굴복하고 바닥을 기며 살아가야 할까. 원망할 상대도 찾지 못하고 쓸쓸한 밤을 보내고 홀로 아침을 맞이하며 하루를 거듭해갔어. 태어난 게 잘못이라고, 죽어버리란 말도 몇 번이나 들었어. 발작이 일어날 때면 차라리 죽으면 이 고통도 느끼지 않을 텐데, 수십 번을 생각했어. 심지어 내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은 당장이라도 기회만 있으면 죽고 싶어서 안달을 내는 모습을 보여주잖아.”
“그런데 말야, 이상하지. 정작 그렇게 살면서도 진심으로 죽음을 바란 적은 없었어. 언제나, 언제나…… 필사적으로 살기 위해 발버둥 쳤어. 왜 살고 싶은지 이유도 모르는 채 이대로 죽을 수 없었어. 한 때는 오기인가 생각하기도 했어. 모두가 내가 죽길 바라니까, 그렇다면 순순히 죽어줄 수야 없지. 당신네들이 바라는 것처럼 되어주진 않을 거야. 밟으려들면 밟으려들수록 꼿꼿하게 고개를 세워서, 그러면 도리어 분해하는 표정을 보면서 한 방 먹여줬다고 잘난 듯한 기분에 취하기도 하고.”
“그러다 후만이 기어코 죽어버리고 말았을 때. 오롯이 세상에 혼자 남아버린 그 순간에. 그 때야말로 나는 진심으로 죽고 싶었던지도 몰라. 이제 이유도 모르는 이 삶에 대한 집착을 버리자고. 그만 놓자고. 그럼에도 끝내 죽지 않고 서쪽으로, 다시 서쪽으로 향해버리고 말았어. 어째서였을까? 왜 나는 그 순간조차도 죽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살길 간절히 바랐던 걸까.”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했던 이유는 조금 나중에 깨닫게 된다. 손바닥을 펼치다 꾹 말아 쥔다. 그 안에서 피어오르는 온기에 호선을 그리는 입꼬리가 아주 조금 떨렸다.
“사람의 온기를 잊지 못해서.”
긴 갈망이었다. 갈망하고 갈증을 내고, 그러다 언제부턴가 무엇을 바랐는지조차 잊었다. 가질 수 없는데도 욕심내는 건 비참하니까 차라리 바라지 않는 척, 지웠다. 사막을 구르는 모래알, 바람에 부서지는 바위, 물기 없는 바람이 거친 땅 위를 훑고 지나가면 빛바랜 종이처럼 누렇게 펼쳐지는 풍경을 보며 제 욕심도 천천히 말려 바스러트리려 했다. 아무도 잡아주지 않던 손, 누구도 있어주지 않던 옆자리, 이미 까마득해진 사람의 온기, 괜찮아. 없어도 돼. 필요하지 않아. 마를 줄 모르던 갈망을 사막에 전부 파묻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제 마음에 파묻어버린 줄을 그 땐 몰랐다.
모르는 채로 그리움을 새기고, 모르는 채로 삶을 포기하지 못하고, 모르는 채로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마냥 생을 욕심낸 끝에 사실은 모르지 않았음을 알았다.
『나는 늘, 네 곁에 있기로… 했으니까.』
그의 말을 들은 그 날부터.
그 날의 기억은 어쩐지 선명하지 않다. 빛이 번진 듯 조금 눈부시게 흐릿하여, 잘 떠올려보려고 해도 그저 먹먹했던 감정만이 가슴에 파문을 그렸다. 김이 낀 유리창을 앞에 둔 것처럼 눈을 깜빡이다 시선을 옆에 앉아,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그에게 향했다.
“나는 어쩌면 오랫동안 그 말을 기다렸던 건지도 몰라. 곁에 있어주겠다고, 함께 살아가고 싶다고 말해줄 사람을 아주 오랫동안 바라왔던 걸지도 몰라.”
“그런데 루가 기다리던 말을 해준 거야. 아하하─, 그 순간엔 듣고도 잘 몰랐어. 어째서 그 말이 가슴에 남았는지, 왜 이렇게 먹먹한 기분이 드는지. 그러다 차츰 의미를 깨달았어.”
“루가 나의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는 걸. 내가 살고 싶은 이유가 되었다는 걸.”
“루와 함께 살아가고 싶다고 꿈꾸게 되면서 나는 더욱 힘낼 수 있었어. 하루를 기쁘게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어.”
머지않아 죽을 거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눈앞이 캄캄했다. 다가오는 죽음이, 새어나가는 생명이 무서워 견딜 수 없었다. 이대로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이제껏 필사적으로 살아온 의미를 잃을까봐 겁을 먹기도 했고 차라리 전부 체념한 채 모든 것을 내려놓을까도 생각했다. 지금까지 넌 충분히 애썼어. 그러니 이제 그만 포기하고 편해져. 누군가 귓가에 그렇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지.
그럼에도, 모든 걸 포기하고 싶던 그 순간에도 끝내 무릎을 굽히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벅차오르는 감정에 에슬리는 흘러나오는 미소와 함께 옆에 놓인 그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쳤다. 그리고는 장난기가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질문을 던져보았다.
“챠콜이 강한 이유를 알아? 바로 소중한 사람이 있어서야.”
“당신의 손을 잡는 기쁨을, 당신과 같은 시간을 보내는 행복을 알아버려서. 오늘보다 따뜻할 내일을 기대하게 되어서 나는 절망한 채 주저앉을 수 없었어. 힘낼 수밖에 없었어.”
“내게 루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하고 유일한 존재야. 내 살아갈 이유야.”
언제나 말해주고 싶었어. 루가 내게 유일하다는 것을.
……여기까지만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고 조금 생각해버리고 말아. 여기까지였다면 괴롭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그녀가 해주고 싶은 말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잡은 손을 놓고 살짝 거리를 둔다.
“있지, 루는 그 때 어떤 생각으로 그 말을 해주었어? 사실은 아주 옛날부터 묻고 싶었어. 늘 곁에? 루의 늘은 언제부터 언제까지야? 내게 또 상실을 경험시키지 않는다고 약속해줄 수 있어? 절대로 떠나지 않고 있어줄 거야? 그렇게 말이지, 당신의 말이 기쁘면서도 두려운 것이어서 안심할 수 있도록 답을 구하고 싶었어. 동시에 한편으로는 원하는 답과 다를까봐 묻지 못했어. 당신의 약속이 내가 생각한 무게와 다르면 어쩌지. 내 바람이 짐이 되면 어쩌지 하고.”
“이상한 고민일까. 하지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당신과 내가 다르기 때문에.”
#. 괜찮지 않더라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다. 조금 전까지의 흥분은 거짓말처럼 식어 밤바람이 감도는 주변의 공기와 꼭 좋을 정도로 섞인 애매한 온기가 담긴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당신과 내 마음이 같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 괜찮을 줄 알았는데 사실은 아니었나봐.”
생각보다 목소리는 담담했다. 담담하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바르르 떨리는 주먹을 필사적으로 움켜쥔 채 고개를 들다가, 눈이 마주치자 다시금 아래로 떨어트렸다. 도저히 마주보고 말할 수 없었다. 그는 무슨 표정을 짓고, 무슨 생각을 하며 내 말을 들을까? 생각이 알고 싶으면서 알기에 두렵다. 그러나 해야만 하는 말이었다. 한 번 더 눈꺼풀을 닫았다가 질끈하고 다시 뜬다.
“내게 루는 너무나 소중한 사람이어서 곁에 있고 싶고 손을 잡고 싶어. 여기까지는 루와 같지?”
“하지만 말이지. 하지만──”
“……역시 안 되겠어.”
“좋아해.”
고백은 호흡을 하듯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루가 말하는 의미와 달라. 손을 잡거나 안아주거나, 그런 걸로는 만족하지 못할 만큼 좋아하고 있어. 루가 만져줄 때면 떨리고 두근거리고 손이 떨어질 때면 아쉬워. 루를 보고 있으면 키스하고 싶고 그보다 더한 것도 하고 싶어.”
밤을 닮은 눈동자를 마주한다. 그 속에 일렁거리는 감정은 부러 못 본 척 시선을 조금 아래로 내리며 콧등으로 이어지는 선을 따라 손가락을 뻗었다. 조금 열린 그의 입술 위를 검지와 중지를 붙여 살며시 누르고 호흡을 멈추며 다시 한 뼘 더, 천천히 다가가 온기가 피어오르는 제 손가락 위로 얄팍한 입맞춤을 하였다.
여기까지.
손가락이 만든 이 짧은 거리까지가, 허락된 아슬아슬한 선.
순간이었다. 동시에 영원이었다.
몸을 떼어내고 손가락을 말아 접어 주먹 쥔 채 그 위로 고개를 떨어트렸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아 진정할 시간이 필요했다. 주먹 쥔 피부에 제가 느끼기에도 열이 오른 숨이 닿았다. 엔진이 폭주한 증기기관차처럼 가빠진 숨을 뱃속으로 집어삼키며 에슬리는 지금부터 낼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바랐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보인 건 있는 힘껏 만들어낸 미소.
“나는 루를 욕심내고 있어.”
“계속 말하고 싶었어. 좋아한다고 더 많이 말하고 싶었어. 나는 루를 좋아해. 좋아해서 마음이 아플 만큼 좋아해.”
몸의 아픔은 둔감해도 마음의 아픔은 똑같이 느낀다고 했지. 하지만 이런 아픔은 처음이었다. 누군가 심장을 옥죄는 듯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운 통증. 호흡과 함께 한숨이 섞이고 한숨 아래로 고백이 숨었다.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매일매일을 좋아해.
좋아해서──……
“……미안해.”
#. 사랑받고 싶다고, 바라고 원하고 욕심내고
어째서 또 사과가 나와 버린 걸까. 이런 말을 전하고 싶었던 게 아닌데. 그러나 한 번 터진 말은 멈추지 않았다. 눈을 찡그리고 더듬거리듯 한 마디, 한 마디를 끊어 내뱉었다.
“곁에 있겠다고 약속했는데, 지키지 못해서. 당신과 다른 마음을 가져서 미안해.”
“당신과 내 마음이 같지 않아서 괴로워. 당신이 말하는 특별함과 내가 말하는 특별함이 같지 않아서 괴로워.”
“내가 루를 좋아하는 것처럼 루도 나를 좋아해줬으면 좋겠어. 내가 루를 욕심내는 것처럼 루도 나를 욕심내줬으면 좋겠어. 나는 있지. 나는───”
그러다 다시 한 번 숨을 크게 삼켰다. 한 번도 입 밖에 내본 적 없는 말. 한 번도 욕심내본 적 없는 단어. 하지만 욕심내버리고 말았지. 어쩌면 가장 욕심내선 안 될 상대에게. 이제 말은 멈출 수 없었다.
“나는, 나는 있지. 루에게 사랑받고 싶어.”
눈가가 화끈거린다. 뱉어낸 숨이 뜨거웠다. 이런 얼굴 보이고 싶지 않아. 반사적으로 손을 들려다 주먹을 쥐고 꾹 참아냈다.
아냐, 이런 얼굴까지 전부 보여주고 싶어. 전부, 전부.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어. 심장이 쿵쾅거린다. 빠른 맥동에 피가, 열이 금방이라도 터져나갈 듯 몸 안을 맴돌았다. 얼굴에 불이 붙을 것 같아. 숨을 쉬는 법조차 잊어버릴 듯 기분이 아득해진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루에게. 다른 사람이 주는 행복이나 다른 사람이 주는 사랑이 아니라 루가 주는 행복을, 루가 주는 사랑을 받고 싶어.”
“그리고 루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사람은 나였으면 좋겠다고, 루에게 좀 더 많은 사랑을 주고 싶다고 바라버려. 이런 마음을 가져서 아주, 괴로웠어.”
겹쳐 올린 두 손으로 가슴께를 지그시 누른다. 느껴지는 고동은 조금도 느려질 줄을 몰라 이러다 고장나버리면 어떡하지? 그런 걱정까지 들 정도였다. 그러나 고장이라면 이미 예전부터 나 있던 것 같으니까 이제 와서의 이야기가 아닐까.
“루가 나를 다치게 할지도 모른다고 말해주었을 때 루가 주는 아픔이라면 그마저도 좋다고 생각했어. 루가 나를 욕심내준다면 기꺼이 그 손아귀에 붙들리고 싶다고 생각했어.”
그는 스스로가 지닌 충동이 두렵다고 했었지. 내면에서 솟는 감정이 무섭고 이상하다고. 그 때 그에게 이상한 게 아니라고 한 말은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하나도 이상하지 않아. 이상해도 괜찮아. 나도 비슷하니까. 당신의 그 말을 듣고 기쁘다고 생각했으니까.
“당신은 나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나는 당신이 나를 아프게도 하고 슬프게도 할 수 있어서 좋아. 내게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건 루뿐이야.”
“하지만, 그래선 안 되는 거겠지. 겨우 루가 스스로의 행복을 바랄 수 있게 되었는데.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는데 그걸 어쩐지 서운하다고, 이상하다고 느끼고는 이대론 안 되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런 거 역시 친구가 가질 마음이 아닌걸. 당신이 바라는 소중한 친구가 아냐.”
“……이런 마음으로 당신의 곁에 있을 수 없어. 그래서,”
조금 참담한 기분이 들어 결국은 손등으로 눈가를 덮었다. 뜨겁고 건조한 피부에서는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았다. 그대로 잠시 얼굴을 가리고 그대로 한숨을 뱉었다. 어지러웠다. 사실은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이 순간이 모두 꿈인 것만 같았다. 그렇지, 꿈일지도 모르겠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곱씹던 꿈. 그러나 결국은 꿈으로 끝나던 나날들.
쭉 말하고 싶으면서도 말하지 못했다. 동시에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기도 했다. 소중한 친구라도 좋으니 곁에 있고자 그의 것과 다른 마음을 억누르고 참으려고 했다. 사실은 지금 그에게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 순간까지도 제 선택이 옳은 것인지 후회하지 않을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세상에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란 있을까. 옳은 선택이란 무엇이지?
그에게 좋아한다는 말도 하지 못한 채로? 아니, 그녀는 전하고 싶었다. 가득한 이 감정을.
“나는 아주 기뻐. 루에게 드디어 말했어. 루를 좋아한다고. 무척이나 많이 좋아한다고.”
끝내 터진 건 웃음이었다. 곧잘 짓던 함박웃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세상에서 이만큼 루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루가 사랑받는 사람이라고 알린 것만으로 나는 이 말을 번복할 마음이 들지 않아.”
“그치만 그저 좋아하는 채로는 도저히 안 되겠어. 이런 마음인 채로 계속 루의 곁에 있었다간 욕심이 나를 잡아먹어버릴 것만 같아서, 자꾸만 차올라서, 흘러넘쳐서,”
“루의 다정함이 때론 잔인하게 느껴져. 그래서──……,”
말을 멈추고 얕게 고개를 젓는다. 잔인한 것이 있다면 그의 다정함을 굴절시켜버리고 마는 그와 자신의 간극이겠지.
“이제 당신의 곁에 내가 없어도 될 것 같아서 겨우 말을 꺼낼 수 있었어. 우습지. 루의 곁에서 내가 없어선 안 될 존재이길 바라면서 동시에 루의 곁에 나 외에 다른 사람이 생겨서 겨우 아, 드디어 나도 이 집착을 그만 둘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어. 루가 내게 달아준 특별함에 매달리지 않아도 괜찮을까 하고 말야.”
지금의 관계가 변하는 것을 잃는 것이라 여겼다. 그를 잃는 게 두려워 지금의 형태를 유지하려 했다.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변하는 게 잃는 게 아니란 걸 겨우 받아들이고 나서야 말할 수 있었다.
“이상하지. 내가 떠나고 나서 루가 나를 떠올려주길, 생각해주길 바라면서 동시에 나를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길 바라. 루를 떠올리면 굉장히 두근거리면서 또 아프기도 해. 모순투성이야. 명쾌하지 않아. 태어나서 몇 번을 겪는 ‘처음’인 걸까.”
“정말로 이상하지. 기쁘면서도 슬퍼. 슬픔조차도 기뻐.”
이제 마지막이다. 한 번 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주먹을 굳게 쥐었다. 그리고는 이대로 녹아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뜨거워진 얼굴로, 달아오른 눈으로 필사적으로 그를 응시했다.
“어째서 좋아하게 된 걸까. 한참을 고민했어. 내 곁에 있겠다고 처음 말해준 사람이 당신이라서? 만약 다른 사람이 먼저 말을 했다면 그 사람에게 지금과 같은 감정을 느꼈을까? 알 수 없어. 그건 지금의 내가 겪지 않은 일인걸. 결국 내게 누구보다 먼저 말해준 건 당신이고 내가 좋아하는 당신은 그 한 마디 말 외에도 아주 많아. 좋아하게 되는 데 이유 같은 건 없는 거야.”
“그리고…… 사랑받는 데 자격도 필요하지 않아.”
“그러니까 이것 또한 내 욕심이지만 루가 부디 사랑받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당신은 사랑받아도 괜찮은 사람이야.”
“좋아해, 루.”
아무리 반복해도 부족한 것만 같고 몇 번을 거듭해도 입에 담을 때마다 기뻐지는 울림이 있다. 혀끝에 감기는 달짝지근함이 두근거려 그에게 직접 이 말을 전할 수 있는 것을 다행이라 여기며 에슬리는 그를 향해 눈을 휘었다.
“아주아주 많이. 무척이나. 굉장히.”
“더없이 많은 사랑을 당신에게.”
#. 긴 이야기였어. 긴 밤이었고. 여명이 찾아오기 전에 내려가야지
불이 붙은 듯 뜨거운 뺨 위로 찬바람이 기분 좋게 스친다. 밤인 것을 다행이라 여겼다. 전부 토해낸 기분이었다. 이제껏 속안에서 그저 끓기만 하던 말들을 전부, 전부.
후우우, 뱉어내는 숨이 달다. 숨을 뱉을 때마다 안쪽에서부터 설탕가루가 묻어나듯 전부 달았다. 이런 스스로가 도무지 낯설어서 푸슬푸슬 웃다가 몸을 일으켰다. 전하고 싶은 것은 다 전했을까? 부족하진 않을까. 그에게 잘 닿았을까. 덕지덕지 달라붙은 생각을 무릎과 함께 털어내고 다시 한 번, 밤이라 다행이었다. 제 뺨의 뜨거움을 감추는 만큼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또렷이 보기가 두려워. 슬그머니 시선을 하늘로 향한 채 아무렇지 않은 척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내게 살아갈 이유를 주어서 고마워. 이런 감정을 알려주어서 고마워. 루에겐 수많은 처음을 받았어. 루 덕분에 수많은 처음을 경험했어. 앞으로도 루가 내게 특별하고 소중한 사람인 건 변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이대로는 균형이 맞지 않아. 내 마음의 무게가 루의 마음의 무게와 비슷해지도록 덜어낼 거야. 루의 좋아해와 내 좋아해가 같은 무게가 되도록. 그러기 위해서 조금 루와 거리를 두려고 해.”
“비록 곁에 있지 않아도 나는 언제든 루의 행복을 바라고 있을 거야. 당신이 내 행복을 바라는 만큼.”
“그러니까, 으음. 그럼 이제……”
아아 정말. 이럴 땐 어떤 얼굴로, 어떤 인사를 건네야 좋을까. 이런 것도 처음이니까 어쩌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다녀올게는 안 돼. 스스로에게 여지를 주고 말 거야. 이런 걱정을 해버리는 것부터가 미련이라는 뜻이지만……, 쓴웃음이 새려는 걸 억누르고 표정을 가다듬는다.
가장 추운 곳에서부터 시작되었던 이야기, 가장 뜨거운 시기를 거쳐 익어가던 이야기가 어느새 여행을 떠나기 좋은 계절을 맞이하였다. 지금이라면 가볍게 수확하여 털어내 보낼 수 있을까. 허리를 펴고 시선을 그에게 향했다.
“──잘 지내.”
고르고 고른 인사를 남겼다. 예쁜 미소를 지어보였다.
거기까지였다.
안녕하세요 게루님! 엄청 새삼스러운 인사네요. 갑자기 장문의 로그가 날아와서 당황하셨을 것도 같고 엔딩 나고 2달이 넘어서 드리게 된 고백로그에 어안이 벙벙하실 것 같아요. 모쪼록 불편하게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ㅅ;) 원래라면 좀 더 일찍 드리려고 했는데 대체 왜 10월…….
이것은 (재)고백로그가 맞지만 ‘고백’로그보다는 고백‘로그’로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사랑해, 라는 고백에 나도, 라거나 미안, 같은 답을 바라고 쓴 것이라기보다는 그렇구나. 네 마음을 알게 되었어. 라는 식으로 알리고 싶었어요. 루가 사랑받고 있고, 에슬리가 루를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걸.
음 그러니까 이제까지의 다른 로그들과 마찬가지로 이 글도 에슬리의 서사 중 하나로 읽어주세요. 루를 좋아하는 마음은 에슬리의 삶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에 형태로서 표현해보고 싶었어요. 시점은 아마 루가 이트바테르에서 생활하면서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을 즈음일까요. 1, 2년쯤 지났으려나. 루의 곁에 리우도 있고 이트바테르 주민들이랑 잘 지내게 되고 위에서 말한 것처럼 루가 천천히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짜나가는 걸 보면서 서운한 한편 안심하게 되면서 결심이 섰을 거예요. 에슬리는 저러고 아마 훌쩍 여행을 다녀오겠네요. 그리고 마음의 정리가 좀 되어서 괜찮아지면 돌아올 거라 생각해요.
게루님이 졸작 준비로 시간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많이 각박한 걸 탐라에서 보고 있어서 괜한 부담을 지우는 건 아닐까 고민했는데(목표는 개강 전에 드리는 거였답니다 분명 쓰기 시작한 건 7월이었는데 두 달을 붙잡고 썼네요;▽;) 이 이상 오래 끌었다간 에슬리가 루를 얼마나 좋아하고 있는지, 에슬리에게 루가 어떤 의미인지 전할 기회를 놓쳐버릴 것 같아 겨우 끝냈답니다.
답은 이미 지난번의 대답으로 들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 당시에도 말씀드렸지만 사실은 엔딩 후에 차분하게 고백하고 싶었는데 그 순간 참지 못하고 저질러서, 전하지 못한 이야기가 많았던 게 내내 마음에 걸렸기 때문에 이번 로그는 그저 한 번 더 제대로 전하고 싶다는 게 소기의 목적이고 그러니까 답은 너무 부담 갖지 말아주세요. 앗 그치만 루가 이야기를 듣고 나서 무슨 생각을 할지는 조금 궁금하긴 하네요. 헤헤<
어…… 그래서 이제 좀 속 시원하게 외칠 수 있겠네요 루 모겐스 아직도 많이 좋아하고 있어! 여전히 좋아해!! 탐라에서 썰 풀 때마다 아 이거 박살 짓 아닌가;; 너무 간 거 아닌가;; 친구가 이래도 되나;; 혼자 의식해서 굉장히 조마조마한 기분이었는데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에슬리의 반응은 여전히 루를 좋아하기 때문에 나온 것이었답니다.
게루님이 관켸페어 커뮤 제안해주셨을 때 무척 기쁘고 기대되던 것과 별개로 관계를 어떻게 짜서 가야 하나 고민했어요. 경우에 따라서 소중한 친구 관계일 수도, 짝사랑 관계가 나올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말을 남기고…… 어어, 이제 어떻게 끝마무리 지어야 될지 모르겠네요. 에슬리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루의 소중함이 에슬리의 소중함과 조금 다르지만 루 역시 에슬리를 소중히 생각해주고 있다는 건 알고 있어요. 그 점 굉장히 기쁘게 생각하고 있고요. 이제까지도 에슬리와 좋은 관계로 있어주어서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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