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조각을 떼어온 듯 새파랗던 날개가 오늘도 까맣게 젖어 있다. 어제보다 조금 더 까맣게 젖어 있었다.
장마가 그치지 않고 있었다.
#.2
“에슬리. 좋은 아침이야!”
“좋은 아침, 랏슈. 잘 잤어?”
제 물음에 그는 느리게, 호흡하듯 눈을 몇 번 깜빡이다 곧 초승달처럼 휘며 물론이지. 하고 답하였다. 물음과 답 사이의 간극은 서로 건드리지 않았다. 날개와 다르게 여전히 초순(草筍)과 같은 눈동자는 맑은 빛을 보였다. 손을 뻗어 그 눈 꼬리를 만지자 잔웃음소리가 들린다. 그의 기분을 따르듯 전보다 더 자란 첫 번째 날개가 미풍을 만들어, 손등을 간질이는 바람에 눈가를 문질러주던 손을 조금 더 뒤쪽으로 뻗으려하자 일순 그가 굳었다. 그러나 머뭇거림은 찰나였다. 어깨가 느슨해지며 보여준 암묵적인 허락에 에슬리는 안도 비슷한 것을 느끼며 뿌리 끝까지 검게 젖은 두 번째 날개를 살살 쓰다듬었다.
손바닥에 닿는 날개는 따스하고 물기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검게 변한 곳에서는 언제나 물이 고인 냄새가 풍겼다. 볕에 닿지 못해, 그저 고인 채 썩어가는 물비린내.
언제였더라. 벌써 오랜 옛날로 변해버린 기억 속의 그는 걸러지지 않은 적의와 혐오, 불편한 감정들과 마주하고 있었다. 높이 든 시선, 하늘을 응시하던 눈, 그러면서도 몸은 밑에서부터 무언가가 당기듯, 가라앉듯 무거운 공기에 둘러싸여 침잠되는 것처럼 보여 지켜보는 그녀의 마음까지도 불안하게 술렁였었지.
손을 뻗자 제 날개를 더러운 것이라도 되듯 숨기던 그.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가 그녀의 손을 먼저 거절한 일은.
지금은 이렇게 거절하지 않지만. 맑게 터지는 웃음소리에 눈을 마주친다. 나도, 에슬리. 나도! 두 손을 뻗어오는 그에게
아주 잠깐 흠칫했다.
#.3
아침 먹으러 갈까? 오늘 메뉴는 뭘까. 그러고 보니 어제 또 편지가 왔는데…… 사소한 대화를 나누며 긴 복도를 걸었다. 오늘도 햇볕은 보이지 않았다. 흐릿한 창밖을 보다가 거둔 손으로 습관처럼 목가를 쓰다듬었다.
“혹시 또 상처가 났어?”
“으응? 아냐, 말끔한걸. 봐.”
걱정스럽게 닿아오는 시선에 손을 떼고 보란 듯 굴어준다. 당연히 상처는 없었다.
당연히 ‘남아있지 않았다.’
이리저리 꼼꼼히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는 그의 모습에 불쑥 든 건 어떤 의문. 랏슈, 어젯밤 일을── 그러나 말은 나오기 전에 삼켜졌다.
아냐, 아무것도.
#.4
하늘이 흐린 날이면 아침과 새벽의 경계가 모호하고 밤과 낮 사이가 흐릿해진다. 근래 그녀의 구별법은 냄새였다. 마른 풀의 냄새가 나면 해가 떠 있는 시간, 그리고 지금처럼 눅눅한 냄새가 풍겨오면 밤이다.
변함없이 찾아온 밤이다.
조금 젖은 듯 축축한 손가락이 목가를 눌렀다. 더듬듯, 그렇게 억세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럼 안 돼, 랏슈. 여기를 이렇게. 숨통을 눌러야지. 그건 조금 잔인한 속삭임이었을까. 그의 손위로 제 손을 겹치며 힘을 주어야 할 곳을 더듬어 가르쳐주었다. 목을 조르는 손이 다시 미끄러지듯 힘을 푼다.
봐, 오늘도 결국 이래.
#.5
장마가 그치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어디로 끝나려 하는지. 새까만 하늘, 새까만 빗줄기, 쉴 새 없이 하늘에서 쏟아져 땅으로 스몄다. 그를 가라앉히고 있었다. 그 때마다 저 역시 젖어들고, 가라앉았다.
#.6
괜찮아. 당신은 나쁘지 않아. 당신이 나쁜 게 아냐. 손가락을 타고 제 목소리의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형편없는 목소리 내고 있네. 투둑, 툭. 뺨 위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그녀가 좋아하던 하늘이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그의 눈동자도 깊게 잠겨 반짝임을 잃었다.
비가 그치면 갤까. 꿈에서 깨어나면 맑아 있을까.
#.7
이슬이 맺힌 잎사귀, 햇빛 아래 촉촉한 땅, 청량한 공기, 그를 생각하면 떠올리는 것들. 그러나 눈앞의 그에게서는 그늘의 냄새만이 풍겼다. 손에 잡히는 하늘이 되어주던 파란 날개가 기름에 젖은 듯 캄캄하게 물들어 눈을 감아도 햇빛을 느끼게 해주던 냄새는 음지의 물비린내로 뒤바뀐다.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을까. 이제는 돌이킬 수 없어서 투둑, 툭. 툭. 그저 함께 가라앉았다. 저 바닥으로. 심저로.
“괜찮아. 괜찮아, 랏슈. 쉿, 잠들자.”
자고 일어나면 늘 그랬듯 전부 잊어버릴 거야.
#.8
“이건 전부 꿈이야. 나쁜 악몽. 거짓말. 당신의 현실이 아니야.”
당신은 나를 해치지 않아. 나는 당신에게 상실을 주지 않아.
그러니까, 그러니까───……아, 당신의 눈에 빛이 드리운다.
#.8.5
“이게 꿈이라면 분명 깨고 나서도 한참을 아플 꿈일 거야.”
“어째서 아무도 나를 깨워주지 않는 걸까. 혼자 먼저 잠들어 벌을 받는 걸까. 나는 꿈을 꾸면서도 분명 목 놓아 울고 있을 텐데.”
“왜 아무도”
“이 꿈을 깨우러 와주지 않는 거야?”
───물비린내가 진동했다.
#.9
소중한 것에 관한 이야기는 언제나 상실을 동반한다.
#.10
유리잔 속의 평화였다. 언젠가 깨질 것을 알고 있었다. 먼저 말을 꺼낸 건 어느 쪽이었을까. 고개를 끄덕인 건 누구였지? 이제 와서는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다만 그가 울었다. 아주 서럽게 울었다. 아파. 괴로워. 울린 건 그녀다.
미안해. 나는 이런 수밖에,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해야,
수많은 감정이 그의 눈동자를 스쳤다. 두 쌍의 날개가 새까맣게 물든다. 안녕, 미안해, 안녕. 두 번의 인사, 손끝에서 두근거리던 맥박이 끊어지자 다음은 멈출 새도 없이 이루어졌다. 그의 몸이 두둥실, 아, 안 돼, 랏슈,
#.11
“랏슈가 잠자는 숲속의 공주님이 되면, 내가 가시덤불을 헤치고 구하러 간다고 했는데. 물거품이 되어버렸을 땐 어쩌면 좋을까? 응, 랏슈. 성난 왕자가 못된 마녀인 나를 징벌하러 올 때까지 여기 있으면 될까? 하지만 정작 구해줄 공주님이 이제 없어. 이 이야기의 뒤는 당신만 알고 있는데 내게 뒷이야기를 들려줄 사람도 사라졌어. 정말로 어쩌지? 대답해줘, 랏슈. 응? 어디 있어? 어디로 간 거야?”
“아. 그렇지.”
“내가 부서트렸지.”
#.9.1
그녀에게 소중한 것이란 동시에 지키지 못한 것이었다.
이번에도 변함없이.
#.12
물소리, 바람의 냄새, 젖은 흙의 감촉, 잎사귀 사이로 비치던 햇빛, 그 모든 것에 둘러싸여 정령들이 사랑하고 축복하던 아이.
거기에 있지, 랏슈? 당신의 친구들이 당신을 데려간 거야. 이제 거기서 무섭지 않고, 아프지 않고, 오직 상냥함만으로 감싸여 행복하겠지? 그래야만 해. 부디 그래줘. 내 행복을 노래해주던 파랑새. 이제는 당신의 행복을 생각해.
#.13
장마가 그쳤다.
여전히 꿈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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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목 조르는 해시태그 기반입니다. 어딘가의 동화의 결말이 새드로 끝나고 마는 세계선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