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코 입에서 그 단어가 튀어나왔을 때, 그녀의 앞을 지나가던 사람은 분명 그 말에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아주 일순이었고 그는 그대로 앞을 걸어갈 뿐이었다.
그녀가 잘못 본 게 아니다. 상대가 무시한 거지. 그가 직접 말한 건 아니지만 아마도 그 때 그의 머릿속을 스친 건 ‘누가 키티야?’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에슬리는 그의 앞을 달려가 가로막고는 제대로 얼굴을 본 채 한 번 더 말해주었다.
“역시 키티 맞잖아~”
“누가 키티야?”
그리고 이번엔 육성으로 들었다. 오랜만에 들은 목소리에 까르르 웃음부터 터트린다. 그리고는 변함없이 무례한 손가락질을 하며 외쳤다. 오랜만이네?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어. 그렇지. 정말 오랜만이었고 또 의외의 장소에서의 만남이었다. 설마 대륙도 아니고 머나먼 바다 건너의 땅, 비사우에서 그, 카누트와 재회할 줄이야.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비사우의 속담이 어울릴 법한 재회다.
이게 얼마만이더라. 손가락으로 햇수를 세려는 그녀를 두고 남자는 다시 가던 길을 걸었다. 잠깐만, 모처럼 이런 낯선 곳에서 만나놓고 그대로 가버리기야? 쌀쌀맞잖아. 그의 뒤를 곧장 쫓으며 에슬리는 마침 손에 들고 있던 호두알을 그의 머리로 날렸다. 예의 있는 행동은 아니었지만 그와 자신 사이에 예의를 따질 사이인가?
허물없단 뜻이 아니다.
“변함없이 천방지축이군.”
예의를 차려야 한다고 생각할 상대도 아니란 뜻이지. 그녀가 던진 호두는 그의 머리를 맞히는 대신 고갯짓만으로 피해버리는 그의 귀를 스쳐 포물선을 그리며 땅으로 떨어졌다. 아, 아깝게. 이왕 피할 거면 받아먹기라도 하지 그랬어. 결국 몸을 돌린 그가 시선을 그녀에게 내린다. 언제나 그보다 한 뼘은 작은 위치에 놓이는 그녀에게 이 시야는 무척 익숙한 것이었다. 어릴 적엔 이보다 더 낮았지. 새까맣게 채워진 두 개의 눈동자가 이쪽을 또렷이 응시한다. 그 시선을 호기롭게 받아내자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타지에서 보니 상대가 누구라도 반가워진 건가? 외로운 거라면 나를 붙잡지 말고 돌아가는 게 어떻지?”
“외로워서라니 누가 그래~?”
“그럼 정말 내가 반갑기라도 해?”
너와 내가 반가울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신랄하게 날아오는 말에 에슬리는 얼굴 가득 불만을 채웠다. 외로워서라니, 아니라고 단박에 부정했지만 어쩌면 정곡을 찔려 발끈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의 말처럼 그녀와 그는 서로 예의를 차릴 만한 사이도, 타지에서 만났다고 반가워 할 사이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연히 낯선 땅, 낯선 마을의 수많은 인파들 사이에서 그를 발견했다고 먼저 말을 걸고 쫓아오다니. 정말 외로웠던 걸까.
무어라 입을 여는 대신 혼자 입술을 잘근거리며 꽁해지는 그녀를 힐끔거리던 그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고 가던 걸음을 마저 이어나갔다. 잠깐, 그걸로 끝이야? 더 대화 안 해?? 반사적으로 푹 숙이던 고개를 든 에슬리는 우물쭈물 눈치를 보다가 그의 뒤를 다시 쫓아 걷기 시작했다.
쫓아오는 그녀에게 한 번 더 시선을 준 그는 그러나 걱정과 달리 따라오지 말라거나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걸음이 느려진 것 같다고 느낀 건 그녀의 기분 탓일까? 그의 세 걸음 뒤를 따르며 에슬리는 금세 기분을 회복하여 재잘거렸다. 언제 여기 온 거야? 당신 고향은 이 근처? 혼자 왔어? 그는 놀랍게도 퉁명스러운 기색은 여전했지만 그녀의 말을 무시하지 않고 답해주었다. 몇 개는 귀찮은 듯 묻지 마. 하고 답하기도 했지만 대답해줄 수 있는 것이라면 착실히 답을 해주어 오히려 물어보는 쪽이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넌 언제 이곳에 온 거지?”
“나? 좀 됐어. 처음 이곳의 항구에 도착해서 이것저것 다 신기해서 말야. 비사우의 양식이라면 화위나 이트바테르에서 잔뜩 봤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도착한 곳은 팔라키르를 닮은 도시지 뭐야. 그래서 좀 실망했는데 생각해 보면 우리도 화위 같은 거 만들어놓기도 했고.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찬찬히 뜯어보니까 외관만 닮았지 뭐랄까 그으~ 분위기나 구조 같은 건 또 많이 다르고. 풍람이라고 했나. 그런데 항구만 벗어나니까 금세 낯선 것투성이어서……”
정말 오랜만이라고 반가웠던 걸까. 스스로에게 회의감 같은 걸 느끼면서도 멋대로 떠들기 시작한 입은 멈추지 않았다. 어느새 그의 한 걸음 뒤까지 다가가 떠들던 에슬리는 그러다 순식간에 입을 다물고,
그대로 뛰어올랐다.
“몬스터!”
아무리 이야기에 정신이 팔렸다고 해도 감이 죽진 않았다. 나타난 건 거대한 지네였다. 다리 많은 벌레의 등장에 에슬리는 잠깐 입꼬리를 당겼다. 이런 거 보면 끔찍해 할 친구가 있는데. 그나저나 마을에서 얼마나 떨어졌다고 몬스터람. 여기도 평화롭기만 한 곳은 아니라니까. 다른 생각을 할 정도의 여유를 가지며 몸을 높이 띄운다. 그대로 등에 매달고 있던 봉을 빙그르르 휘둘러 지네에게 타격을 가하였다. 크기와 달리 재빠른 녀석이었지만 민첩함이라면 그녀도 지지 않는다.
“그 앞다리의 독은 제법 강력한 것이니 조심해.”
“라져─”
사이가 좋고 나쁜지를 떠나 두 사람은 한 파티로서 몇 번이나 호흡을 맞춰본 사이였다. 굳이 작전을 짜거나 입으로 맞추지 않아도 각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었다. 가벼우면서도 좋은 철로 제련한 긴 봉이 남자의 지시에 맞춰 거대 지네의 앞다리를 깨부순다. 가장 위험한 부위를 파괴하고 나면 다음은 어려울 것이 없었다. 눈에 검은 불꽃을 피우듯 호전적인 표정이 되어 지네를 사냥하는 에슬리를 남자는 그저 팔짱을 낀 채 묵묵히 지켜보았다.
“──후우, 죽었나?”
마지막으로 지네의 머리 부분을 봉으로 관통했다 뽑아들고는 허리를 편다. 봉에 묻은 타액을 툭툭 털어내며 에슬리는 널브러진 지네를 툭툭 쳐보았다. 끈질기게 많은 다리들을 꿈틀거리며 움직이던 녀석은 이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있잖아, 이거 갖다 팔면 돈 좀 돼? 가벼운 어투와 함께 에슬리가 몸도 가뿐하게 지네의 머리 위에서 뛰어내린다. 또 돈 이야기인가 하고 남자의 드러난 두 눈이 살풋 찌푸려지려고 할 때,
“뒤!”
“어?”
죽은 줄 알았던 지네의 꼬리가 순식간에 그녀를 향해 휘둘러졌다. 피하긴 이미 늦었어. 그렇게 생각하며 봉으로 방어하였지만 휘둘러진 꼬리에 얻어맞아 날아가는 건 피할 수 없었다. 부웅하고 몸이 허공을 향해 떠오르는 느낌과 함께 시야가 어두워진다. 어딜 잘못 맞은 걸까. 에슬리는 그저 감각만으로 낙법을 하였다. 한 바퀴 구르면서 착지하고 고개를 흔든다. 시야가 돌아오기도 전에 쏜살같이 지네에게 돌아왔지만 지네는 완전히 숨이 끊어진 뒤였다. 아까 그건 자신을 죽인 인간을 향한 마지막 복수 같은 것이었나.
“제길, 짜증나.”
이렇게 허무하게 한 방 먹다니. 얼굴에 단단히 짜증이 박힌 에슬리는 봉으로 지네의 머리를 재차 깨부쉈다. 비사우의 몬스터, 아니 괴물들은 팔라키르와는 전혀 다른 생소한 것들이 많아 꼭 이렇게 한 번씩 그녀를 놀래곤 했다. 화풀이를 하는 그녀의 모습에 남자는 이미 죽은 것에게 그러지 말라는 한 마디와 함께 다친 곳은 없냐 물어봐주었다.
“없어. 멀쩡해.”
“말만 앞서지 말고. ‘너희’는 뼈가 나가도 모를 것 같으니까.”
그 정도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스스로도 확신은 서지 않았다. ‘그’에게 걱정 끼칠 순 없으니까. 투덜거리면서도 에슬리는 순순히 남자의 앞까지 다가가 두 팔을 벌리고 신체검사라도 받듯 이리저리 몸을 돌려보았다.
하지만 정말 딱히 아픈 곳 없는데. 그보다 당신이 내 몸도 신경 써줘? 그녀의 물음에 남자는 대꾸하는 대신 한쪽 무릎을 굽히고 발목 쪽으로 손을 뻗었다.
“뭐, 뭐야.”
그에 반사적으로 한 발짝 물러나며 에슬리는 눈을 휘둥그레 하게 떴다. 한 번 더 인상을 찌푸리고 남자가 멋대로 움직이지 말라는 말을 남긴다.
“발목이 부었어. 이런 꼴인데도 느끼지 못하다니.”
쯧, 하고 혀를 차며 남자는 한 번 더 새기듯 움직이지 말라는 경고를 하고 그녀의 발목을 움켜쥐었다. 에슬리로선 그가 발목을 잡고 이리저리 살펴보아도 통증 따위 전해지지 않았다. 잡힌 발목이 조금 뜨거운가? 와 그의 손이 크다는 감상만이 있을 뿐. 아니, 무엇보다도──
“……만져도 괜찮은 거야?”
근처에 있던 편편한 돌에 그녀를 앉혀놓은 채 그는 주의 깊게 상처를 보았다. 부러진 건 아닌 모양이군. 덤덤한 말에 이어 발목 위에 손바닥을 대고 그의 입에서 짧은 스펠(spell)이 흘렀다.
“가호를.”
그러자 남자의 손바닥에서부터 어둠이 몽실거리며 밀려들어 거미줄이 감싸듯 그녀의 발목을 둘러싸며 천천히 스며들었다. 가만히 있으라는 그의 말 때문에 꼼짝도 하지 않으면서도 에슬리는 헤? 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치, 치유마법 쓸 것까지도 아니었는데? 그보다 당신이? 나를??”
“불만인가.”
“불만인 게 아니라, ……아니. 불만인 건 내가 아니라 당신 쪽 아냐??”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그야 그렇지만, 그렇지만 당신은……. 입술을 우물거리며 에슬리는 그 뒷말을 잇지 못했다.
──당신은 날 싫어하잖아. 내가 아니라, ‘우리’를…….
그녀의 반응을 뻔히 알면서도 남자는 다만 입을 다문 채였다. 자신보다 눈높이가 아래로 가버린 생소한 위치의 그를 조금 막막한 기분으로 응시하던 에슬리는 조금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5년 만에 재회하였던 때인가. 그를 바라보는 눈높이가 조금이라도 달라진 걸 감사히 여겼지. 만약 헤어지기 전과 같은 눈높이에서 그를 마주했다면, 달라지지 않은 눈높이에서 달라진 그의 시선을 마주했더라면, 조금 더 서글펐을 테니까.
몇 번인가 그녀 외의 사람들을 대하는 걸 지켜보면서 의미 없는 상상한 적도 있었다. 만일 그가 그녀의 정체를 알지 못한 채였다면 과거와 변함없이 대해주었을까.
그게 무슨 유익한 망상이라고 말이지.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똑같이 싫어해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건 고작 짧은 시간 받았던 호의 때문이었을까. 5살 그 시절부터 고쳐지지 않는 버릇이네. 스스로에게 조소를 보내면서도 어쩐지 그를 향한 복잡한 심정을 깔끔하게 잘라내지 못했지. 오늘 그를 만나 졸졸 쫓아간 것도 결국 이리 부정하고 저리 부정해봤자 원점으로 돌아오고 마는 반가움이란 이유였다. 단순히 외로워서 누구라도 좋았던 것이 아니라 상대가 그였기 때문에.
“일단 치료는 했지만 바로 움직이는 건 좋지 않아.”
그러니까 업히라고 말하듯 그가 등을 내민다. 이번에는 다른 군소리 대신 순순히 매달리자 그가 몸을 일으킨다. 뒤쪽에서부터 불어온 바람은 그녀의 의식을 저 바다 건너 눈 내리는 도시로 보내주었다. 「어리광부리는 법을 알아야지 남의 어리광도 받아줄 수 있지.」 언젠가 그의 말을 떠올리며 에슬리는 이런 것도 어리광에 속하는 걸까 고민하다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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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루와 성사되기 전에 썼을 때는 차이고 이별 여행~ 기믹이었는데 사귀게 돼버려서(얼떨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