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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 인내의 끝

: 마일즈 번 더보기 【대기 모드로 전환합니까? y / n】 기다림이란 익숙하다는 말로 부족한 것이다. 본디, 도구에게 기다린다는 표현은 가당치 않다. 구태여 쓴다면 대기한다고 해야 할까. 연락이 차츰 줄었다. 의무적으로라도 보내오던 메시지는 점점 짧아지고 어색해지고 간격을 벌렸다. 마침내 달을 넘어간 메시지를 두고 안드로이드는 사직을 고민했다. 메시지를 위로 넘긴다. 시시콜콜한 과거가 올라갔다. 그녀는 유머를 아는 안드로이드였으나 손뼉은 한쪽만으로 소리가 나지 않았다. 땅이 마른지 오래다. 그를 살리고 싶었다. 주제넘은 자기만족이었다. 「나를 위해 살아라.」 당신은 지금 누구를 위해 살고 있을까. 「저를 생각해 살아주실 수 있나요?」 나는 앞으로 무엇을 보며 살아야 할까. 전원버튼을 더듬었다. 안드로이..

44 신년맞이 기차여행 上

: 타카하타 이노리 따르르르르르릉.열차의 출발을 알리는 종소리가 공을 때린다. 하루에도 수많은 열차가 왕래하는 도쿄역에서는 한 시간에 열 번이 넘게 울려 퍼지는 소리다. 「열차가 곧 출발합니다.」 초읽기를 하는 안내방송을 따라 꽁지에 불이 붙은 듯 뛰어가는 사람들도 매시간 보이는 풍경이었다. 호루라기를 입에 문 역무원은 허둥지둥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남녀를 발견하고 출발 준비를 하는 차장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아무래도 저 두 사람이 이번 열차의 마지막 탑승객 같다.“세이라, 얼른~”“가, 가고, 있어요.”계단을 내려오는 여자의 발걸음은 역무원이 보기에도 불안불안했다. 긴 스커트 아래 얼핏얼핏 비치는 발목 스니커즈는 자주 신지 않은 티가 보였고 계단을 밟는 걸음은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백팩을 맨 남자는 ..

029. 책임, 선택, 크리스마스의 온실

: 마일즈 번 겨울이 성큼 다가오는 어느 날, 마일즈 번의 연구실로 인부들이 찾아왔다. 공사가 있습니까? 물어보자 별 거 아니란 투로 눈이 내리기 전에 온실을 만들려고. 답이 돌아왔다.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판단했다. 그의 이능력과도 연관 지을 수 있고 늘상 하얀 상자 같은 연구소에 있기보다 한 번씩 온실 산책을 가는 게 무엇보다 몸의 건강에도 정신 건강에도 이로울 것이다. 카르테의 생각을 알았다면 그는 ‘또 노인네 취급이냐?’ 하고 찌푸렸을지 모르나 그녀는 진지하게 증축 계획에 찬성하였다.그곳이 자신을 위한 공간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추호도. 그러나 완성되고 나서 그곳을 가장 많이 방문하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였다. 어쩌면 이곳을, 이것들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온실로 발걸음을 옮긴지 한참..

크리스마스 선물

: 세이쇼 아야츠루 오늘은 아름다운 성야의 이브예요. 내일은 크리스마스고요. 크리스마스는 아기 예수가 태어난 날이라고 하죠? 이 세상의 모든 죄를 사하기 위해 가장 순결하게 태어나 거룩한 희생을 하신 분. 솔직히 요리는 그런 이야기는 잘 모르겠어요. 예수님은 무섭지 않았을까요? 예수님도 희생을 바랐을까요? 요리는 만약, 별들이 다음은 네 차례라고 속삭이면 의연하게 맞을 수 있을까요.이상하다. 크리스마스는 연인의 날이고 가족의 날이고 사랑 넘치는 날이라고 하는데 왜 또 엉뚱한 생각에 빠진 걸까요. 그래서 요리는 생각을 그만 두고 지푸라기 인형의 손발을 실로 잘 묶었어요. 뱃속에는 머리카락도 곱게 넣었고요. 저주인형이에요. 룻치 선배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이랍니다. 왜 이런 걸 주냐면 이런 걸 좋아할 것 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