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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014. 오늘의 폭주 5월 6일

: 올리브 이렇게 틈을 보이고 무게를 허락해주면 말이죠. 금세 어리광을 부려버리고 말아요.“그럼 한 번만, ──눈 감아줘.”이렇게요.쉽게 나온 말은 아니에요. 한 마디, 한 마디가 숨을 조이는 것만 같았어요. 심장이 쿵쾅거려서 그 소리로 머리가 꽉 차서 리브가 무슨 답을 주든 들을 자신이 없었어요.멋대로 상상하기로는 뭐? 여기서? 지금 당장? 꼭 그런 말이 들릴 것만 같았는데요. 정작 리브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대신에 한쪽만 드러난 눈동자가 쉴 새 없이 바쁘게 굴러가며 하고 싶은 말이 전부 표정에 담겼죠. 평소 같으면 크게 터져 나왔을 목소리가 다 어디로 먹혀든 걸까요. 그만큼 제가 당신을 당황스럽게 했을까요?그야 그렇겠지만.리브가 자꾸만 저를 허락해주니까 어디까지 허락해줄 건지 그 선을 분명하게..

AF::013 오늘의 꿈 5월 1일

: 얀 바이올렛 스물한 살의 생일 전날 밤은 매해가 그러했듯 무척이나 설레었습니다. 하루 일찍 도착한 친구들의 생일 선물, 자정을 기다리는 축하메시지, 내일을 기대하라는 동거인의 자신만만한 표정. 하루하루가 꽃피는 봄날처럼 행복하고 평온하지만 1년에 한 번 오는 기념일이란 유독 각별해서 그 날 밤 침대에 누우면서도 괜한 설렘을 억누를 수 없었습니다.당신이 보내온 선물도 매해 그러했듯 잘 도착해 있었습니다, 얀.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지가 언제였지요. 누군가의 생일을 챙기는 당신의 모습이 한 때는 도통 상상이 가지 않았었는데, 받은 편지와 선물이 나날이 쌓여만 갑니다. 내일 케이크와 함께 개봉할 21번째 생일 선물도 기대하고 있습니다.문득 떠오른 감상은 이날을 기점으로 제가 첫 만남의 당신과 같은 나이가 되..

AF::012 오늘의 폭주 4월 26일

: 케이 바스락하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리는 것만 같았어요. 셔츠 끝이 구겨지고, 주름 잡힌 자락을 어깨부터 벗겨 내리던 손이 그 소리를 의식하듯 또 잠시간 멈추더라고요. 이러고 1, 2, 3…… 기다리면. 하아, 한숨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말해오겠죠.“디디, 정말로 괜찮아요?”이러다 하루가 꼬박 다 지나버리겠어요. 벌써 몇 번째인지. 덕분에 긴장이 풀린 건 다행이었지만요. 키티는 알까요? 당신의 이런 태도가 오히려 저를 더 물러나지 못하게 한다는 걸요.살짝 고개를 들자 긴장한 얼굴이 보였어요. 긴장한 것 같기도 하고 어딘가 결연한 것 같기도 하고, 사실은 그런 척만 하고 눈동자 너머로는 여전히 번뇌가 오가고 망설임이 소용돌이 치고 있진 않은가요. 당신은 어느 때든 머뭇거리는 법이 없는 줄 알았는데 하긴..

AF::011 오늘의 일기 4월 26일

: 오드리 포트 그 사람은, 오드리 씨는, 언니는 한 마디로 말해서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사람이에요. 꼭 말장난 같죠. 그치만요. 사람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으면서 그 중에서도 오드리 언니는 유독 표현하기가 어려운 사람이었어요.그럼에도 굳이 한 줄로 언니를 나타내보라고 한다면 ‘여러 얼굴을 가진 사람’지금도 저는 언니의 본 적 없는 낯선 얼굴을 보고 있답니다.“Let’s go in the garden♪ You’ll find something waiting.”정확히는 보는 것보다 듣는 것이에요. 머리 위로 자장가가 들려왔거든요.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의 경위는 중요한 게 아니니 넘어가기로 할게요. 여기서 잘 봐두어야 할 건 제가 언니의 무릎을 베고 누운 것이나 덜 자란 ..

AF::010. 오늘의 꿈 4월 21일

: 올리브 꿈을 꾸던 날의 밤은 빗소리가 소란스러웠다. 지붕을 두드리며 투둑, 툭, 투둑. 리듬감 있게 울려 퍼지는 빗소리에 자연스럽게 콧노래가 나왔다. 내일은 갠다고 했지. 비가 갠 다음 날의 아침 공기를 유독 사랑하는 디모넵은 내일 더 일찍 일어날 것을 다짐했다. 흠뻑 젖은 땅이 햇빛을 받으며 말라가는 시간을 놓칠 수야 없었다. 암, 놓쳐선 안 되지.질척질척한 진흙탕 위로 아끼는 장화를 신고 나가서, 잎이 마르도록 함께 볕을 쬐는 건 아이의 소중한 취미 중 하나였다. 목새마을의 땅은 어떤 냄새를 풍기며 마를까. 보글보글 진흙탕이 끓어오르는 풍경을 그리며 평소보다 일찍 이불을 덮은 아이는, 그러고선 기묘한 꿈을 꾸었다.“좋아해요, 올리브 씨.”“난 너 안 좋아해.”뜬금없는 대담을 두고 아주 놀랍고 또 ..

AF::009. 오늘의 AU 4월 14일

: 닉스 & 포르티스 & 올리브 ▶거주민, 소중한 친구들 소개 1.오늘은 제가 아주아주 좋아하는 친구들을 몇 명 소개해보려고 해요. 이 숲의 모두가 제 소중한 친구이지만 그 중 몇 명을 먼저 말이죠. “다녀오겠습니다~”크로스백에 자질구레한 것들을 챙겨 넣고 모자를 챙겨 집을 나섰어요. 모자는 평소엔 잘 안 쓰는데요. 가끔 인간들을 만나버릴 수도 있으니까 그 때 뿔을 가리라고 들고 다녀요. 인간들은 제 뿔을 지나치게 좋아하거든요.그럼 오늘도 인간을 조심해서 길을 찾아볼까요?혼혈들의 땅이 얼마나 커다란지는 저도 아직 모르는데요. 이 땅이 보통의 눈으로는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무슨 소리냐 하면…… 으응,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목적도 없이 걸으면 아무데나 도착해버려요. 어떨 땐 집에서 여덟 걸음만..

필름이 돌아가는 건너편

: 루 모겐스 사랑이란 감정을 소리로 표현해내는 것이 그녀는 여전히 경이로웠다.앞으로도 쭉 그녀에겐 경이롭고 놀라우며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는 것으로 남을 것이다. 익숙해지는 순간 제가 저로 남지 않을 것만 같았다.그토록,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다.“사랑해, 루.”간절함을 입에 담는 일은.・・・마르지 않은 나뭇결의 냄새가 선명했다.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벽난로 불길이 두 사람이 앉은 소파까지 닿아옴에도 그 집은 여전히 젖은 공기와 새집 냄새를 풍겼다. 직접 고른 목재, 손수 칠한 벽, 손으로 훑어가며 시공이 끝난 걸 꼼꼼히 확인하였는데, 가시지 않는 풋내가 아직 이곳이 낯설기만 한 마음을 반증하는 것 같았다.“이리 와, 에슬리.”기묘한 건 그 모든 낯섦이 먼저 가 손을 내미는 그의 존재 하나로 아무렇지 않게..

with.루 2020.04.19

AF::007. 오늘의 일기 4월 11일

: 피칸 맥파이 ::꽃반지, 약속, 혼자가 아닌 강함 모두와 헤어지던 그 마지막 날의 이야기예요. 한 명, 한 명 기차에 오르는 걸 보면서 대단히 묘한 기분이었어요. 3개월을 함께한 친구들과 이별인걸요. 아무렇지 않을 수 없었죠. 영영 헤어지는 게 아닌데도 쓸쓸하고 허전하고 섭섭하고…… 한편 오묘한 기분인 건 다른 이유도 있었어요.불과 일주일 전만 하더라도 저는 기차를 타는 쪽이고 역에 남는 사람들과 손을 흔들어 이별할 거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는데 눈 깜빡하는 사이 뒤집히고 만 위치가 오묘하더라고요. 돌아가지 않는 거예요. 이곳에 남아 앞으로의 시간을 보내는 거죠. 그게, 무어라고도 말 못 할 기분이어서 열차가 점이 되어 보이지 않을 때까지도 한참 그 자리에서 모두를 배웅했어요.그러고선 막 돌아서는데 ..

AF::006. 오늘의 AU 4월 8일

::어느 챌린저의 이야기 안녕하세요. 저, 저는 지금 막 3번째 배지를 딴 초보, 아, 아니. 호프 트레이너입니다. 일단은 그, 채, 챔피언 지망이에요. 하지만 매 체육관 너무너무 힘겨워서 이번에야말로 정말 무리인가 했는데, 아슬아슬하게 이겨버리고 말았어요. 지금도 실감이 나지 않아 얼떨떨하네요. 눈앞의 관장님은 몇 번이고 저를 두고 혼자 질주해버렸는데, 어떻게 이긴 건지.[Yeeee~~~!! 멋진 배틀이었어요, 챌린저. 이것으로 3번째 배지도 무사히 GET~!! 이라고? 챔피언으로 향하는 계단을 또 한 번 오릅니다. 축하해요!]저를 응원해주는 목소리만이 저보다도 더 신이 나고 기뻐하며 축하를 해주었어요. 그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아직도 비틀거리면서 서 있는 파트너를 허둥지둥 볼에 되돌렸어요.3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