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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허물어지다

2챕 개인로그 더보기 「「그리고 비로소 「우리」가 된다.」」 지평선 너머로 타오르듯 붉은 해가 떠오르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이라면 움직여도 되겠지. 기실 불침번은 유명무실했다. 잠 못 이루는 이들이 많았다. 그래도 굳이 피곤을 무릅쓰고 깨어 있던 건 꿈속에서는 네 숨소리가 들려오지 않기 때문이다. 들려오는 목소리, 나지막한 호흡, 박동. 오르내리는 가슴. 어둠속에서 그런 것들을 살피다 보면 새벽은 금세 걷혔다. 모래밭을 지나 느릿하게 걸음을 옮긴다. 그 사이 몇 번이나 오간 덕에 호수를 찾기란 어렵지 않았다. 손을 살짝 담그자 새벽 공기 덕인지 시리도록 찼다. 잠을 깨운다. 「발만 담그고 와.」 노먼은 수영을 안 해봐서 그래. 어차피 담글 거면 발이든 몸이든 별 차이 없는데. 당사자가 들었으면 기함을..

16) 우리의 영웅 되는 길

For. 애드레이 메이거스 더보기 「아무도 죽게 하지 않아.」 「모두 살릴 거야.」 그 말을 가장 자주 들은 건 라오사 초이의 입을 통해서였다. 그야 자주 물어봤으니 자주 들을 만도 했다. 라리사 소워비는 하나라도 잃는 것을 두려워했으므로. 하나의 기준이 알파 3팀, 28명의 정원에 국한되는 건 편협한 일이었을까.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 정도는 돌아갈 수 있을 거다. 그 일부에 우리가 전부 들어있다면 더 좋고…….」 그렇게 따지자면 이 알파 3팀의 인간들은 죄 편협한 인간들투성이여서,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구나 치졸한 안심을 얻기도 했다. 하물며 치프가 해준 말이었다는 게 가장 든든한 보장이겠지. 「오늘도 많이 아팠지.」 방어팀에는 빚이 많았다. 언제나 임무를 마치고 나면 종잇장 같이 얄팍한 스..

15) 앞으로 이틀

2챕 개인로그 더보기 하얀 문에 인식표를 갖다 대자 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요, 소워비 씨. 그럼 오늘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6층 19번 연구실, 몇 번인가 본 사람들이 반겨준다. 준비된 옷으로 환복하는 동안 담당자가 오늘의 계획을 설명해주었다. 제작될 탄환이 몇 개이고 그 안에 어떻게 담길 것이며 하는 등의. “이번에 제작될 탄환은 전부 ‘2차 게이트 탐사 작전’에 쓰일 거라고 했죠? 대단하네요.” “응. 그러니까, 만들 수 있는 한 많이. 가득, 해줘.” “소워비 씨의 몸이 우선이니까 무리하면 안 돼요.” 탄환도 좋지만, 당신은 게이트 너머로 갈 당사자잖아요. 연구원의 말을 적당히 한 귀로 흘리며 유니트 체어를 닮은 의자에 앉았다. 아니, 유니트 체어보다는 미용실 분위기에 가..

14) 오년간

휴식기 개인로그 더보기 「나는 인류의 패배를 허락하지 않았다.」 라리사 소워비는 기억력이 썩 좋지 않았다. 전부는 해독되지 않던 그 독이, 모든 것을 녹여버리는 물질이 아니, 엄밀히 말해서 오드와 관련된 것만 녹여버리는 물질이 오드의 보균자 뇌까지 녹여버리곤 하던 것인지 그래서 나빠진 게 기억력인지 주의력인지 둘 다인지. 어느 쪽이든 무언가를 주의 깊게 기억하는 일이 서툴렀다. 그렇지만 그날의 목소리는 누가 카세트테이프에 넣어놓기라도 한 것처럼 생생하게 기억되곤 했다. 사실 그게 아니어도 잊어버리려 하면 그 자리에 있던 수많은 24기 훈련생들이, 25기 연합군으로 선발된 이들이 기억에 남는 커맨더의 말을 반복하던 탓에 강제로 외운 건지도 모르지. 그날의 연설은 그랬다. 아직 미숙하기 짝이 없던 훈련생들에..

13) 07.17. 자장가

For. 아단 더보기 “자장가 부를 줄 알아요?” 전날 네가 불러준 자장가는 가사가 기억나지 않았다. 작고 잔잔하고, 듣기 좋은 소리였다는 인상만이 남았는데 본래는 어떤 음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어딘지 귀에 남도록 독특해 아가야, 그 한 마디 가사가 퍽 이질적이었다. “……들어보기만 했는데, 부르면 잠이 더 잘 올까?” 마지막으로 들어본 게 바로 어제. 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인생의 반을 넘게 되감아야 한다. 어제의 너 덕분에 추억이 떠올라 혼자 가사를 헤아려본 것만이 다행일까. 낮잠을 재워주던 선생님의 손이나 부드러운 목소리, 따뜻한 오후의 햇살 아래 눈 감았던 기억을 되짚으며 누운 네 위에 토닥토닥, 손바닥을 두드렸다. 그날엔 아무런 걱정없이 평화롭기만 했는데 이곳은 햇살의 기억을 안기에는 어둡고..

12) 늘 이별을 준비하고 있어.

For. 키치 밀러 더보기 서러워하는 얼굴이 선명하게 잘 보였다. “안경 안 쓰니까, 좋은데.” 좋은데, 너무 많이 보이네. 눈앞의 서러운 얼굴과 머나먼 기억속의 누군가를 저울질하는 건 너무한 일이었다. 그야 어느 쪽으로 저울이 기울지 명백하지 않은가. 조금 서늘한 두 손이 뺨을 조물거렸다. 그런 표정 짓지 마. 왜 그런 표정이야? 「원장이란 그 사람 소중해요?」 질문에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소중한가? 아마도. 소중했어. 많이 좋아했어. 아냐도 그래. 소중했어. 좋아했어. 몹시 가까웠지. 하지만 다 지나갔어. 떠나서 이제 아무도 없어. 그렇다면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 나는 왜 매달리고 있는 걸까. ──매달리는 이유를 알아야 해? “생각이 많아지면, 몸이 무거워. 가라앉는 거랑은 다른데, 걸리는 게 ..

11) 바다에 잠기는 꿈

1챕 개인로그 더보기 아침도 밤도 여름도 겨울도 구분되지 않는 지하벙커에서 라리사 소워비는 긴 꿈을 꾸었다. 바다에 가고 싶어. 진짜 바다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곳은 정말이지 장대하고 아름다울 거야. 되뇌던 목소리는 누구의 것이었을까. 사실은 말하던 이조차도 진짜 바다가 무엇인지 모른 채, 주어진 이미지, 그 환상에만 빠져 있었으리라 이제와 헤아린다. 아냐─아나스타샤는 뭐든 하고 싶은 게 많은 친구였다. 쥐꼬리 같은 지원, 낡은 책과 헌 옷, 장난감 하나 마땅치 않은 시설에서 아이들을 불러 모으고 작은 왕국을 세웠다. 닳고 닳은 책장을 넘기며 시설의 흙을 파헤쳐 풀을 찾았고 빛바랜 사진을 응시해 사진 너머의 풍경까지 그렸다. 어쩌다 가끔 색연필이나 크레파스라도 생기면 다같이 아이의 목소리에 ..

10) 훈련 No.10 평정

1챕 개인로그 더보기 【※ 금일 훈련은 훈련생들에게 미리 고지되지 않습니다.】 어제와 같다. 팔락거리고 한 장 붙은 종이를 본 순간부터 라리사는 그다지 훈련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어제는 결국 훈련에 실패하지 않았던가. 아직도 그 상냥하던 안내음성이 떠오른다. 「훈련생이 생각하는 올바른 판단이란 무엇인가요? 훈련의 성공, 실패 여부는 그것으로 결정되어집니다.」 중요한 건 스스로가 믿는 ‘올바른 판단’, 그것만 바로 선다면 어떤 결과든 괜찮다. 하지만, 「모르겠어요…….」 몇 번을 다시 도전하더라도 올바른 것이란 무엇인지 찾을 수 없었다. 정말 그 안에서 올바른 것을 찾는다면, 바라는 답이 있다면, ──처음부터 감염자가 없는 것. 그뿐이다. 감염이란 건 정말이지 속상한 일밖에 주지 않으니. 사이렌이 울렸..

09) 훈련 No.9 결단

1챕 개인로그 더보기 【※ 금일 훈련은 훈련생들에게 미리 고지되지 않습니다.】 훈련실에 들어가기 전 받은 안내는 그렇게 적힌 종이 1장이 전부였다. 이제껏 어떤 상황이 주어지든간에 미리 알려주고 마음의 준비라든지 생각할 여유를 주던 것과 다른 엄숙한 경고에 유난히 들어가기가 주저되었다. 미적미적거리고 있을 적에 앞서 훈련을 가는 다른 동기들을 보았다. 앞서 간 동기들의 표정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게 없어서─이번에는 녹화영상을 보는 것도 금지되었다─왠지 들어가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주저됐다. 하지만 훈련을 빼먹을 순 없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 낯설고 신기하고… 또 기분 좋은 표현. ‘나는 여기서 잘해내고 싶어.’ 이곳에 오래오래 남고 싶어. 무엇이든 잘 해내겠다는 마음가짐으로 ..

08) 훈련 No.8 면담

1챕 개인로그 더보기 시야: 교관, 면담실, 따뜻한 차 한 잔 “훈련생은 어떤 파트너를 만나고 싶지?” ──어떤 차부터 마시겠나. 질문에 라리사는 멍한 눈으로 교관을 응시했다. 아무거나. 다 좋아요. 주는 대로. 답이 익숙했는지 차챠 벨로주는 그럼 이걸로 하지. 최근 자주 마시는 것인데…… 말하며 무엇인지 모를 차를 내주었다. 마시자 달았다. 차챠 교관님도 단 걸 좋아하시는구나. 맛보다는 프로틴 같은 걸 마시는 건 아닐까 했다. 차를 홀짝이고 앞에 놓인 다과를 집어 입에 넣었다. 맛있는 걸 먹고 있자니 뭘 먹고 있을 때마다 어느새 옆에 오던 친구가 떠올랐다. 여기 있는 다과, 몇 개 가져가면 안 될까? ……아니, 그 친구도 오게 되겠지. 모두가 같은 질문을 받고 다른 답을 하고 가겠지. “훈련생은 어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