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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생 -언젠가의 미래에 좋은 날이 올 테니-

For.라오사 초이 더보기 공식적으로 감염자 치료제가 개발되었다는 공표가 나왔을 때 라리사 소워비는 그 첫 번째 수혜를 누릴 수 있었다. 제일 먼저 손을 들어 자원해놓고 정작 치료제를 맞으러 가는 바로 전날까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는데, 덕분에 주변 사람들이 그 어수선함에 많이 휘말려야 했다. “정말 나아?” “낫는다고 하네.” “이제 캐리어가 아니게 된대. 이상하네.” “뭘 이상해 하고 있어. 괜찮아.” 별 거 아닐 거야. 격려를 받으며 팔을 내밀었다. 혈청과 다를 것 없는 주사를 맞았다. 놀랍게도 아무렇지 않았다. 갑자기 개벽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원래 이런 걸까? 하루 정도 경과를 지켜보자는 말에 따라 그 날은 연구소에서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특별한 거부반응이나 이상은 보이지 않음을 확인받고..

24) 반쪽의 인간

For. 이시헌 더보기 ──눈, 같아졌네. 별 것 아닌 듯 입을 열었을 때 네 표정은 어땠더라. 사실 멋쩍어서 쳐다보지 못했다. 한 번쯤 말해야지 했지만 말할 기회가 나지 않았다. 그야, 알려봤자 좋을 것도 없었고. 쭉 모르는 채여도 상관없지 않을까? 한쪽 눈을 두고 온 것이 기실 내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부자유함은 비단 눈만이 아니었으므로. 그래도 너에게는 내 입으로 말해주어야지 생각했던 건 아마도 우리가 처음 만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적, 그 첫 단추에서부터 시작된 관계 때문이다. 「……눈 색. 너도 말야. 다르네. 내 눈은 있지, 원래 이 색이 아니었는데…….」 의사 선생님이라고 주변에서 말하는 걸 들었다. 마침 네 눈도 서로 다른 색이었다. 그 때 당시의 나는 지금보다도 더 생각이 길게 이어질 줄..

23) 경계 위

2챕 개인로그 더보기 요새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생각했다. 오늘은 내 차례야. 목숨을 내놓으러 가는 건 아니었다. 리미트를 해제하는 위험성이야 잘 알고 있었지만 그만큼 돌아올 것을, 붙잡아 당겨줄 것을 알고 있었다. 믿고 있었다. 그래서 사실 그다지 무섭지는 않았다. 인간임을 포기하는 일이야 그 경계 위에서 늘상 위태롭게 벌이지 않던가. 막상 침식이 치솟기 시작했을 때는 잠시 아차했다. 이것은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손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나 혼자서는 어쩌지 못한다는 무력함과 공포가 삽시간에 발밑에서부터 덮쳤다. 우습게도 공포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자리를 부유감이 차지했다. 파도에 휩쓸렸다. 정처 없이 떠밀렸다. 나를 휩쓸던 파도란 무수히 많은 목소리, 목소리..

22) 파도 앞에서

For. 아단 더보기 「나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아요.」 그 말을 들을 때는 조금 서운할 뻔했는데. 그야 기대란 누군가를 살리는 원동력이지 않던가. 「그런데도 나는, 정이 아주 많이 들었어요.」 그제야 나는 다시 웃을 수 있었다. 네 목소리에 깃든 열이 따스했다. 기억은 반 십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할 수 있는 게 없어 어둑어둑한 벙커 안에서 기다리기만 하던 며칠간이다. 내일 나갈지 모레 나갈지, 바깥 상황은 어떤지 아무것도 알려주는 게 없어 벌써부터 땅에 묻힌 것마냥 웅크리고 있던 동안에 너와 자장가를 나누어 불렀다. 그 기억은 하나의 위안이 되어 지금도 종종 너무 조용한 밤이 오면 네가 들려주었던 희미한 멜로디를 따라 흥얼거렸다. 『아가야, 잠들렴. 밀짚에 누워. 이 밤이 깊어지기 전에 잠들렴...

21) 그리는 곳, 돌아갈 곳

For. 시윈 세르게예비치 옌 더보기 「두고 가려는 게 아니라…… 네가 자라길 바라는 거야.」 애정이 물처럼 쏟아지고 관심이 햇살 드리우는 곳에서 나는 자라고 있었다. 29살 먹도록 여즉 덜 자란 줄기가 늦은 기지개를 켜듯이 더 넓은 세계를 향해 가지를 뻗어나갔다. 누군가는 당연히 누려온 것들, 평범한 인생. 보통 사회에서 배워야 했던 많은 것들을 늦깎이처럼 하나하나 익혀갔다. 혼자서라면 하지 못했을 성장에는 너희라는 지지대가 있었다. 너희 바람을 따라 모두가 그러했던 걸 나 또한 누리게 된다. 당연하지 않았던 것들이 당연하게 주어지면서 더 많은 것을 보고 알고 욕심내게 되었다. 그러자 이 사치스러운 순간이 신기해, 신기루만 같아 이러다 천벌이라도 받으면 어쩌지 겁이 났다. 다시 그 아무것도 없는 작은 ..

20) 어떻게 말하면 좋았을까

For.키치 밀러 더보기 “죽기 직전에 너네 얼굴 생각날까봐 곤란해….” 그것만으로도 잘했다고 칭찬을 해줘야 할 것 같은데, 30분보다 더 걸려 나온 네 대답을 듣자마자 드는 감정은 불만족부터였다. 우리가 슬퍼할 게 마음에 걸리면 잘하겠다고 해야지 너는 또 죽는 순간을 생각하고 있어. 그새 수척해진 양 볼을 잘 쥔 채 심통이 난 표정만 지었다. 만약 내가 다른 사람들이 네게 말해주는 것처럼 좀 더 그럴듯한 설득이나 듣기에 좋은 말이나 듣다 보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것만 같은, 좀 더 너를 움직일 수 있는 말을 할 수 있었더라면── 나았을까. 나는 이번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말만을 쥐어짠다. “나는 죽을 가정 같은 건 하지 않고 있는데, 너는 내 앞에서 몇 번이나 그런 가정을 해.” 한 번 스..

19) 상자 안의 바다

For. 시윈 세르게예비치 옌 더보기 “너도 학교 같은 거 다니고 싶었던 적 없냐?” 한 마디 물음에 기억을 강처럼 거슬러 올랐다. 아마도 한참 옛날, 잘 기억도 나지 않을 시절에는 학교에 다니기도 했던 것 같다. 짝도 있었을까? 단짝은 언제나 아냐였으니까 그 아이였을 수도 있겠어. 그런 주제에 단짝과 나이가 같았는지조차 잊은지 오래다. 보호시설에서 지내는 동안 얻어간 건 읽고 쓰는 것과 간단한 산수 정도로, 겨우 그 정도였음에도 격리시설로 집을 옮기고 그것은 대단히 유용이 쓰였다. 오세아니아 쉘터에서도 중심부는 아니었던 격리시설은 상대적으로 중심부에 비해 낙후된 편에 속했다. 이곳까지 오는 미성년자 캐리어도 많지 않았고 어리고 미숙한, 아직 제 능력이 무엇인지 어떻게 다루면 좋을지도 모를 망아지 같은 ..

18) 뾰족한 끝

For. 카렌 클라우디아 로젠탈 더보기 어떤 경계를 그을 때 사람들은 곧잘 그것을 물과 뭍에 빗대었다. 서로 섞일 수 없는 경계로서 대표되는 이미지라는 것일까. 해변으로 밀려드는 파도, 하얀 포말이 이는 경계 위를 걸을 때마다 그 비유에 공감했다. 바다를 좋아하지만 바다를 선택할 수는 없다. 나는 인간이고, 물에서는 숨 쉴 수 없었다. 그러나 때때로 뭍의 인간으로서 여겨지지 못할 때는 차라리 확 아가미가 돋아 물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어떨 땐 사실 정말 내가 모르는 아가미가 있진 않을까 생각되기도 했다. 괴물의 증거로서. 카렌 클라우디아 로젠탈의 이름은 외우기 어려운 것으로 세 손가락에 꼽혔다. 나머지 둘은 시윈 세르게예비치 옌과 투생 은도코 엠‘본도다. 왜 이렇게 이름이 긴 거야? 물었..

17) 허물어지다

2챕 개인로그 더보기 「「그리고 비로소 「우리」가 된다.」」 지평선 너머로 타오르듯 붉은 해가 떠오르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이라면 움직여도 되겠지. 기실 불침번은 유명무실했다. 잠 못 이루는 이들이 많았다. 그래도 굳이 피곤을 무릅쓰고 깨어 있던 건 꿈속에서는 네 숨소리가 들려오지 않기 때문이다. 들려오는 목소리, 나지막한 호흡, 박동. 오르내리는 가슴. 어둠속에서 그런 것들을 살피다 보면 새벽은 금세 걷혔다. 모래밭을 지나 느릿하게 걸음을 옮긴다. 그 사이 몇 번이나 오간 덕에 호수를 찾기란 어렵지 않았다. 손을 살짝 담그자 새벽 공기 덕인지 시리도록 찼다. 잠을 깨운다. 「발만 담그고 와.」 노먼은 수영을 안 해봐서 그래. 어차피 담글 거면 발이든 몸이든 별 차이 없는데. 당사자가 들었으면 기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