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맑은 날이었다. 언제나처럼 단골 벤치에 앉은 요리는 햇볕을 쬐며 편지지의 맨 윗부분에 또박또박 이름을 썼다. 그의 편지를 받은 건 이미 며칠 전이었지만 어쩌다 보니 이제야 답장을 쓰게 되었다.
『요리는 건강합니다. 잘 지내고 있어요. 학원에서는 조금 흉흉한 일이 이어지고 있지만, 언제나 그랬듯 요리는 요리의 별이 지켜줄 거예요.
요소라는 잘 지냅니까? 또 밤새 어두운 곳에서 기록을 읽거나, 밥 먹는 걸 까먹어버리거나, 발을 헛디뎌 넘어지거나 하지 않았어요? 요리가 말한 일들 다 잘 지키고 있나요? 어차피 답장엔 다 지키고 있다고 적을 걸 알지만, ……방학하면 돌아가서 24시간 감시해버릴 거예요.』
편지의 서두는 언제나 같았다. 이렇게 말하면 그에게서는 ‘다 지키고 있어요. 요리의 걱정을 사지 않아요.’하고 똑같은 답이 되돌아온다. 2년째 반복되는 대화는 슬슬 타성에 젖어가고 있었지만 요리는 꿋꿋이 같은 말을 적었다.
『학원을 다닌 지도 2년이 되어가지만 아직 요소라의 말은 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직 요소라보다 좋아할 사람은 찾지 못했어요. 그렇지만 5년, 남았으니까. 열심히 찾아보기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졸업할 때까지 찾지 못하면 그 때는 약속을 지켜주어야 합니다. 요리는 요소라를 책임지기로 했으니까요.
(중략)───또, 밸런타인에는 초콜릿을 만들어서 모두에게 나눠주었어요. 집까지 도착하려면 오래 걸릴 테니까 요소라 몫의 초코는 없습니다.』
한참 쓰던 요리는 문득 펜을 멈췄다. ‘그 이야기’를 해야 할까?
‘요리의 별을 검은 띠가 가로질러갔습니다. 조심해요, 요리. 나는 이제 운명의 인도를 받을 수 없게 되었지만 요리의 별빛을 잘못 볼 리 없어요. ……걱정입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오빠에게 말해주세요.’
적지 않으면 적지 않는 대로 혼자 걱정을 할 테고, 적으면 적은 대로 걱정을 할 텐데. 이럴 땐 어떤 선택지도 쉽사리 고를 수 없어 고민이다. 한숨을 폭 내쉰 요리는 한 번 더 제 배를 훌쩍 들춰보았다.
밝은 곳에서 보아도 역시 말랑말랑하게 평범한 배다. 찔리거나 잘린 흔적 같은 건 없다. ……그야 당연하겠지만.
「……방송실로 도망치게 만들었다.……(중략)……K는 Y의 명치를 찌른 뒤……」
실은 전날, 그 환상이 강당에서 끊겨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방송실까지 이어졌다면 꼼짝없이 보고야 말았을 것이다. 제 명치가 긴 검에 꿰뚫리고, 그대로 죽어버리는 모습을. 그리고 겪었겠지. 마치 진짜 자신이 겪은 양.
이제껏 죽음은 언제나 자신의 일이 아니었다. 별의 축복을 받고 태어나, 별의 수호를 받는 나나츠보시 가문의 적통후계자. 피할 수 있는 운명이라면 피할 길이 제시되고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가장 부드럽게 넘어가도록 지켜졌다. 죽음은 자신의 몫이 아니었다. ──다만 제 옆의 누군가의 몫일 뿐이었다.
“이런, 거, ……겪었던 거구나.”
일부러 방송실을 피했다. 부적을 사용하더라도 그 자리에 없으면 괜찮을 줄 알았다. 유하가 그랬는걸. 그런 고통 겪고 싶지 않아. 피하고 싶어. 그런 마음으로 방송실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환상은 요리가 도망치는 걸 허락해주지 않았다.
꽁꽁 얼어붙은 보건실에서, 아야츠루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 생각보다 더한 추위에 손끝 발끝이 얼어붙을 것만 같았지만 그래도 맞닿은 체온은 제법 따뜻해 견딜 수 있었다.
피한 줄 알았던 한기는 그러나, 피부에서가 아니라 좀 더 깊은 곳에서, 영혼을 찌르듯 찾아왔다. 뒷목이 쭈뼛하고 설 것만 같은 오싹함, 동시에 명치가 아려오기 시작했다. 아리다고 표현하면 될까? 말하자면 무언가가, 제 속을 헤집는 듯한, 뱃속이 화끈거리는 그런 통증. 날카롭게 벼려진 것이 쑤셔 박혀 그대로 제 허리를 끊어버리는 것만 같은……, 정신을 놓아버릴 것만 같은……──.
맞닿은 체온이 아니었더라면 그대로 환상통에 숨이 멎었을 것만 같다. 침착함을 찾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눈앞에 잘려나간 제 상반신이 보인 덕분이었다. 만약 저 앞에 있는 게 정말 내 몸뚱이라면 내가 보고 있을 리 없지.
겨우, 누군가 목을 조르듯 내뱉지 못하던 숨을 토해내고 나서야 요리는 제 머리카락이 손바닥에 떨어진 것을 발견하였다.
몸뚱이가 잘린 감각이 서서히 멀어지자 뒤이어 찾아온 건 공포였다. 누가? 코우 선배가? 누구를? 나를? 얼음물에 머리를 담갔다 뺀 듯 전신의 피가 싸늘하게 식으면서 두려움이 찾아왔다. 죽을지도 몰라. 아니, 죽었다 돌아왔어. 그런 경험, 머리가 이상해질 것만 같아서,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무서워무서워. 너무 무서워. 요소라. 나는, 무서워서, 죽고 싶지 않아서……───역시 나는, .
잠시 멍하니 있던 정신을 되돌린다. 어제의 일을 되새기자 또 배가 아파오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새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다. 얼른 편지를 마저 쓰지 않으면. 그리고 어서, 원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불쾌한 건 청소하면 된다고, 그랬으니까.
“───아, 룻치 선배가 꼭 안아준 덕분에 살았다고 요소라한테 쓸까나.”
『맞아, 요소라. 오빠 후보가 한 명 더 나타났습니다. 언니도 생겼어요. 오빠 후보는 음음음, 좀 이상한 사람이지만 요소라가 없는 학원에서 의지해도 된다고 말해주는 사람입니다. 요리의 사랑을 피해서 도망가려고 하는 건 요소라와 닮았지만, 건강하게 곁에 있어주기를 노력한다고 해줘서 요리도 사랑의 물뿌리개를 듬뿍듬뿍 뿌려주기로 했습니다. 요소라 여기 읽으면서 쓴웃음 지었죠?
……그리고, 네. 요소라가 걱정한 ‘무슨 일’은 벌어졌습니다. 너무너무 무서워서, 사실은 울고 싶었어요. 이불 속에 꼭 숨어서 나오지 않고 싶었어요. 그래도 걱정해주는 사람이 많아서 이불 속보다 나와 있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소라의 말대로 학원에 오길 잘한 것 같습니다. 요리의 별이 검은 띠를 다 벗어나려면 아직 시간이 걸릴 것 같지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요리는 무사할 거예요. 요리의 별이 검은 띠를 벗을 즈음에는 요소라에게 이 편지가 도착하겠죠. 그러면 읽고 안심해주세요.
답장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요소라의 별이.』
마침표까지 서둘러 찍고 편지를 봉한다. 부치는 건 내일로 할까. 지금은 강당에 갈 준비를 해야지. 오늘의 전투도 대단히 걱정스러웠지만 요리는 적어도, 자신은 죽지 않을 것을 믿었다. 그런 운명이었으니까.